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74)화 (175/227)

174화 수복기 (24)

울산에서 볼일을 끝마친 나는 울산 생존자 캠프 거리에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해 울산 경찰청 부지 전체를 영역으로 지정해서 그들을 머물게 해 주었다. 우리가 각성자라는 사실을 일반인들에게 이해시키느라 애 좀 먹었지만.

어쨌든, 본래 울산을 복구하는 건 포항 문제를 해결한 뒤에 부산과 함께 적당히 짬 처리를 할 생각이었지만, 당장 머물 곳도 갈 곳도 없는 그들을 위해 선심 한 번 쓰기로 했던 거다.

마피아들이 머무르던 대형 백화점을 영역으로 지정해서 넘겨줄까 생각도 했지만, 막상 그곳을 영역으로 지정해 봤자 그리 안전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왕이면 영역 지정 스킬을 사용해도 뽕을 최대한 뽑아낼 수 있는(주로 안전 문제) 경찰청을 택했고, 다행히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사장님의 거점과 영역화 스킬은 어떤 장소를 지정하느냐에 따라 매우 큰 폭의 변화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예전부터 스킬을 사용하면서 느꼈던 건데, 확실히 건물이나 부지의 쓰임새에 따라 리뉴얼 과정도 천차만별이더라고요.”

한동석의 말대로 내 거점, 영역 지정 스킬은 공공의 이익과 질서, 보안이 중요시되는 장소일수록 안전 문제가 대폭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밀양역, 부산역, 동대구역, 김해 공항, 공업 단지 그리고 그랜드 이승권 호텔에만 경비 로봇이 배치된 이유가 그 때문이다.

반대로 홈마트처럼 대량의 물자를 얻을 수 있는 거점은 최소한의 거점 방위 무기만 존재할 뿐, 안전보다는 이익을 더 중시한 느낌이 크다.

안전과 이익의 비중은 다소 떨어지지만 편의성을 크게 챙긴 거점도 존재하는데, 그게 바로 활천초와 병원이다.

대량의 물자를 획득할 수도, 철통같은 경비와 안전을 보장하지도 않지만, 거주 공간으로 활용하기에 부족함은 없으며 필요 최저한의 모든 것이 갖춰진 거점들이 주로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울산 생존자 캠프 거리의 사람들에게 임시 거처로 제공해 준 경찰청 거점은 그야말로 철통 요새나 다름없는 형태가 되었다.

자동으로 외부인과 적성체를 감지하고 움직이는 감시 카메라와 기관포, 어지간한 교도소 담벼락보다 높은 콘크리트 벽과 24시간 쉬지 않고 순찰을 도는 경비 로봇들까지.

일반인들이 저곳에 머문다면 금세 숨이 턱턱 막히겠지만, 머지않아 부산처럼 완전한 죽음의 도시가 될 울산에선 그나마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어떤 영역을 스킬로 지정할지 좀 더 고민하게 됐으니 스킬을 함부로 남발할 일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하면 되겠죠.”

“혹시 스킬 시전 횟수에 제한 같은 게 있습니까?”

“일단 거점 지정 스킬일 때부터 쭉 존재했던 제한은 ‘72시간에 1회 시전’뿐이에요. 스킬 사용 횟수 자체는 무제한이지만, 영역 지정 스킬의 범위가 그때그때 다르니 신중하게 시전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예를 들어 공업 단지를 영역으로 지정하면 한 카테고리에 묶인 공업 단지 부지 전역이 영역으로 지정되지만, 반대로 같은 카테고리에 묶이는 부지나 건물이 존재하지 않으면 거점 지정 스킬을 시전한 것처럼 효율이 극도로 떨어진다.

그렇다면 이론상, 내가 평생에 걸쳐 영역 지정 스킬을 사용한들 대한민국을 온전히 수복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고작 작은 도시 안에 존재하는 온갖 건물과 부지들만 해도 카테고리가 다른 게 수두룩한데, 어느 세월에 그걸 다 일일이 영역으로 지정한단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최종 스킬에 ‘국가 선포’가 존재하는 거겠지. 내가 선포한 국가 안에 포함된 모든 국토를 지정하는 거니까.’

내가 괜히 무지성으로 영역 지정 스킬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섣불리 영역으로 지정했다가 범위 내에 들어오는 카테고리가 내 예상보다 훨씬 좁다면? 혹은 강력한 무력(화력)을 가진 적들에게 허무하게 영역을 파괴당한다면?

그런 불상사가 일어날 경우 스킬 시전 쿨타임을 72시간만큼 손해 보는 건 물론이고, 해당 영역을 내 아래에 둘 수 있는 기회마저 영영 잃어버리는 건데 당연히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알다시피 난 손해 보는 게 끔찍이도 싫다.

내가 손해 봐도 좋다고 생각하는 마지노선은 배달 음식 주문할 때 청구되는 배달비 3천 원까지다. 그래서 1년 내내 김해에서 방구석 여포 생활을 할 때도 배달비가 3천 원을 초과하는 가게는 절대로 주문하지 않았다.

“아무튼 제 스킬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아직 상태창이나 시스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으니 좀 더 알아봐야겠지만, 불필요한 걱정까지 하면서 가슴을 졸일 이유는 없잖아요?”

“그럼 다행입니다만, 그래도 역시 그 경찰청 거점에서 전술 차량 한 대는 가져올 걸 그랬습니다. 슬슬 저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계속 걷기만 하면 무릎 건강이 위험한데…….”

“아재는 좀 걸어야 돼. 왕년에 산을 그렇게 많이 탔다고 맨날 자랑하면서 나보다 체력이 없다는 게 말이 돼?”

“야! 넌 근거리 특화 각성자라서 나보다 스텟도 높고 전용 스킬도 있잖아! 너도 나처럼 원거리 특화로 각성했으면 지금쯤 앓는 소리 했을걸?!”

“…….”

어느샌가 개개인의 컨디션을 논할 때 젊고 늙음을 지적하는 것보다 각성자들 간의 스텟이나 스킬을 논하는 게 당연한 시대가 됐다. 확실히 우리의 인식이 ‘이전 시대’보다 눈에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일반인의 관점과 각성자의 관점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걸 잘 보여 주는 사례였다.

나는 입가를 가린 머플러 끝을 당겨 올리면서 걷는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이미 울산을 빠져나온 지 하루하고도 조금 더 지났지만, 애초에 본래 목적지가 포항인 만큼 여유롭게 쉴 틈은 없었다.

나도 걷는 건 더럽게 싫고, 또 느리게 움직이는 건 더더욱 싫지만 그래도 차량을 끌고 포항으로 올라가는 건 조금 위험하겠다 싶어 결국 포기했다.

‘그 마피아 놈들이 포항 남구의 어떤 세력에게 정기적으로 상납을 하고 있다고 했지. 그런 썩어 빠진 무뢰배들도 상납을 바치고 있을 정도라면 필시 포항에 자리 잡은 놈들은 각성자 집단일 거야.’

창원에 자리 잡았던 무장 집단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각성자 집단 정도는 돼야 그런 쓰레기들도 굽히고 들어갈 것이다.

현재 내가 파악한 최대 규모의 각성자 집단과 군벌은 모두 대구에 있지만, 그렇다고 포항에 자리 잡은 세력들을 섣불리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다수의 생존자가 밀집된 곳은 각성자와 일반인 비율을 따지지 않고 좀비들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매일마다 적게는 수백, 많게는 수천 단위로 몰려드는 좀비들로부터 꾸준히 살아남고 있다는 건 그만한 역량이 된다는 뜻이다.

“잠깐, 저 앞에 뭔가 있습니다.”

울산에서부터 해안 고속 도로를 타고 북상하던 우리는 경주에서 포항으로 이어지는 동해 고속 도로 한복판에서 우뚝 멈춰 섰다.

경주는 고속 도로 주변이 온통 산이라 보이는 거라곤 버려진 차량이나 피난민들의 짐꾸러미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눈 좋은 한동석이 갑자기 뭔가를 봤다고 하니 나도 무의식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전방을 살폈다.

하얀 똥을 쏟을까 아니면 투명한 오줌을 쏟을까 고민하고 있는 우중충한 하늘 아래, 포항 남구로 이어지는 경주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상당히 기괴한 구조물과 마주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그것은 누군가의 악취미스러운 장난기와 추악함으로 점철된 악의를 찰흙 반죽처럼 마구 섞어서 여봐란듯이 전시한 ‘작품’이었다.

자신의 정의로운 아버지를 따라 그 한 몸 바쳐 가면서 검을 휘둘러 피난민들을 지켜 냈다던 진가희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나름대로 험한 인생을 보내며 온갖 더러운 꼴을 다 봐 왔다던 한동석도 특유의 여유로움 따윈 잊어버리고 거친 욕설을 흘렸다.

“역겨운 새끼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딴 짓을……!”

불쌍한 생존자들을 최대한 쥐어짜 내며 핍박하던 마피아들 따위는 양반이라는 듯, 한동석은 거대한 철골을 용접해서 고속도로 한복판에 세워 둔 ‘표지판’을 노려보았다.

누군가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표지판’, 어쩌면 ‘식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그 장소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못 박혀 있었다.

좀비들의 손과 이빨이 닿을 만한 매우 애매한 높이에 못 박힌 수백 명의 인간들은 외부에서 몰려든 좀비들에 의해 반쯤 뜯어 먹혀 죽었거나, 죽는 것보다 감염이 빨라서 졸지에 못 박힌 좀비 꼴이 되어 있었다.

그런 철골 구조물이 서로 엮이고 엮여서 하나의 거대한 표식이 되어 있었다. 피와 시체로 새겨진 ‘백(帛)’ 글자는 필시 이런 짓을 저지른 장본인이나 그가 소속된 세력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습기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 아님에도 지독한 시취로 가득 찬 고속 도로 한복판은 얼마나 많은 좀비들이 항구의 갈매기 떼처럼 이곳을 덮쳤는지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처음 철골에 못 박히고 용접된 인간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고, 다시 찾아오는 고통에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또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반복했겠지.

차라리 기절한 끝에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죽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단체로 내지르는 비명은 널리 퍼졌을 것이고, 도시 외부에서 도시 내부로 전진하는 좀비 무리의 청각을 자극했음은 불 보듯 뻔했다.

산 채로 못 박힌 채 뜯어 먹힌 이들은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약자 주제에 강자에게 반항하거나 도망치려고 시도하면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

나는 주변에 남아 있는 핏자국과 좀비들이 요란하게 축제를 벌인 흔적을 더듬어 가며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대략적인 추측을 끝마쳤다.

밀양에서도 느꼈던 역겨움과 불쾌감이 목구멍을 비집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땐 그래도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신해룡 육참총장에게 대신 처리를 맡겼고, 실제로 그 학살 사건을 주도한 놈들은 모조리 잡아들여서 처벌했다는 결과도 전해 들었다.

하지만 이곳은……

‘정말로 포항을 좀비들의 위협으로부터 구해 내고, 경상도 지역 일대를 재건하기 위해 내가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놈들을 위해서?’

좀비를 격살하고 처단해서 다시 인간들의 영역을 되찾아도 모자랄 판국에, 같은 인간을 핍박하고 죽이기 위한 도구로 좀비를 사용하고 있는 놈들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나?

“…….”

척 보아하니 주요 도로를 봉쇄해서 좀비들의 진입을 사전에 차단하지도, 그런 노력을 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즉 이 도시에 있는 놈들은 뭐가 됐든 좀비를 큰 위협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거나, 좀비를 자신들의 형편에 맞게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거다. 좀비들을 사냥개로 써먹었던 그 빨갱이들처럼.

“내가 이런 나라의 국민을 위해서 5년이나 희생을 했다고?”

이런 쥐뿔도 없는 나라에, 병신 같은 국민을 위해서?

부모도 잃고, 전우도 잃고, 내 창창한 미래까지 잃어버리게 만든 것들을 위해서, 인간 한 명이 바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헛되이 낭비했음에도 ‘그래도 나는 애국자야.’라고 한심하게 정신 승리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자기혐오가 구역질처럼 울컥울컥 치솟는다.

-미친 새끼들, 우릴 죽이려고 민간인까지 같이 죽였어.

-우리가 민간인 소개 작업 하는 걸 기회로 삼은 거야. 그때 기습을 당해서 옆 소대 애들은 다 갈려 나갔고 우리 소대 애들도 반은 죽거나 다쳤어.

-옆 소대 박지민 병장, 다섯 살도 안 된 애한테 자기 방독면 씌워 주고 자기는 화학탄에 그대로 노출됐다더라.

-좆같은 새끼들, 싹 다 죽여 버려야 돼. 총 들고 싸우는 우리만 죽일 것이지, 죄 없는 민간인들은 왜 건드려?

맞아.

다 죽여 버려야 해.

놈들의 골통을 군홧발로 짓밟아서 깨부수고 사지를 하나씩 뽑아서…….

“움직입시다.”

나는 손해 보는 게 끔찍이도 싫다.

하지만 배달비 3천 원만도 못한 놈들을 위해서라면 그깟 손해쯤 얼마든지 감수해 주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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