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71)화 (172/227)

171화 수복기 (21)

아미 타이거 정예 육군이 지상을 지배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급작스럽게 멸망한 이유가 뭘까.

나는 크게 세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대한민국에서 인구 밀집도가 가장 높은 대도시 서울 한복판에서 좀비가 출현하고 그것을 제때 조치하지 않아 감염 폭발(팬데믹) 일어났다.

둘째, 대한민국의 주요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군부대 대부분이 한반도 국경선 사수와 치안 유지, 국토 재건 사업을 위해 한반도 북부에 몰려 있었다.

셋째, 서울에서 발생한 좀비 사태로 인해 대한민국이 반쯤 무너진 상태일 때, 하필 일본발 좀비 크루즈선이 부산항을 꼬라박으면서 시원하게 막타를 쳐 버렸다.

서울과 부산의 쌍지랄은 결국 수백만 피난민을 이끌고 남하하던 신해룡 육참총장이 대구에 자리잡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과거 6.25 전쟁 당시에도 증명된 부산 존버 전략이 초장부터 실패한 것이 스노볼이 되어 호남과 영남을 포함한 남부 지방은 사실상 버려지다시피 했는데, 울산도 그 불운한 피해 지역 중 하나였다.

“판자촌보다 상태가 더 심각해 보이는데.”

자신들을 스캐브(SCAV)라고 소개한 생존자들에게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작은 강줄기를 따라 형성된 생존자 캠프 거리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생존자 캠프가 아니라, 생존자 캠프 ‘거리’라는 점이다.

아마 강줄기 인근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자리 잡은 이유는 당연히 식수를 효율적으로 구하기 위해서일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이들이 한 장소에 몰려 있어야 무력 집단의 통제와 감시가 쉽기 때문일 것이다.

지구 온난화인지 이상 기후인지 날씨가 아주 맛탱이가 가 버리면서 진눈깨비가 그치기는커녕 해풍과 섞여 더 거세게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이런 혹독한 환경 속에서 민간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악착같이 생활하고 있는 모습은 인간적인 불쾌감을 유발했다.

난방도 들어오지 않고 그다지 위생적이지도 않을 것 같은 콘크리트 건물에 다들 짱박혀서 목재 가구나 책 따위를 태운 모닥불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광경은 너무 흔했다.

그들 사이에선 어떤 질병에 시달리거나 부상을 입어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도 있었고, 아니면 추위에 체온을 빼앗기는 과정에서 느끼는 황홀함 속에서 조용히 잠들듯이 죽어 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 중 절대다수는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 내고, 위험천만한 바깥을 도보로 이동해서 안전한 피난민 수용 지역(주로 대구)까지 갈 여력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노약자, 어린아이, 여자, 그리고 그들을 책임져야 하는 소수의 건장한 남자들.

나는 어째서 길잡이 역할을 맡긴 사람들이 스스로를 길거리 청소부(SCAV)라고 자칭하면서 시궁쥐처럼 위험한 폐허를 뒤지고 다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환경이라면 설령 좀비가 도시 내부로 아직 침투하지 않았다고 해도 자급자족 시스템은 절대로 성립할 수 없다. 자급자족도 최소한의 기반과 여력이 있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법이니까.

적당한 곳에 차를 댄 나는 길잡이 중 한 명인 조형식에게 대뜸 질문을 던졌다.

“다들 여기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겁니까?”

“솔직히 러시아 마피아 놈들이 도시 전역을 약탈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우린 그저 피난을 가는 게 남들보다 조금 더 늦었을 뿐인데…….”

사태 초기에 울산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시대가 바뀌었음을 인지한 범죄자 놈들이 서로 결탁해서 무리를 형성했을 것이고, 대량의 피난민이 발생하여 도시 내부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빠르게 공권력을 제압했을 것이다.

경찰들이 들고 다니는 리볼버 권총이나 심각한 상황이 되어서야 꺼내 쓸 수 있는 구닥다리 M16 소총에 비해, 밀수와 암시장으로 먹고 사는 놈들에겐 매우 강력한 불법 무기들이 있었을 테니까.

울산을 정리한 그놈들은 가장 먼저 도시 내의 물자를 수거해서 자신들이 독점했을 테고, 울산을 빠져나가는 것이 늦었던 사람들은 이렇게 반강제로 도시에 고립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셈.

‘피난민 중에 각성자 비율이 유독 높았던 대구가 이질적이었던 거야.’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수백 km를 남하하면서도 악착같이 싸웠고,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각성자들이 자연스럽게 늘어나면서 범죄자들이 활개 치는 것을 쉽게 막을 수 있었다.

반대로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각성자나 생존자 집단이 먼저 등장하기도 전에 범죄자들이 선수를 친 지역들은 이렇게 뒤틀리고 마는 것이다.

창원이 그랬고, 밀양이 그랬고, 울산이 그랬듯이.

그나마 김해는 나 이승권이 싹수 노란 노랭이들을 철저하게 조졌기 때문에 멀쩡했던 것이지만,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건 좀 아깝지 않습니까? 아직 숨 쉴 시간이 남아 있는 틈에 뭐라도 해 봐야죠.”

“하지만 생존자 캠프 거리에 있는 사람들 중 절대다수는 약자들입니다. 우리처럼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남성들의 수가 너무 적어요.”

“누가 약자들에게 강자처럼 싸우라고 했습니까. 약자면 약자답게 싸워야죠.”

호랑이(각성자 세력) 없는 울산에서 여우(마피아)가 왕 노릇하고 있으니, 놈들이 약자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지 대충 짐작이 간다.

잘 쳐줘도 노예나 노리개 취급일 터.

통행세나 수수료를 걷는 이유도 그냥 자기들 편하자고 그러는 것이다.

그 마피아들조차 포항 남구에 위치한 어떤 세력에게 상납금을 내야 한다고 했었으니, 그런 귀찮은 일을 자신들이 직접 하게 되기 전까지 최대한 약자들을 부려 먹으려는 심산이다.

즉 이들이 죽든 말든 정말로 마피아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생존자 캠프 거리의 사람들이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거고.

“밑바닥보다 더한 밑바닥 취급을 받고 있다면 그만큼 놈들을 속이는 것도 쉽습니다. ‘설마 우리한테 철저하게 짓밟히고 있는 밑바닥 버러지들이 우리에게 대들겠어, 우릴 속이겠어?’ 하고 생각할 테니까요.”

“우리가 파리 목숨에 불과하니까, 반대로 우리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더라도 놈들이 곧이곧대로 믿어 줄 거라는 의미입니까?”

“그렇죠. 놈들 입장에선 만약 속으면 즉시 응징해 주면 된다는 기저가 깔려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신이 있는 겁니다. 속지 않을 자신이, 설령 속더라도 철저하게 응징해서 두 번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게 할 자신이.”

압도적인 강자가 약자를 상대로 가질 수 있는 이 자신감은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한다.

누구도 자신에게 대적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폭정을 휘두르던 절대 권력의 지배자들이 예상치 못한 암살에 갑자기 뒈지는 것과 같다.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약자들이 작정하면 어떤 짓을 벌일 수 있는지 그들은 모른다.

나는 조형식에게 생존자 캠프 거리에서 스캐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불러 모으게 했다.

그들 대부분은 3~40대의 남성들이었으며, 이런 시대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사회생활에 찌들어 인생을 한탄하고 있었을 평범한 샐러리맨들이었다.

나는 추레한 몰골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각자의 배낭을 꺼내게 한 뒤, 거점 창고와 인벤토리에서 적당히 고른 물자들을 한가득 나눠 주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물자들이 쏟아져 나와 자신들의 배낭을 채우자 그들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나와 배낭을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하고 있을 만큼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주변에서 적당히 흙먼지와 눈을 조금 쓸어 모아서 그들의 배낭 속에 털어 넣었다.

깨끗했던 물자들이 순식간에 더러워졌지만 모두 잘 포장되어 있었기에 내용물까지 더러워지진 않았고, 그냥 더러운 폐허 속에서 막 꺼낸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여기서 끝이면 좋겠지만, 나는 남들이 크게 관심가지지 않을 휴지곽을 하나 더 꺼내서 C4를 휴지 대신 넣었다. 그렇게 여러 물자의 형태로 위장한 폭약들이 차곡차곡 그들의 배낭 속에 쌓인 끝에 준비가 끝났다.

마피아 놈들이 가장 눈독 들일 만한 물자는 당연히 술과 담배다. 그다음으로는 통조림과 식수다.

그래서 나는 마피아들이 눈 돌아갈 만한 물자들 사이에 비교적 하찮아 보이는 위장 물자(폭약)를 적당히 끼워 넣었다.

절대로 마피아에게 대들 리 없는 하찮은 인간과, 그런 인간들이 스스로 바치기 위해 가져온 고급 물자들 사이에 섞인 하찮은 물자. 이런 이중 위장을 통해 나는 멋들어진 사기극 하나를 만들어 보고자 한다.

감독-이승권

각본-이승권

연출-이승권

원작-이승권

“자 이제 무기는 화물칸에 천으로 덮어서 숨겨 두시고, 다들 탑승.”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스캐브들은 이게 무슨 상황이냐며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다, 결국 마피아 전용 트럭에 탑승했다.

지금껏 차량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동석과 진가희는 ‘그냥 우리들이 각성자의 힘으로 다 조져 버리면 되지 않냐’는 의견을 피력해 왔지만, 그건 내가 거절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당연히 놈들을 조지는 건 손쉬우나, 그래서는 지금까지 밑바닥 가스라이팅을 당해 온 저 사람들이 갑자기 슬기로운 좀비 아포칼립스 생활을 제대로 이어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내가 거점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보호한 사람들 대부분은 반드시 스스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깔고 들어갔는데, 주로 생존을 위한 협력과 투쟁이었다.

하지만 지금 저들에겐 가장 중요한 ‘생존을 위한 투쟁심’이 결여되어 있으니, 물고기를 대신 잡아 주더라도 물고기 잡는 법만큼은 확실하게 가르쳐야 한다.

안 그러면 우리가 마피아를 처리한 뒤에 또 다른 범죄자가 울산에 자리 잡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고, 어쩌면 범죄자가 아니라 좀비들에게 완전히 함락당할 수도 있다.

“하긴, 이런 시대는 결국 당사자들의 의지가 중요하긴 합니다.”

“예, 본인의 의지가 없으면 밥을 떠서 먹여 줘도 결국 굶어 죽는 법이죠. 당장 우리 목표가 울산이 아니다 싶을 뿐이지, 경상도 전체를 안정화시키는 게 목표인 이상 이런 작업도 필요해요.”

“이것도 어떤 의미에선 대민 지원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대민 지원이 뭔데 아재.”

“미필은 몰라도 돼.”

“아, 꼬우면 입대시키든가!”

“어휴, 대체 어떤 군부대가 널 감당하겠냐, 이 지지배야.”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나는 조형식으로부터 안내받은 마피아의 본거지로 당당하게 차량을 몰았다. 어차피 진눈깨비 때문에 외부에선 차량 내부가 안 보이니까 거리낄 것 없었다.

L마트 삼거리에 접어들자, 과연 부유함으로는 다른 대도시 못지않은 울산의 간판과도 같은 대형 백화점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이 주변에는 전쟁통에 새롭게 건물을 올렸는지 연식이 5년도 안 될 것 같은 신축 건물들이 상당히 많이 보였다. 당연하게도 그중에서 가장 크고 세련된 건물이 마피아 놈들의 본거지로 쓰이고 있었다.

본거지의 입구를 발견한 나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면서 입구 근처에 마피아가 몇 명이나 있는지 확인했다.

레벨이 높은 각성자는 상대가 각성자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다. 놈들 중에 각성자는 없었다. 놈들은 사태 초기에 도시 밖을 돌아다니는 좀비들은 손도 대지 않았던 모양이다.

‘도시 안에 쏴 죽이고 억압해야 할 인간들이 많아서 바빴을 텐데 좀비 사냥이나 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

그게 놈들의 목을 조르는 결과로 다가오겠지만,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리.

“정쥐! 정쥐!”

다소 어눌한 한국어로 정지를 외치는 한 러시아인. 아니, 따지고 보면 마피아들은 서로 같은 러시아인일 텐데 왜 굳이 한국어를 쓰나 싶다. 한국에서 외노자 생활을 너무 오래 한 탓에 혓바닥까지 김치로 물든 것인가?

초병 셋이 차량 뒤에 타고 있는 스캐브들을 보고 우르르 몰려와서 차창을 두들기길래 나는 즉시 차창을 내렸다.

어디서 이런 황금 고블린들을 잡아 온 거냐고 물어보려는 놈들에게 내가 선물해 준 것은 납탄이었다.

팡! 팡! 팡!

소음기를 부착한 권총이 조금 덜 시끄러운 총성을 터뜨리면서 아기 러시아 삼 형제를 끝장내 버리고, 우리는 다시 진눈깨비와 바람이 시끄럽게 휘몰아치는 회색 지대를 통과했다.

짜장면과 사람은 무조건 10분 안에 배달시켜야 한다는 게 내 신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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