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67)화 (168/227)

167화 수복기 (17)

“아! 북진하고 싶다!”

“큰 소리로 말하지 마, 등신아.”

용감무쌍한 북진 용사들의 소원은 오직 북진! 북극을 넘어서 남극에 도달하기까지 오직 북쪽으로만 향하는 묘한 귀소본능이 있었다.

“흘러 빠졌구나, 묵호 아쎄이. 네가 그러고도 용감무쌍한 북진 용사라고 할 수 있는가?”

“지랄 그만하고 대가리나 숙여.”

최묵호는 이기열의 역미간(뒤통수)을 잡아 짓눌렀다.

겨울철이 되면 하늘에서 새하얀 똥이 한 무더기나 쏟아져 내리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평창은 그들에게 영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으나, 그래도 이만한 자연 위장색이 또 없었는지라 추위 정도는 참아야 했다.

그들이 이 추운 날에 대관령의 북진성채(산장)를 나와 강릉시의 시내를 감시하고 있는 이유는 실로 단순했다.

첫째, 자신들과 피난민들이 더럽게 추운 겨울 산에서 버티려면 필연적으로 물자가 필요했다.

산에 널린 나무를 장작으로 이용해 불을 피우고, 눈과 얼음을 끓여 마시면 식수와 보온 문제는 당장 급하지 않다.

하지만 식료품과 의복, 의약품 같은 필수 생존 물자는 여전히 부족한 상황. 김호연도 슬슬 겨울 산에서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것이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고 말한 만큼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런 물자들은 필연적으로 사람이 사는 곳에서 구해야 하는데, 그들이 자리 잡은 북진성채 인근에서 구할 수 있는 물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살기 위해선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야 했다.

“우리는 산에서 얼어 죽어 가고 있는데 저놈들은 강릉에 눌러앉아서 잘 먹고 잘 사는구만.”

최묵호가 망원경을 들고서 강릉 시내를 살피며 씹어뱉듯이 중얼거렸다.

겨울철만 되면 엄청난 추위와 폭설이 인상적인 산골과는 달리 강릉은 바다가 코앞인 해안 도시인지라 겨울철에도 생각만큼 기온이 높지는 않았다.

게다가 강원도를 대표하는 대도시 중 하나인 만큼, 도시 내부에 축적된 물자는 특정 세력이 비상 시국을 충분히 넘길 수 있을 만큼 풍족했다.

강릉에 자리 잡은 예의 ‘특정 세력’이 군부나 정치 세력이었다면 그들도 이렇게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막말로 엄청난 수의 좀비들이 저 도시를 집어삼켰다고 해도 그들은 능히 도시 내부의 버려진 물자를 ‘긴빠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불운하게도 저 도시를 점거한 것은 정치 세력도, 군부도, 좀비도 아닌 극악무도한 범죄자 집단이었다.

“X같은 새끼들.”

망원경 너머로 보이는 시내의 광경은 매우 끔찍했다.

온갖 총화기로 무장한 범죄자 집단은 외부에서 유입된 피난민 혹은 타 지역에서 잡아 온 생존자들을 정기적으로 수송 트럭에 실어 강릉 종합 운동장으로 향했다.

놈들은 아직 노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튼튼한 남자들은 노동 노예로, 노리개로 사용할 수 있는 젊은 여자들은 성 노예로 분류해서 도시 곳곳에 공급한다.

그 외에 도움이 되지 않는 노약자나 거동이 불편한 환자 혹은 자신들에게 대적한 ‘건방진 반역도’들은 모조리 종합 운동장으로 밀어 넣었는데, 그곳에는 수많은 좀비 떼가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다음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 펼쳐진다.

거대한 종합 운동장 안에 가둬 둔 좀비 떼에게 불필요한 인간들을 먹이로 던져 주고, 그들을 감염시켜 좀비로 만든다.

적게는 수백, 많게는 수천이 넘는 좀비가 완성되면? 이제 각성자들이 각자의 무기나 총화기를 들고 들어가서 좀비들을 사냥한다. 다시 먹이를 감염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숙주만 남겨 둔 채 모조리 DNA 샘플과 경험치로 환원해 버리는 것이다.

최묵호는 이런 심각한 상황에도 옆에서 쩍쩍 하품이나 하고 있는 이기열의 머리통을 시원하게 갈겨 버리고 싶었다. 이전의 이기열은 누구보다 이런 만행에 분노하던 정의로운 인간이었으니까.

‘우리가 전장에서 썩어 가는 동안 세상이 너무 변했던 거겠지.’

무려 5년을 외부와 차단된 상태로 그저 누군가를 상처 입히거나 죽이는 것만을 반복해 왔다.

평화의 시대라 불리던 지난 1년까지만 해도 여러 사회적 문제가 끊임없이 뉴스 속보로 흘러나왔는데, 하물며 좀비 아포칼립스로 망해 버린 세상이라면 그보다 더한 문제가 나타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이상하지 않다고 해서 용납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 하품을 끝낸 이기열이 평소답지 않은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묵호 아쎄이, 군인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은 확실하게 분간해야 한다. 명예로운 개죽음보다는 구차한 생존이 더 나은 법이니까.”

“그래서 저 짓거리를 그냥 두고만 보자고? 언젠가는 우리가 맡고 있는 피난민들도 저런 꼴이 될 텐데?”

“암시장을 운영하며 불법 무기와 약물을 거래하는 범죄 조직이 그 찐빠스러운 빨갱이 스-껌과 거래 계약을 맺었다. 놈들은 더 많은 무기와 약물을 팔면서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나날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제아무리 용감무쌍한 북진 용사라고 해도 우리 셋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정신이 오락가락한 놈이 하는 말치곤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어서 최묵호는 괜히 열이 뻗쳤다.

이기열의 말마따나 저놈들이 가진 힘은 대단했다.

비록 범죄 집단이기는 하지만 놈들이 강릉을 장악하고 여러 무장 세력들과 거래 계약을 맺으면서 지역 내 입지가 상당히 높아졌다.

또한 각성자와 시스템에 대해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좀비를 사육, 사냥하며 자체적인 무력 증강과 물자 확보를 꾀하고 있는 점도 놈들의 세력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

지금 저들을 온전히 제압하려면 못해도 1개 보병 사단의 군대를 투입해야 할 것이다. 그마저도 전투에 각성자들이 개입한다면 결과가 불투명해지겠지만.

‘그래, 백 보 양보해서 지금은 우리만으로 어쩔 도리가 없으니 저놈들을 내버려 둔다 치자, 하지만 물자를 구하려면 결국 저곳에 숨어들어 가야 해. 아니면 이 겨울산에서 죽어야겠지.”

“굳이 도시 안으로 침투할 필요는 없다, 묵호 아쎄이. 우리는 양양과 동해시를 오가는 놈들의 수송 차량을 긴빠이하면 된다.”

“호연이가 정기적으로 정찰을 나가면서 놈들의 수송 부대와 정찰 부대의 대략적인 루트와 스케줄을 확보해 왔지만 중간에 건드리는 건 힘들겠다고 이미 말했었잖아. 너 이 새끼, 또 회의 시간에 졸았지?”

“나는 졸지 않았다, 묵호 아쎄이. 잠시 이 세상과 나와의 연결을 차단했을 뿐.”

“이 씹덕 새끼 진짜.”

어디를 때려야 잘 때렸다고 소문이 날까 속으로 고민하면서도 최묵호는 내심 그리운 옛 추억을 떠올렸다.

작전명: 긴빠이. 개또라이 이승권과 함께 주기적으로 미군의 야전 부대 숙영지에 침투해서 필요한 장구류와 보급 물자를 한가득 털었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행복했던 것 같다.

마치 크리스마스에 산타클로스를 두들겨 패고 그의 선물 보따리를 뒤져서 A급 선물만 골라낸 느낌이랄까. 그들의 긴빠이에는 낭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개또라이 이승권은 없다. 작전명: 긴빠이는 반드시 4인 1조로 움직여야 해.’

성공하지 못할 긴빠이라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마라. 개또라이 이승권이 남긴 이 희대의 명언은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새겨져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들려온 눈 밟는 소리에 최묵호가 고개를 돌리자 동계 위장을 한 김호연이 그들에게 다가온 참이었다.

“상황은 좀 어때?”

최묵호가 그리 묻자 김호연은 어깨에 묻은 눈을 툭툭 털어 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릉 인근에 멀쩡한 생존자 집단은 더 이상 없다. 사실상 우리가 마지막이라고 봐야겠지.”

“염병. 그래서 저새끼들이 더 먼 곳까지 나가서 인간 사냥을 하는 거였구만.”

놈들의 수송 부대와 정찰 부대를 중간에 건드리기 힘들겠다고 판단한 이유, 그건 놈들이 강릉 인근을 싹 털어 버리고 더 먼 곳까지 움직이느라 그만큼 철저하게 무장하고 경계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 사냥에 맛들린 저 또라이들이 강릉 인근에 자신들을 적대하는 또 다른 집단이 있다는 걸 눈치채게 된다.

그런 놈들이라면 아마 중간에 수송 부대 하나를 잃어버리자마자 수색 부대를 풀어 이 잡듯이 산을 뒤질 게 분명했다.

용감무쌍한 북진 용사 셋이면 눈 내리는 험한 산에서 절대로 붙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그들이 보호하고 있는 약 200명의 민간인들은 인간 사냥의 희생양이 될 터.

극히 짧은 시간 만에 선택의 폭이 훨씬 더 좁아졌다.

“지금이라도 남부 지방으로 쨀까?”

“민간인을 200명이나 데리고? 불가능해.”

가장 가까운 정선으로 내려간다고 해도 물자를 구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며, 이 혹독한 겨울을 뚫고 쭉 남하해서 그나마 사정이 낫다던 영주시로 도망치는 것도 힘들 것이다.

겨울 산은 인간의 체력과 온기를 굉장히 빠른 속도로 빼앗아 가니까. 베테랑 산악인들도 어지간하면 겨울 산은 방문하지 않는데, 하물며 제대로 훈련받지도, 준비되지도 않은 민간인 200명을 데리고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산을 오르내릴 필요 없이 도로만 쭉 따라간다고 해도 똑같은 문제에 직면하니, 충분한 물자를 확보하지 않는 한 겨울에 도보로 강원도를 가로지르는 건 미친 짓이었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이제 남은 건 진짜 다 같이 부둥켜 안고 체온 나누다가 얼어 죽는 것 말고는 없겠는데?”

최묵호가 신랄한 어조로 비아냥거렸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태클을 거는 사람도 없었다.

얼어 죽든가, 굶어 죽든가, 아니면 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세력을 부풀린 범죄 집단과 맞서 싸우다 죽든가.

어느 쪽을 선택해도 죽음이라는 미래밖에 보이지 않으니 슬슬 해소되지 않는 스트레스가 다시금 최묵호를 예민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스트레스가 한계치까지 쌓이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어 북한군을 반드시 도륙한 뒤에야 겨우 진정되었던 특유의 미친개 기질은 신경안정제로도 쉬이 억눌러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김호연은 최묵호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했다. 싸우지 않고,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선택지였다.

“우리 중 한 명이 포항으로 내려가서 강원도에 제3 세력을 끌어들이자.”

“도망치거나 맞서 싸우는 선택지가 아닌 건 알겠는데, 우리 중 누가 포항으로 내려간다고 해서 제3 세력을 강원도에 끌어들이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냐? 포항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처지인 것도 아니잖아.”

“최근 놈들이 강릉 인근에서 인간 사냥이 힘들어지니 점점 활동 범위를 넓혀 가고 있다고 말했었잖아. 저 인간 사냥 부대의 활동 범위가 경기도와 경북까지 이르고 있다면?”

“우리가 놈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길잡이 역할을 해 줄 수 있으니 그 대가로 제3 세력을 끌어올 수 있을 거다, 그런 의미냐?”

김호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최묵호는 영 내키지 않았다.

좀비 사태가 발발한 뒤 벌써 2개월이나 흘렀다.

이제 특정 지역마다 자리 잡은 여러 세력들이 존재하고, 각자의 이익을 위해 타 세력과의 분쟁도 마다하지 않는 싸움닭들이 넘쳐 나는 현대판 전국시대가 열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굳이 저 남부 지방의 인간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강원도까지 올라와서 또라이 같은 범죄 집단과 빨갱이, 광신도, 좀비까지 싹 처리해 줄까? 애초에 그럴 의리도 없거니와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세력이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대구에 자리 잡은 최대 규모의 생존자 집단이라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긴 하다. 그곳에는 각성자와 군인들이 넘쳐 나니까.

포항은 대구에 비해 규모가 좀 후달리지만 경북까지 치고 내려간 인간 사냥 부대의 위험성을 눈치챘을 가능성이 높다. 대구와 달리 포항은 외부 침투에 매우 취약한 구조의 해안 도시였으니까.

그들이 비록 인간 사냥 부대에게 피해를 입어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고 해도 강원도까지 원정을 올 가능성은 여전히 낮다.

다만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정말로 남은 선택지가 없다.

“묵호 네가 다녀와. 나는 기열이랑 같이 피난민들을 보호하고 있을 테니까.”

“나보다는 네가 다녀오는 게 낫지 않냐?”

“나 없는 동안 피난민들을 책임질 수 있겠어?”

최묵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간인들을 보호하고 먹여 살리는 건 둘째 치고, 그 혼자서 정신이 오락가락한 이기열까지 맡는 건 더더욱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까 네가 다녀와. 저 남부 지방에서 용병이든 정규군이든, 아니면 소수의 각성자든 전력이 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을 최대한 강원도로 끌고 올라와. 대구든 포항이든, 아니면 그보다 더 아래든, 이 잡듯이 뒤져서 최대한 빨리 돌아와.”

민간인이라는 짐덩이를 짊어지고서 이 혹독한 겨울을 버티기란 쉽지 않다. 그가 정확한 복귀 기한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최묵호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2주가 채 되지 않으리라.

“쯧, 퇴역했으니까 이제 행군은 안 해도 되겠구나 싶었는데.”

최묵호는 하는 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곳을 책임져야 하는 김호연은 자리를 비울 수 없고, 이기열은 단독으로 움직이기에 너무 불안정하다.

그가 인벤토리에서 필요한 장비를 꺼내 착용하고 산을 내려가려던 그때, 등 뒤에서 이기열이 그를 불러세웠다.

“묵호 아쎄이.”

“왜.”

“올 때 메로나.”

최묵호는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이용해 살인 충동을 이겨 냈다.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으니까.

전우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애틋한 마음은 여간 기합이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