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72)화 (173/227)

172화 수복기 (22)

나는 건물 지하 주차장 입구 근처에 차를 대고서 조형식을 대표로 한 조공단을 내보냈다.

마침 지하 주차장 안쪽 깊숙한 곳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으니, 아마 마피아들이 드럼통을 가져다 놓고 모닥불을 피운 모양이었다. 나머지는 저들에게 맡기면 된다.

“우린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 그럼 우리만 안으로 들어갑니까?”

“딱 봐도 울산 생존자 캠프 거리 소속이 아닌 우리가 따라 들어가면 당연히 의심받을 테니 당신들만 가자고요. 그냥 물건을 갖다 바치고 나오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일입니다. 겁먹지 마세요.”

“하지만 만약 들키기라도 하면…….”

“놈들에게 골수까지 다 빨아먹혀서 허무하게 죽는 것과 뭐라도 해 보고 죽는 것, 살고 싶다면 매 순간마다 선택을 하세요. 조금이라도 가능성 있는 쪽에 투자하고, 판돈이 없으면 목숨이라도 걸고. 그렇게 해야 비로소 ‘생존할 자격’이 주어지는 겁니다.”

길거리 시궁쥐 인생을 살다가 허무하게 죽을지, 아니면 자신들 손으로 이 지독한 현실을 바꿔 볼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해 볼 건지, 그들은 선택을 강요하는 내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결국 각오를 다졌다.

고작 폭탄 몇 개로 마피아 놈들을 끝장낼 수 있을 거라고는 당연히 기대하지 않는다. 그건 저들도 알고 우리도 아는 사실이다.

폭탄 배송은 그저 저들의 ‘각오’를 확인하는 작업에 불과하다.

생존하기 위해 투쟁하고, 투쟁하기 위해 무기를 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각오가 있어야 비로소 트럭 화물칸에 숨겨진 총으로 새로운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누구의 방식도 아닌, 오직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 * *

조형식과 동료들은 갑작스럽게 떠맡게 된 이 무시무시한 임무에 적잖은 부담감을 느꼈다.

평소라면 마피아들에게 시달리면서 주변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오늘도 위험한 폐허 구역으로 기어들어 갔을 텐데, 그 폐허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정체불명의 3인조가 대뜸 ‘뭐라도 해 봐야 한다’며 총과 폭탄을 안겨 주었다.

어차피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신세라면 좆같은 놈들에게 복수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틀린 말은 아니야.’

어차피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아마도 생존자 캠프 거리에 있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올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남부 지방의 겨울이 비교적 따뜻하다고 해도 최소한의 생존 물자도, 생활 인프라도 없이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해열제 하나 없어서 감기로 인한 고열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만 몇 명이던가.

피죽도 제대로 먹지 못해 캠프 안에 있으면 사람들의 배 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잠시도 끊이질 않는다.

그렇다고 당장 울산을 벗어나 타 지역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럴 여력이 없다.

어떤 지역은 상황이 좀 낫다더라, 어떤 지역에선 제대로 된 생존자 캠프나 수용 구역이 존재한다더라 같은 소문은 분명 국내 소식임에도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다.

다들 유서만 안 썼다 싶을 뿐이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이렇게라도 기회를 준 그 3인조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신들을 그렇게나 괴롭히던 마피아를 눈앞에서 대신 죽여 주기도 했으니 못 믿을 사람들은 아닐 터.

“조 반장, 긴장 풀어. 그 손님 말대로 우린 그냥 저놈들한테 이 배낭 안에 들어 있는 걸 갖다 바치기만 하면 돼. 막말로 그놈들이 우리한테서 통행세니 수수료니 막 뜯어갈 때 이것저것 살펴 가면서 뜯어 갔었나? 일단 보이는 건 다 가져갔었잖나.”

“그건 그렇지.”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지워 낸 김 씨도 두 사람의 대화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 하니 그는 지난주에 통행세를 냈음에도 반이나 덜 냈다며 본보기로 처형당할 뻔했다고 한다.

그 3인조는 분명 마피아를 처단할 능력이 있어 보였지만, 그럼에도 직접 나서지 않는 것은 분명 자신들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자, 다들 미리 얘기했던 대로만 행동하자고. 이상한 질문이 들어오면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그냥 모르쇠로 일관하기, 그리고 최대한 비굴하게 행동하면서 놈들의 비위 맞춰 주기, 이것만 숙지하고 있으면 별 탈 없을 거라고 했어.”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즉시 도망쳐 나오기로 모두가 합의한 내용이었다.

그 순간 자신들은 움직이는 표적 신세가 되겠지만, 마피아들도 폭탄을 떠안은 상태가 된다. 어느 쪽이 더 리스크가 큰지는 말할 것도 없다.

서로 마음을 다잡고 지하 주차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곧 드럼통 앞에서 불을 쬐고 있던 마피아들이 총을 뽑아 들며 으르렁거렸다.

“뭐야, 이 새끼들. 어디로 들어온 거야?”

“지금 출입구 지키고 있는 놈들 누구야? 오늘 단체로 줄 빠따 좀 갈겨 줘야겠구만.”

“아니, 잠깐. 이놈들 저기 강너머에 있는 스캐브 새끼들 아니야?”

“어? 맞네?”

혹시 다른 구역에서 경쟁자들이 몰래 침투했나 싶어 경계하던 그들은 조형식 일행을 알아보자마자 긴장을 풀었다.

조형식은 자신들을 겨누고 있던 총구가 너무나도 쉽게 내려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헛웃음을 토해 냈다. 자신들은 이미 마피아 놈들에게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새끼들, 뭐 이리 바리바리 싸 들고 왔어? 어이, 등 뒤에 메고 있는 그것들은 뭐야?”

“아, 이건…… 그러니까…… 밀린 통행세랑 수수료를 내려고 폐허를 이 잡듯이 뒤져서 가져온 물자들입니다.”

“그…… 마르냑이라는 분이 지난주보다 통행세가 2배는 더 올랐다고 하셔서 말입니다.”

마르냑은 김 씨를 본보기로 처형하자고 주장했다가 동료와 함께 머리통이 날아간 마피아 조직원의 이름이었다.

“마르냑? 마르냑이 누구냐?”

“몬로랑 같이 다니는 통행세 수금 담당 새꺄. 아랫것들 이름 좀 외워라.”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보스가 포항 남구쪽에 상납금을 더 내야 한다고 쪼라던데, 그게 이거였나?”

“새끼들, 그래도 눈치는 있네. 평소에는 먹고 죽을 것도 없어서 빈털털이 신세라고 질질 짜기나 하던 주제에.”

마피아 중 한 명이 대뜸 조형식의 배낭을 빼앗아가더니 내용물을 멋대로 살피기 시작했다.

미리 눈과 흙먼지를 잔뜩 묻혀 둔 덕분에 배낭에서 꺼낸 물자들은 하나같이 폐허에서 막 꺼내 온 것 같은 비주얼을 자랑했다.

물론 겉이 좀 더러운 것과는 별개로 내용물은 그들의 눈이 돌아갈 만큼 매력적이었다.

“불럇! 이 새끼들 대박인데? 어디서 이런 양주를 구해 온 거야?!”

“오, 여기 담배랑 씹을 거리도 있잖아!”

“보스한테 이거 보여 주면 좋아하겠는데? 오, 쉰라면~ 옛날에 농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이거 냄비에 5개씩 넣어서 끓여 먹은 적이 있었지.”

“이 정도면 오랜만에 뜨끈한 라면에 술 한잔 걸칠 수 있겠는데?”

“어허! 손 떼, 이 새끼들아. 이거 다 보스한테 먼저 보여 줘야 우리도 뽀찌 좀 달라고 하지. 다들 보스 성격 알지? 누가 자기 물건 건드리면 시베리아 불곰처럼 미쳐 날뛰는 거.”

배낭 안에 들어 있는 물자들이 제법 괜찮은 것을 확인한 그들은 다른 이들이 메고 있던 배낭도 전부 수거했다. 평소라면 갑자기 욕을 퍼붓거나 손찌검부터 했을 그들이 이번에는 조형식 일행을 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맹추위가 도시 전역을 휩쓸고 있는 이 혹독한 날씨에 폐허를 열심히 뒤져서 귀한 물자들을 구해 왔다고 하니 내심 기특하게 보는 눈치였다.

“좋아, 이 정도면 이번 달 할당량은 채우고도 남겠어. 너흰 따라와라. 보스한테 폐허의 어떤 구역에서 이것들을 구했는지 설명해야 하니까.”

그냥 물자와 폭탄이 들어 있는 배낭만 건네주고 돌아 나오면 될 거라고 생각했건만, 갑자기 따라 들어오라고 하니 조형식 일행 내부에선 긴장감이 확 치솟았다.

그렇다고 지금 갑자기 도망친다면 수상한 낌새를 느낀 저들이 폭탄이 들어 있는 배낭을 보스에게 가져가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조형식 일행이 이 사기극의 칠부능선을 직접 넘어야 했다.

조형식 일행은 잔뜩 굳은 상태로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마피아들의 뒤를 따라갔다.

후줄근하고 허름한 생존자 캠프 거리와는 다르게, 건물 내부 구조부터 차이가 확 느껴지는 이곳은 과연 마피아들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

넓은 가구 매장을 통째로 개조해서 저들만의 안락한 쉼터로 만든 데다, 근방에서 악착같이 긁어모은 대량의 물자들을 여봐란듯이 쌓아 두고 외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과 거래하는 창고형 매장도 운영하고 있었다.

창고형 매장 안쪽까지 들어가게 된 조형식 일행은 저들끼리 모여 낄낄대고 있는 마피아 무리와 가까워질수록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갗을 에는 듯한 추위에 시달리고 있었건만, 지금은 마치 사우나를 한 시간 넘게 즐긴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저 낄낄대는 무리 중에 낯익은 러시아인이 보인다.

우락부락한 체형과 부리부리한 눈매, 솥뚜껑만 한 손과 단 한 방에 사람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리는 반자동 샷건까지.

특히 저 샷건에 재미 삼아 처형된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봐 왔다.

“보스, 이놈들이 지난주부터 바뀐 통행세랑 수수료의 미납분을 내겠다고 이 날씨에 폐허를 뒤져서 물자를 구해 왔다고 합니다.”

“미납분이 있었다?”

조형식 일행이 직접 물자를 구해 와 바친다는 사실보다 미납분이 있었다는 사실에 발끈한 마피아 보스가 샷건을 움켜쥐었다.

“에이, 보스. 이놈들 꼬라지 좀 보십쇼. 버러지 같은 목숨 조금이라도 부지해 보겠다고 폐허까지 기어 들어가서 물자를 구해 왔다는데 지금 처형하기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그래도 아직 쓸 만한 것 같으니까 좀 더 부려 먹어야지요.”

“저놈들이 다 죽으면 그다음은 너희가 직접 해야 할 일이라서 그런 건 아니냐?”

“저흰 보스가 하는 말이면 무조건 충성입죠. 그래도 이것 좀 보십쇼. 이만하면 살짝 아량을 베풀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한 마피아가 배낭에 들어 있는 물자들을 내보이자 그제야 보스도 표정을 조금 풀었다.

“좀 더럽긴 하지만 제법 괜찮은 것들을 모아 왔군. 한 명당 배낭 한 개분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면 센터까지 까 봅니까?”

“아서라, 저런 놈들 빤스까지 뒤집어서 뭐 하게?”

보스는 큭큭 웃으며 배낭 속에 들어 있던 술병 하나를 꺼내 들더니 유심히 그것을 살폈다.

그러고는 대뜸 샷건을 집어 들어 조형식을 겨눴다.

“이런 건 어디서 구했지? 겉은 좀 더러워 보여도 이렇게 상태 좋은 물건은 요 근방에선 구하기 힘들 텐데. 특히 폐허 같은 곳이라면 더더욱.”

총구가 자신을 향하는 느낌은 총구 앞에 서 본 사람만 알 수 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 불쾌하면서도 숨이 턱턱 막혀 오는 상황은 인간이 죽음이라는 골인 지점을 향해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초고속으로 쏘아져 나가는 느낌과 가장 흡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조형식은 이 느낌을 200% 살리기로 했다.

의심받고 있는 지금 괜히 이상한 변명을 늘어놓거나 어색하게 얼버무리면 저 총구로부터 터져 나올 산탄에 갈기갈기 찢겨 나갈 테니까.

그래서 필사적으로 방광을 조이고 있던 하반신의 힘을 완전히 풀어 버렸다.

마침 날씨도 춥겠다, 지금까지 배 속에 집어넣은 건 강물을 떠와서 끓인 식수뿐이겠다, 방광 안에는 이 사기극을 완성시키기 위한 마지막 연출 도구가 일발 장전 되어 있었다.

“저, 저희는 그냥…… 크흑! 죽기 싫으면 통행세와 수수료를 내라고 해서! 따흐흑! 이 날씨에도 폐허를 미친 듯이 뒤지고 다녀서 겨우 찾아낸 것들을 전부 가져온 건데…… 어허허허헝!”

눈물, 콧물, 그리고 나오면 안 되는 그것까지.

몸 안의 수분이라는 수분은 모두 뽑아낸 조형식은 남우 주연상을 받아도 될 만큼 꺼이꺼이 서럽게 울었다.

이것이 밑바닥 중의 밑바닥, 밟으면 꿈틀하지도 못하는 한낱 버러지가 감추고 있던 치명적인 한 방!

재미 삼아 사람을 처형하던 마피아 보스조차 자신의 총구 앞에 지레 겁먹고 이것저것 다 쏟아 내는 조형식의 처절한 울부짖음에 일말의 가식이나 거짓을 느끼지 못했다.

이놈은 진짜 억울하고 서러운 거구나.

이놈은 진짜 목숨 부지하겠다고 이런 날씨에도 폐허를 뒤져서 물자를 구해 왔구나.

이놈은 진짜 내 앞에서 한 치의 거짓도 말할 수 없는 겁쟁이 중의 겁쟁이구나!

“쯧, 이 버러지 같은 놈들 얼른 내 눈앞에서 치워 버려.”

“예! 어이, 뒤지기 싫으면 당장 꺼져라.”

그렇게 조형식 일행은 다 큰 어른의 방광을 희생한 끝에 마피아의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무사히 놈들의 본거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마피아 보스조차 질리게 만든 조형식의 똥꼬쇼, 아니 방광쇼는 여간 기합이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