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69)화 (170/227)

169화 수복기 (19)

우리가 창원에서 일을 끝마치고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될 때까지 소요된 시간은 대략 일주일이었다.

창원 내부에 쌓인 문제를 처리하랴, 거제도에서 창원으로 넘어오기 시작한 국군과 미군의 임시 거처를 정해 주고 그들에게 지역 내에서 준수해야 할 규칙 등을 알려 주랴, 꽤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심지어 군인들만 거제도에서 넘어온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군함 내에서 보호하고 있던 수천 명의 민간인들도 함께 창원으로 넘어왔는데, 그 문제까지 처리하느라 애 좀 먹었다.

알다시피 우리 세력 내에 행정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는지라, 결국 피난민 신세가 되기 전에 공무원 일을 했었던 사람들을 선발해서 임시 행정 센터부터 확보해야 했다.

다행히 행정의 실질적인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이 있었기에 그 부분은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었지만, 은근슬쩍 행정의 범위를 넓히려는 그를 견제하기 위해 불필요한 시간을 잡아먹었다.

어쨌든 급한 업무는 빠르게 처리하고 해당 지역의 업무를 거점 방위자 및 거점 일원들에게 적절히 분배한 끝에 다시 내가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기껏 김해에서의 일이 끝났는데 창원에서 또 일을 해야 하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김진경과 채성아의 서늘한 눈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꼭 복수하겠다는 듯한 느낌이었지.

자기들은 지루한 도시 내부 업무 따위에 관심이 없다며 외부 원정에 곧바로 따라나선 한동석과 진가희도 내심 뒤가 두려운 듯했다. 그러니 이 진눈깨비가 휘몰아치는 최악의 날씨에도 일부러 텐션을 높이는 거다.

“그나저나 ATX를 김해 밖까지 동원할 수 없었다는 게 조금 뼈아픈 것 같습니다. 당연히 평소처럼 ATX를 타고 울산부터 포항까지 치고 들어가서 다 박살 내는 사이다 전개를 기대했었습니다만.”

“어쩔 수 없죠. 지금 제가 보유하고 있는 ATX는 하루가 멀다 하고 대구, 밀양, 김해, 창원을 오가고 있으니까요.”

알고 보니 추가적인 기차역을 확보한다고 해서 무작정 ATX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더라.

김해 공항을 접수했을 때 항공기나 전투기가 생성되지 않았던 것처럼, 아마 내가 특정 조건을 만족하기 전까지 시스템이 내 스킬에 제약을 뒀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시스템이 제약을 건 게 아니라 그냥 단순히 스킬의 ‘한계’일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건 지금 내가 보유한 ATX들은 전부 물자 수송, 피난민 수송, 지역 방위에 쓰이느라 도저히 타 지역으로 빼낼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어제 양산 인근까지 ATX를 타고 올라가다가, 그곳에서 내려 도보로 울산까지 이동하게 된 것이다.

그냥 무작정 ATX를 타고 울산과 포항을 거쳐서 동대구역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는데, 해당 지역의 철로가 멀쩡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밀양도 내가 거점을 확보하기 전까지 철로가 망가진 상태였는데, 좀비 사태에 크게 휘말린 울산 인근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고 본다.

김해는 커다란 낙동강 덕분에 부산에서 시작된 팬데믹이 막혀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울산까지 치솟은 감염의 불길은 순식간에 주변 지역을 집어삼켰을 것이다.

그 증거로 지금 우리가 산 중턱에서 바라보고 있는 울산은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분위기는 거의 구미와 맞먹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아주 유령 도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희미하지만 불빛도 보입니다.”

한동석의 말대로 지금 울산은 산소 호흡기를 달고 매 순간을 죽음과 다투며 힘겹게 버티고 있는 중환자 같은 도시였다.

‘부산에 정체되어 있던 좀비들도 시스템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는지, 김해로 건너올 수 없으니 슬슬 울산을 통해 북상하는 듯한 느낌이야.’

도시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고속도로에선 방한 용구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수십, 수백 단위의 인형이 진눈깨비를 정면으로 맞으며 무리 지어 움직이는 광경을 포착할 수 있었다.

대구가 지속적으로 좀비들의 습격을 받았던 것처럼, 울산의 숨통을 완전히 끊기 위해 지치지 않는 군대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울산보다 더 위쪽 지역이 목적일지도 모른다.

저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올 겨울을 넘길 수 있는 생존자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적을 것이다.

“사장 오빠, 저 좀비들부터 처리해요? 아니면 일단 도시로 들어가서 내부 상황부터 살펴요?”

진가희가 작은 얼굴을 반절이나 가리는 두툼한 머플러 사이로 속삭이듯 말을 걸어왔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허허벌판에서 칼을 휘두르는 검객 같은 것에 로망이 있는 건가?

“어차피 저 좀비들 말고도 더 많은 좀비들이 꾸준히 울산으로 유입될 거예요. 울산이 저런 상태라면 우리가 하루 종일 도시 외곽에서 좀비들만 때려잡아도 결국 울산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일걸요.”

말기 암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연명 치료는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해 주는 것뿐이다. 울산이 딱 그런 상황이니 무리해서 살리는 것보단 과감하게 존엄사시켜 주는 게 낫다.

우리는 음울한 추위와 기세등등한 죽음이 감도는 울산으로 진입했다. 어차피 쌓이지도 않을 거면서 쓸데없이 시계만 방해하는 진눈깨비는 여전히 그칠 기색이 없었다.

“창원은 그 정신 나간 놈들이 그래도 도시를 관리하고 있어서 비교적 멀쩡했었는데, 여긴 도시를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의 무력을 갖춘 세력이 아예 없는 모양입니다.”

“무력을 갖출 만한 환경이 아니니까요.”

번화한 도심과는 아직 거리가 제법 있음에도 주변 풍경은 난잡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만큼 혼돈 그 자체였다.

마구 깨져 나간 보도블록은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으며, 급히 떠나려다 저들끼리 처박은 차량들이 도로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또 지면이나 건물 벽 곳곳에 눌어붙은 핏자국이 스산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건 덤이었다.

한밤중에 방문하면 정말 귀신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두려운 폐허였다.

“피난민을 유도하는 경찰이나 군대의 통제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한동석이 길거리 한편에 아무렇게나 정차되어 있는 경찰차를 보고 중얼거렸다.

아마 소수의 경찰들로는 부산에서 터진 그 무시무시한 사태와 그로 인해 발생한 엄청난 수의 피난민을 통제할 방법이 전무했던 것이리라.

목숨이 위태로운 시기에 남녀노소 따윈 중요하지 않으니 다들 필사적으로 짐을 챙겨서 달아났을 터. 길이 막히면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뛰고 또 뛰다가, 배후를 덮치는 좀비 떼에게 붙잡혔을 가능성이 높다.

차량에서부터 길게 이어진 핏자국이라든가, 닫혀 있던 차량 문을 열기 위해 필사적으로 벅벅 긁다 떨어져 나간 손톱 조각들 따위가 당시 처절했던 상황을 대변하는 듯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감염되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밀양에서 일어난 피난민 학살 사건은 전적으로 인재(人災)였고, 얼마 전에 대구 군부를 책임지고 있는 신해룡 육참총장이 직접 책임자들을 붙잡아서 심문한 뒤 처벌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발생한 죽음의 향연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악의를 품은 환경이 만들어 낸 것. 어떤 의미에선 전쟁의 참사만큼이나 끔찍했다.

“1년 전에 정부에서 발표한 통일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인구가 약 8천만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 꼴을 보니 지금은 반의반도 안 남았을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부산에서 터진 팬데믹도 결코 영향이 적지는 않았지만, 대한민국을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한 것은 역시 서울에서 발생한 초대형 감염 폭발이라고 본다.

서울 인구만 공식적으로 천만이 넘고, 실제로는 매일같이 서울에 출퇴근하거나 볼일이 있어 방문하는 유동 인구까지 더하면 그 이상이다.

그들 중 상당수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좀비가 되어 순식간에 주변 지역을 덮쳤으니, 극히 짧은 시간 만에 전체 인구의 절반이 증발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솔직히 이젠 저 바깥에 도사리는 것이 우스갯소리로 1천만 좀비 군단이 아니라, 정말로 그 이상일 거라고 확신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좀비들의 침공이 끊이질 않는 대구만 봐도 알 수 있다.

‘대구에서 유입된 인구가 김해를 채우기 시작하면서 슬슬 김해에도 좀비들의 침공 징후가 포착되고 있었지.’

비록 이렇게 망해 버린 도시라도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복구를 해야겠지만, 사람이 살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해서 다시 사람들을 밀어 넣는 것보다 인간이 멸종하는 게 더 빠르면 어쩌나 싶다.

내 스킬은 분명 대단하지만 만능은 아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선 끊임없이 사람이 죽고 좀비의 머릿수는 늘고 있을 것 아닌가.

‘세상이 그 병신 같은 중국발 바이러스 때문에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평양 찍고 만주 찍고 베이징까지 찍었어야 했는데.’

병신 같은 놈. 사태의 심각성도 모르고 전쟁 끝나자마자 노후 보내겠답시고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었다니. 넌 우리 이씨 가문에서 가장 못난 놈이야, 승권아.

잡스러운 생각을 하며 곧 눈발 아래에 파묻힐 참사에서 눈을 돌린 그때, 진가희가 조용히 내 소매를 잡아 끌었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저 멀리서 배낭을 짊어진 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형상이 보였다.

진눈깨비 때문에 저들은 아직 우리를 보지 못한 것 같지만, 각성자인 우리는 저들을 먼저 포착할 수 있었다.

“성별까지 구분할 수는 없지만 네 명이 일행인 것은 확실합니다. 앞서 나가는 두 명이 버려진 차량이나 캐리어(여행 가방)같은 것을 털고, 나머지 둘은 망을 봐 주는 역할이군요.”

눈썰미가 좋은 한동석이 내가 묻기도 전에 먼저 저들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다. 평소에는 진가희와 함께 정신 사나운 짓을 일삼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종종 도움이 된다.

“배낭이 큰데 무장 상태가 가벼운 것으로 보아 약탈자보다는 쓸 만한 것을 찾아다니는 일반 생존자들인 것 같습니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섣불리 접근하면 당연히 경계심을 유발하겠지만……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따졌습니까?”

울산에는 지금도 꾸준히 좀비가 유입되고 있고, 우린 서둘러 이 도시의 상황만 살핀 뒤 포항으로 향해야 한다. 이미 거의 다 죽어 가는 도시에는 볼일 없으니까.

“하긴 에베레스트 등반도 길잡이(셰르파)가 필요한데, 눈 내리는 울산이라고 뭐 다르겠어요?”

죽이거나 약탈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길잡이 부탁 정도는 양반이지. 요즘 같은 시국에 우리 이승권 사단처럼 신사적이고 예의 바른 인간들이 또 어디 있겠나.

얘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는 각성자의 우월한 신체 능력을 살려 순식간에 진눈깨비를 돌파해 저들 앞에 당도했다.

갑자기 휙 나타난 우리에게 깜짝 놀라서 소리치면 주변의 좀비가 꼬일 수도 있으니 나는 서둘러 바나나를 꺼내 눈앞의 남성을 겨눴다.

“괜히 소리 질러서 좀비를 불러들이면 두 번 다시 겨울철 바나나를 못 먹게 될 겁니다. 세상은 원래 깜짝 놀라는 일들의 연속이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세요.”

끄덕끄덕.

다행히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의 겨울철 바나나의 진가를 알아본 남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도 깜짝 놀란 눈치이기는 했지만 한동석이 가지고 있는 엽총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미덕이라는 걸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럼 이제 길바닥에 버려진 남의 여행 가방이나 뒤지는 건 그만두고, 갑작스럽지만 이거 받고 우리 길 안내를 좀 해 줬으면 합니다.”

성공적으로 길잡이 4명을 파티에 영입한 나는 미리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인벤토리에서 물자 팩을 몇 개 꺼내서 그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들 눈에는 내가 배낭에 손을 넣자마자 커다란 물자 팩이 딸려 나온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힘들게 파밍하러 나온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허탕 치고 돌아가면 억울할 테니까 이렇게라도 챙겨 주는 게 맞다.

나는 끝까지 침묵을 지킨 남성에게 덤으로 바나나까지 건네주고, 스마트폰 지도 어플을 열어서 우리의 대략적인 이동 경로를 설명해 주었다.

“가능하면 법조타운 삼거리를 지나 정원교를 거쳐서 울산 위쪽으로 향하고 싶은데, 어떻겠습니까?”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이런 지도 어플만 믿고 겁 없이 돌아다니는 거 보니 진짜 외지인이구만. 지금 울산 내부 꼬라지가 어떤지 알면 절대 이렇게 함부로 못 돌아다닐 거요.”

이제야 입을 연 남자는 바나나를 지금 까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면서도, 내 스마트폰의 지도 어플에 몇 개의 첨삭을 추가해 주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는 지금 완전히 망가지거나 그 괴물 새끼들로 득시글거려서 발도 못 들이니까 깔끔하게 포기하쇼. 그럼 남은 길은 학성교 하나뿐인데……. 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는 며칠은 감지 않았을 법한 머리를 벅벅 긁더니 갑자기 뒤돌아서 자신의 동료들에게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이번 주 통행료가 얼마였지?”

“식수 2L 기준 세 통, 아니면 종류 가리지 않고 통조림 5개.”

“염병할 새끼들, 많이도 올렸네.”

“거, 포항 남구에 있는 새끼들한테 상납해야 한다고 엄청 뜯어 가잖습니까. 다행히 이렇게 고마우신 분이 한몫 챙겨 줬으니 이번 주는 별문제 없겠다마는…….”

“다음 주는? 다음 달은? 내가 볼 때 그놈들은 우리가 여기서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써. 우리가 죽으면 또 다른 놈들한테 빚 지워서 들여보내고 통행료랑 수수료 뜯어 가겠지.”

저들끼리 흉흉한 얘기를 끝낸 남자는 다시 나와 마주했다.

“일단 울산 위쪽으로 올라갈 루트가 있기는 한데, 어떤 쓰레기 같은 놈들이 그곳을 점거하고 통행료를 받고 있으니 그냥 얌전히 통행료 내고 지나가겠다고 하면 안내해 드리지.”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가 나왔지만 이미 길잡이를 고용한 마당에 다시 풀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건 포X몬스터 같은 게 아니니까.

“통행료 내라고 하면 내야죠, 별수 있습니까? 그보다 급하니까 얼른 출발합시다.”

통행료를 받는 건 그놈들 마음이고, 통행료를 총알로 내는 건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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