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73)화 (174/227)

173화 수복기 (23)

나는 진이 다 빠진 채로 간신히 돌아온 스캐브, 아니 이제는 새로운 울산 거리의 생존자가 될 조형식 일행을 맞아 주었다.

운 나쁘게 총이라도 맞는 건 아닌지, 아니면 평소처럼 구타를 당하거나 신체 일부가 잘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많았을 텐데, 다행히 그들은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다.

딱 하나 멀쩡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치명적인 오염수에 노출되어 사망 판정을 받은 조형식의 바지 정도.

하지만 이젠 괜찮다.

죽거나 다쳐서 돌아온 사람도 없고, 폭탄 배송도 무사히 끝마쳤으며, 우리를 그렇게나 괴롭히고 있던 진눈깨비도 어느 순간 뚝 그쳤으니까.

머지않아 우중충한 하늘이 걷히고 겨울 특유의 시리도록 푸르고 맑은 하늘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지난날 동안 핍박받으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저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는 지금 이 순간처럼.

나는 두려움으로 인한 긴장감 때문인지, 아니면 추위 때문인지 사시나무처럼 미친 듯이 떨고 있는 그들 앞에 다가가 말없이 발파 스위치를 건네주었다.

“이, 이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 내고, 약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강자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말을 믿고 과감하게 투자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조형식 일행은 마치 자신들의 목에 합격 목걸이가 걸린 것처럼 눈물 섞인 미소를 자아냈다.

우린 어차피 안 될 거야, 우린 호구처럼 저들에게 실컷 부려 먹히다 죽을 거야, 그런 패배 의식에 젖어 있던 폐급 고문관들이었다면 이런 간단해 보이는 일이라도 쉬이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해냈고, 스스로 두려움을 이겨 냈다.

아주 작은 한 걸음이지만, 중요한 것은 퇴보가 아닌 전진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선뜻 발파 스위치를 누르지 못하는 이들에게 마지막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트럭 화물칸에 숨겨 두었던 총기를 꺼내 들었다.

각자의 손에 쥐어지는 묵직한 금속 덩어리.

그것은 방아쇠를 당기면 총구에서 납탄이 쏘아져 나가고, 총구 앞에 서 있는 누군가는 반드시 죽게 되는 데스노트 같은 요술 지팡이였다.

예비군은 이미 한참 전에 끝낸 아재들이었지만, 대한민국 남성들이라면 이 낯익은 감각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아아, 이 서늘하고도 묵직한 감각. 곤뇽 조형식으로 돌아갈 때다.”

“할 수 있어. 우린 할 수 있다고. 아미 타이거! 아미 타이거!”

“내 AK가 굶주렸다…….”

“이 영롱한 마카로프의 자태를 봐…….”

다시 총을 나눠 받은 그들은 갑자기 미친 듯이 아미 타이거를 연호하며 아프리카 반군처럼 기세등등해졌다.

“자, 뭘 망설이는 겁니까. 당신들 앞에 있는 건 5억 년 버튼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원격 폭탄 발파 스위치입니다.”

놈들의 본거지로부터 충분히 멀어졌겠다, 더 망설일 것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들은 다 함께 손 위에 손을 겹치고 있는 힘껏 발파 스위치를 내려치듯이 눌렀다.

콰아아앙! 쾅! 쿠르르……!

내가 물자 사이에 섞어 넣은 폭탄은 각성자가 상점창에서 구입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DNA 샘플값을 했다.

놈들의 본거지 내부에서 폭발한 폭탄은 가연성 물질이나 화약류를 건드렸는지,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었음에도 건물 전체가 쿠르르르 진동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한겨울의 폭죽놀이치곤 다소 과한 감이 있었지만, 마피아 놈들이 자신들의 본거지에 위험천만한 물건들을 같이 보관한 게 잘못이지 딱히 내 책임은 아니잖은가.

“하, 하하…… 하하하! 저 똥물에 튀겨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이 드디어……!”

“그대로 몽땅 다 뒈져 버려라, 이 코쟁이 새끼들아! 네놈들이 처형한 불쌍한 사람들한테 죽음으로 사죄해라!”

“만약 운 좋게 살아 있어도 이번엔 네놈들 입으로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해 주마!”

충격파로 깨져 나간 창문에서 시커먼 연기가 치솟는 것을 보고 조형식 일행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이렇게나 간단한 것을.

그저 아주 작은 기회가 없어서 지금까지 고개 숙인 채 노예처럼 살아야 했다는 사실이 못내 부끄럽고 원통한 듯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기뻐할 때는 아니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화재가 일어난 본거지에서 헐레벌떡 뛰쳐나오는 마피아 잔당들을 가리켰다.

“저렇게 신의도 없이 제 목숨이 위태로워지니까 바로 도망가는 놈들에겐 불방망이 맛을 보여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아주 크고 아름다운 불방망이.

나는 SMAW를 꺼내 들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최대한 멀어지려는 놈들의 이동 경로를 예측했다.

비유도, 충격 신관 로켓을 발사하는 로켓 발사기의 장점은 꽤나 먼 곳의 목표물을 저격하듯이 핀 포인트로 타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저격은 좀 과장된 말이지만, 그래도 내 군용 무기에 대한 보너스 효과와 사격 스킬 효과까지 더한다면 얼추 수백 미터 이내의 움직이는 목표를 로켓으로 조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내 직감과 내 스킬, 그리고 이승권이라는 존재가 내포하고 있는 막강한 자아가 그것을 보증하고 있다.

“간다 간다 뿅 간다!”

투하아아아아!

내가 자주 애용하는 열 압력 탄두가 콘크리트 밀림 속 아스팔트 도로 위를 맹렬한 속도로 가로지르며 쏘아져 나갔다.

모두가 숨죽인 채 나의 현란한 장거리 화력 투사를 지켜보았고, 마침내 열 압력 탄두가 정확히 마피아 잔당의 한복판에 꽂히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저거 한 발당 DNA 샘플이 얼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메시지니까.

누구든 감히 이 도내 최고 섹시남 이승권에게 외모세도 아니고 통행세를 걷으려 한다면, 총알과 로켓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매우 강력한 경고 메시지였다.

* * *

좀비는 새로운 시대의 경제 화폐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일반적인 좀비는 사살하면 1 DNA 샘플. 조금 변이한 느낌이 있는 놈들은 평균적으로 3~5 DNA 샘플, 딱 봐도 뭔가 흉흉해 보이는 놈은 10 이상의 DNA 샘플을 준다.

보상이 DNA 샘플뿐이었다면 각성자들도 경험치를 얻는 과정에서 획득하는 ‘짭짤한 용돈’ 정도로 생각했겠지만, 좀비들은 가끔 타입에 관계 없이 랜덤한 확률로 아이템을 떨구기도 한다.

주로 제작 레시피나 재료 같은 것들이지만, 이것들을 하나둘씩 모으다 보면 짭짤한 용돈 이상의 수익을 기대할 수도 있다.

또 경험치를 얻어서 직업 숙련 레벨을 올린다면 랜덤한 확률로 특전 스킬 같은 보상을 주기도 하니, 단지 좀비를 사냥하는 것만으로도 더 강해지고, 더 부유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머리가 잘 굴러가는 사람들은 좀비가 가진 ‘경제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사업 상품으로 써먹으려는 기똥찬 시도를 하게 된다.

당연하지만 각성자가 강해지고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좀비들을 잡을 필요가 있는데, 그 많은 좀비들은 대부분 위험천만한 야전에 존재한다.

아무리 욕심이 많아도 목숨은 아까운 법이니 수십, 수백만 좀비들이 들끓고 있는 외부 지역으로 나가는 각성자들은 굉장히 드물다.

생존자들이 많은 도시를 향해 일정 주기로 끊임없이 몰려드는 좀비 웨이브도 있지만, 그건 경쟁자들이 너무 많아서 생각보다 효율이 좋지 않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 강해지고, 더 부유해지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요는 나날이 증가하는데 정작 공급은 턱없이 부족하니, 사업자의 입장에선 이보다 더한 골칫거리도 없다.

“여기 젊은 연놈들 120명에 쓸모없는 노인네와 환자 포함 300, 시끄러운 애새끼들 32. 총합 452명 준비해 놨으니 얼른 데려가쇼.”

“우리가 부탁한 물량은 500이었는데?”

“부탁을 한다고 물량이 그만큼 맞춰지면 개나 소나 다 이 짓거리 하고 부자 됐지, 이 양반아. 위험한 외곽 지역의 생존자 캠프까지 싹 털어서 겨우 준비했더니만, 실없는 소리 할 거면 그냥 가쇼. 이제 창원에 우리가 사냥할 수 있는 인간들은 더 없어! 아주 씨가 말랐다고. 이제 우리도 다른 지역까지 원정 뛰어야 할 판인데 지금 농담하는 것 같아?”

“쯧, 대신 부족한 48명분만큼 대금에서 제하겠다.”

“그건 알아서들 하시고. 삼식아! 손님들 차량에 화물 실어라!”

지역 전체를 통제하는 단일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포항에선 지금 인신매매가 크게 성행하고 있었다.

좀비 사태가 발발하면서 부산과 울산, 경주에서 도망쳐 올라온 엄청난 수의 피난민들이 포항에 자리 잡았겠다,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저 위쪽 지방의 피난민도 경상도까지 내려왔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넘치는 게 사람이었다.

하지만 좀비가 돈이 된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각성자 집단, 범죄자 집단은 서로 질세라 경쟁적으로 일반인들을 잡아들였고, 그들을 필요로 하는 집단에 팔아넘겼다.

거대한 화물 트럭에 가축처럼 실려 간 인간들은 강원도의 어느 도시에서 좀비들로 가득한 경기장에 몰아넣어지고 좀비의 수를 대폭 늘린다고 한다. 기존의 좀비들은 인간을 많이 감염시키면 변이까지 하니 각성자들 입장에선 일석이조인 셈.

그렇게 좀비의 수가 확 늘어나면 각성자들이 손쉽게 살상 무기나 스킬을 이용해서 신나게 경험치와 DNA 샘플, 제작 레시피 같은 희귀 보상을 파밍한다.

인간 사냥, 인신매매, 좀비 사육, 그리고 경험치와 DNA 샘플 수확까지.

이 잔혹한 공정이 서로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면서 포항과 교류하는 모든 지역은 범죄자 전성 시대를 맞이했다.

한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고, 더 강한 힘을 갖게 되는 현상이 이제는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에도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오늘도 짭짤하게 벌었네. 쓸모없는 놈들 좀 팔아먹었다고 물자가 이렇게나 많이 들어올 줄이야. 사람이 금값이야 아주.”

“이번 달 판매량 역대급인데 오랜만에 회식 안 합니까, 형님?”

“이 새끼는 입만 열면 회식이래. 누가 들으면 내가 밥도 안 주고 일만 시키는 악덕 사장인 줄 알겠다.”

일을 끝마치고 돌아온 삼식이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친 남성은 포항 남구 일대를 주름잡고 있는 ‘인간 시장’의 주인인 백도진이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넘치는 게 인간이라 물량 공급에 차질이 없었는데, 최근 들어 인간 사냥꾼들이 인근 지역을 이 잡듯이 들쑤시고 다닌다는 소문에 숨거나 도망쳐 다니는 놈들이 많아 시간이 점점 지체되고 있었다.

“경제 발전에 이바지 좀 하고 뒤져 달라는데 그게 뭐 그리 어렵다고 사람 귀찮게 하는 건지 원……. 삼식아! 밥이나 먹자!”

“진짜 회식합니까?!”

“돈 없어, 새꺄! 라면이나 끓여!”

뺀질거리는 삼식이에게 호통을 쳐 준 그는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오늘 차 장부를 점검했다.

“음? 오늘 그 루스키 새끼들이 상납금 바치는 날 아니었나?”

이미 단물 다 빠진 울산에 자리 잡아서 총질이나 하고 다니는 마피아 놈들의 뒤를 봐주는 대가로 상납을 받고 있었는데, 마침 오늘까지 들어와야 할 상납이 아직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하여간 외노자 놈들은 우리 말로 하면 못 알아듣는다니까. 세종 대왕님이 지하에서 우신다, 울어!”

애들 몇 명 보내서 군기 좀 잡고 기둥이나 하나 뽑아 오게 하려던 그때, 그의 부하 한 명이 다급한 표정으로 창고에 달려 들어왔다.

“혀, 형님! 형님!”

“왜? 너도 오늘 회식하고 싶은 기분이냐?”

“그게 아니라! 울산에 있는 우리 따까리 놈들! 그놈들이 하루아침에 다 죽었답니다!”

실실 웃고 있던 백도진의 표정이 벌레 씹은 것처럼 썩어 들어갔다.

“분명 거긴 우리가 뒤 봐주는 곳이라고 주변에 알리지 않았나? 어떤 새끼들이 겁대가리 없이 우리 따까리를 건드려?”

“그게…… 아무도 모른답니다. 바로 어제 인간 사냥꾼 몇 명이 울산에 잠시 들를 겸 물자를 조달받으려고 놈들 본거지에 들렀는데, 거기 있던 놈들이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떼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확실해? 그 새끼들이 괜히 일 저지르고 오리발 내미는 거 아니야?”

“그 인간 사냥꾼들 중에 ‘기자’로 각성한 놈이 있었는데, 그놈이 따까리 놈들 본거지 상황을 직접 촬영해서 저한테 보여 줬습니다. 그 노예들로 스너프 필름 찍는 미친 변태 놈 있잖습니까.”

“염병.”

인간 사냥꾼들이 하나같이 머리에 나사 한두 개씩 빠진 놈들이긴 하지만, 오히려 타 세력의 이권이 걸려 있거나 보호를 받는 구역은 잘 건드리지 않는다. 자칫 잘못하면 세력 간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놈들이 직접 인간을 사냥하지 못하면 내부 수요를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곳에서 인간을 구입할 만큼 그런 부분은 철저하다.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인간들이 굳이 자신이 뒤를 봐주고 있는 마피아 조직의 본거지에 폭탄 테러 같은 걸 할 이유는 없으니 거짓말은 아닐 터.

“그럼 우리가 모르는 제3자가 그랬다는 건데……. 일단 애들 풀어서 최대한 정보 수집해 봐. 최근 주변 지역에 큰 변화는 없었는지, 이쪽 지역을 노릴 만한 또 다른 세력이 있는지 같은 것들.”

“예!”

부하를 내보낸 백도진은 인간 452명분 대금으로 받은 물자 중 싱싱한 사과 한 알을 집어 들어 크게 베어 물었다.

“포항과 강릉 사이에 엮인 이권이 얼마나 많은데, 겁대가리가 없는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어떤 건방진 놈이 이 짜고 치는 거대한 판에 주제도 모르고 흙발을 들이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체를 밝혀내기만 한다면 자신을 포함해서 수많은 세력들이 집중 공세를 퍼부을 것이다.

원래 알 거 다 아는 선수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물 흐리는 미꾸라지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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