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수복기 (20)
2개월 전의 인간은 살아감에 있어서 딱히 목숨을 걸 필요는 없었다.
배가 고프면 배달 음식을 시킬 수 있었고,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아갈 수 있었으며, 날이 춥든 덥든 발전된 인프라를 큰 부담 없이 사용하며 쾌적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지고 인육을 탐하는 괴물들이 세상을 뒤덮자 ‘당연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배달 음식 같은 건 기대할 수도 없고, 배가 고프면 버려진 폐허나 핏자국이 번들거리는 누군가의 소지품을 뒤져서라도 먹을 것을 직접 찾아야 한다.
몸이 아프면 찾아갈 수 있는 병원이나 약국은 고사하고, 전문적인 의학 지식과 수술 능력을 보유한 의사를 찾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것만큼이나 힘들어졌다.
평상시였다면 콧물을 훌쩍이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감기가 이제는 목숨을 앗아 갈지도 모르는 엄청난 질병으로 둔갑했다.
전에 비해 삶의 질이 굉장히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자들은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이 지옥 같은 환경에서 조금씩 적응해 나갔다.
음식을 찾지 못해 쫄쫄 굶는 날이 있어도, 혹독한 겨울의 추위에 감기 몸살에 걸려 기침을 달고 살아도, 인육을 탐하는 끔찍한 괴물들을 피해 죽어라 달아나더라도 진짜 죽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생존자들을 정말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혹독하게 변한 주변 환경도, 인육을 탐하는 괴물도 아니었다. 그런 요소들은 어떻게든 회피하거나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크게 일조한 것은 다름 아닌 같은 인간을 사냥하거나 약탈하는 범죄자들이었다.
“워넌, 쑤까!(찾았다, 씨발놈아!)”
타앙! 타타타!
예전부터 부산과 울산, 포항 인근에 자리 잡고 있던 러시아 외국인 노동자 혹은 마피아 집단이 새로운 시대의 한 축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주로 동해 해안 도시에 자리 잡아 밀수 범죄를 저지르던 놈들이 사태가 터지자마자 동류를 긁어모으고, 그들에게 불법 무기를 쥐여 주고서 특정 지역을 통제하려 드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국내에선 쉽게 볼 수 없었던 동구권 무기인 AK 소총이나 PP 계열의 기관단총을 들고 돌아다니는 러시아 마피아 집단은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지옥 그 자체였다.
“그, 그만해! 통행세라면 지난 주에 냈잖아!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우리 바부쉬카(할머니)도 아직 치매가 안 오셨는데 이놈은 벌써부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군. 마르냑! 우리가 이놈에게 통행세를 받았었나?!”
“받았지! 절반만!”
“들었지? 네가 낸 건 절반이었다. 겁대가리 없이 절반을 뚝 떼어먹고 쥐새끼처럼 우리 구역을 몰래 돌아다니고 있었으니 뒈져야지.”
“절반? 절반이라고?! 분명 너희가 말한 대로 냈었잖아! 그것도 저 버려진 구역에서 필사적으로 구해 온 물자였다고!”
“아무래도 네놈은 자본주의에 대해 눈곱만큼도 모르는 것 같군.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핏줄을 물려받은 나도 ‘시장 변동에 따른 물가 상승’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고. 대학은 나온 거냐?”
딱 봐도 고등학교 의무 교육조차 수료하지 못했을 법한 러시아 마피아 조직원에게 대학 나왔냐는 말을 들으니 남자는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수중에 가진 거라곤 비상식량과 물 한 병이 고작인데, 이걸 곱게 내준다고 해도 저 서늘한 총구가 자신을 겨누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렇다고 정말 가진 걸 다 내놓자니 당장 굶어 죽을 판이다.
“지, 지금은 가진 게 얼마 없어서… 하지만! 폐허 구역으로 들여보내 주기만 하면 최대한 쓸 만한 걸 많이 모아서 갖다 줄게! 8할! 아니! 9할까지 낼 수 있어!”
지금 이 시대는 총구에서 나오는 힘이야말로 곧 법인 시대다.
운 나쁘게 좀비들에게 에워싸여 산 채로 뜯어 먹히는 것도 끔찍하지만, 생존자 구역 내에서 인간 사냥꾼들에게 밤낮으로 쫓기며 재수 없이 납탄이 박히고, 사로잡혀서 고문당하는 것도 끔찍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니 아무리 추하고 비루해지더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야 내일 해를 볼 수 있다.
“흐흐, 마르냑! 이놈이 제 빤스까지 벗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데 어떡할까? 아까운 총알을 몇 발이나 낭비시킨 게 좀 괘씸한데…….”
“요즘 보스가 스캐브들의 기강을 잡아 놓으라고 하셨다! 말 안 듣는 놈들은 본보기로 처형해서 교각 앞에 걸어 둬야 한다!”
“들었지? 미안하지만 눈치 없었던 지난 주의 널 탓하라고.”
“아, 안 돼!”
“돼!”
타앙!
총성이 울려 퍼지고, 남자는 깜짝 놀란 나머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납탄이 자신의 두개골을 헤집으며 이 비루한 인생을 끝낼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눈앞에서 건들거리며 총을 겨누고 있던 러시아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에게서 터져 나온 뜨거운 핏물과 뇌수가 남자를 덮쳤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공장이나 논밭에서 일하고 있었을 러시아 외노자가, 시대가 바뀌자마자 총을 들고 다니며 자신 같은 사람들을 핍박하던 마피아 조직원이, 한순간에 공포의 상징에서 길바닥의 고깃덩어리로 전락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꿈뻑꿈뻑 뜬 남자는 저 멀리 있던 또 다른 마피아 조직원이 무어라 외치는 것을 들었다.
“불럇! 자사다!(씨발! 기습이다!)”
타타타타타타!
진눈깨비가 휘몰아치는 탓에 수 미터 앞을 제대로 보기 힘든 마당에 마르냑은 아무렇게나 총을 갈겨 댔다.
하지만 또 다른 총성과 함께 그가 썩은 고목처럼 쓰러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총성이 멎고, 차가운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온 뜨거운 혈향과 화약 내가 남자의 코를 장난스럽게 찔러 댔다.
‘도망쳐야 하나?’
인근 지역의 패자인 러시아 마피아를 겁 없이 건드린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여기 있다가 다른 놈들에게 걸려 봐야 좋을 게 없었다.
특히 제 조직원들을 가족처럼 아끼는 마피아는 형제를 죽인 암살자 혹은 조직 내 배신자를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죽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눈앞에 떨어진 주인 없는 소총을 주울 생각도 못하고 헐레벌떡 일어나려는 그의 뒤로 때마침 다가오는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보인다.
“이런 씨…….”
총성을 듣고 몰려온 또 다른 마피아의 차량이다. 처음부터 꽤 가까운 거리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실제로 저 차량에 탑승한 놈들은 자신들 같은 생존자들을 폐허 구역에 맨몸으로 풀어 놓고 도망치게 한 다음 총성으로 좀비를 끌어들여 일부러 쫓기게 하는 걸 몇 번인가 본 적 있다.
인간의 원초적인 재미와 쾌락만을 추구하는 미친놈들에게 걸리면 납탄이 박히는 게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방향을 전환한 그때, 누군가가 겨울 바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먹잇감을 사냥하기 위해 높은 하늘에서 맹렬하게 강습하는 맹금류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그것을 따라간 끝에 보인 것은 차량에서 막 뛰어내린 마피아 조직원들의 팔다리가 순두부처럼 매끄럽게 썰려 나가는 광경이었다.
“김 씨! 거기 있는 거 김 씨 아닌가?!”
“……?!”
눈앞에선 사람이 너무나도 손쉽게 해체되고 있고, 등 뒤에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니.
자신이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싶으면서도 서서히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익숙한 얼굴의 동업자들이 보였다. 그처럼 통행세를 내고 폐허 구역으로 들어가서 괴물들을 피해 쓸 만한 물자를 주워 오는 길거리 청소부들(SCAV)이었다.
설마 그들이 마피아를 건드린 건가 싶어 사색이 된 찰나, 그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총을 들고 있는 이름 모를 한국인들이었다.
“어이구, 김 씨! 아주 피 칠갑을 했구만! 설마 총에 맞은 건 아니지?!”
“아, 아니. 이건 내 피가 아니라…….”
“안 맞았으면 다행이고. 아, 이분들이 도와주신 거니까 고맙다는 인사는 우리 말고 이분들한테 해.”
하루하루 폐허나 남의 여행 가방을 뒤지며 연명하는 자신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무언가가 느껴지는 남성 두 명 그리고 태연하게 사람을 썰어 버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돌아온 여자 한 명이 동업자가 말하는 ‘이분들’이었다.
단순히 약탈자나 인간 사냥꾼처럼 질 낮은 범죄자라고 하기에는 아예 급이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살인에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딱히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며, 그렇다고 살인이나 폭력을 통해 쾌락을 느끼는 정신병자 같은 부류도 아니었다.
특히 일행의 중심에 서 있는 젊은 청년은 탁하게 죽은 눈을 하고서도 굉장히 날카롭다는 인상을 주었다. 오죽하면 그가 내뿜는 분위기만으로도 손이 베일 것 같았다.
‘사람 좀 죽여 봤다는 마피아 놈들 중에서도 저런 분위기를 풍기는 놈들은 몇 없었는데…….’
딱히 눈에 보이지도, 냄새가 나지도 않지만 전신에 피 칠갑을 하고 있는 도살자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도살한 상대가 짐승인지 인간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으리라.
“구,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가능하면 빨리 여기를 벗어나는 게 좋을 겁니다. 포항 남구와 울산 일대는 러시아 마피아 놈들의 세력권이라 까딱 잘못하면 놈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딱히 대단하지도 않은 놈들인데요. 고작 이런 수준이라면 그냥 몇 놈씩 기습해서 죽이고 무기를 빼앗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당장 저 폐허 구역에만 들어가도 괴물들에게 쫓기다 죽는 사람들이 허다한데, 다른 지역으로 도망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집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놈들이 요구하는 대로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면서 호구처럼 살아오셨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야…….”
“그런 건 사는 게 아닙니다. 나는 그래도 아직 살아 있다고 착각하는 시체들의 주마등이죠.”
청년은 미간이 깔끔하게 관통되어 즉사한 마피아 조직원의 시체 옆에서 총을 주워 들더니,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대부분 군필 아닙니까? 총도 있겠다, 그간 당한 것도 있겠다, 갑자기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막 샘솟지 않나요?”
“아니, 그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은데, 나 같으면 그냥 좆같은 놈들 엉덩이에 하트 모양으로 총알 박아 주고 죽을 겁니다.”
혹시 알아요? 운 좋으면 이겨서 잘 먹고 잘살 수 있을지도.
그렇게 말한 청년은 그를 지나쳐 토막 난 시체들이 주위에 널브러진 차량에 탑승했다.
“총도 있고, 싸울 사람도 있고, 이동 수단도 생겼네. 그럼 이제 공격대만 꾸리면 안성맞춤 아닙니까?”
이름 모를 청년이 차량 안에서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I WANT YOU’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느끼고, 홀린 듯 차량의 화물칸에 탑승했다.
그의 모습에 감명이라도 받은 것일까, 눈발 속에 잠자코 서 있던 그의 동업자들도 시체에서 건진 권총이나 소총 따위를 들고 ‘너만 오면 고’ 차량에 탑승했다.
이윽고 모든 인원이 탑승하자 운전대를 잡은 청년은 대뜸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거, 북진하기 딱 좋은 날씨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