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수복기 (16)
첫 번째 손님과의 얘기가 끝났으니 이제 두 번째 손님을 상대할 차례였다.
진상 기질이 다분해서 쳐 내는데 애 좀 먹었던 첫 번째 손님과 달리 두 번째 손님은 이미 자신들끼리 협상의 적정선을 정해 둔 것 같았다.
미군 측 인사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예의 해병대 장교가 신이 나서 나의 철없던 시절의 만행들을 까발릴 때 매우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었던 해군 중령이었다.
“우선 저는 잭 커닝햄 함장님을 대신하여 이 자리에 참석한 에빈 마커스 부함장입니다. 조금 전에 인사했었지요.”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 같은 눈빛이군. 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 셈인가? 야한 동영상처럼!
“한국군 측은 아무래도 정치적인 문제가 조금 얽힌 듯해서 상당히 복잡한 얘기를 하신 것 같지만, 우리는 이 나라의 정치와는 관계가 없으며 관여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이런 시국은 정치를 논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하니까요.”
같은 편을 은근히 돌려 까는 것 같은데, 그가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내심 이해가 된다.
자신들의 차례가 오기도 전에 박명식 함장이 내게 무리수를 던져 얘기를 복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회의가 그대로 파투 날 수도 있었기에 ‘너흰 배려심이라는 게 없나?’ 같은 느낌으로 꼽을 준 것이다.
괜히 찔린 박명식 함장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리자 에빈 부함장이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심플합니다. 생존 물자와 안전한 임시 거처.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창원 점거 성공에 대한 지분은 모두 물자와 임시 거처를 확보하는 데 사용할 것이며, 그 외의 어떠한 정치적 목적도, 사적인 군사 개입도 없을 것이라는 확답을 드릴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군대는 돈 먹는 하마다.
고작 1개 중대 규모의 군 부대만 해도 하루에 소모하는 식자재와 식수의 양이 만만찮은데, 하물며 군함에 태운 수많은 장병들과 피난민들이 소모하는 양은 얼마나 많겠나.
최소한의 생명 유지를 위해 피난민들에게 적은 양의 배급만 해 준다고 치자, 하지만 적과 맞서 싸우고 물자를 확보해야 하는 군인들은 현실적으로 배급을 줄이기가 어렵다.
그들이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하면 싸울 수 있는 인원은 점점 줄어들고, 작전의 성공 확률이나 변수에 대한 대응 능력도 현저히 떨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저들은 당장 군수 물자보다 생존 물자를 더 원하는 것이다. 군수 물자는 나중에 물물 거래를 하든, 정보 거래를 하든 느긋하게 확보하면 그만이지만 생존 물자는 당장 없으면 굶어 죽을 판 아닌가.
거기에 더해 안전한 임시 거처를 원하는 이유도 오랜 기간 동안 바다 위에서 불편한 생활을 해 온 사람들의 심신을 케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미국의 최신예 항공모함도 승조원들의 내부 생활을 보면 상당히 팍팍한 것으로 유명한데, 군함이라는 물건은 쾌적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함장과 극소수의 고위 장교를 제외하면 개인 침실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으며, 매 순간이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의 연속이라고 들었다.
육지에서 영내 생활을 하는 육군과 달리 바다 위에서 최소 몇 주 혹은 수개월 이상 작전해야 하는 해군이 겪어야 할 불편함과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터.
그것을 훈련도 받지 않은 피난민들과 함께 좁은 공간에서 북적이며 스트레스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단체로 정신병 걸리고도 남을 만한 사안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현재 전 세계의 육지에 위험한 바이러스와 괴물들이 판치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 날 천 날 배 위에서만 머무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최근에야 거제도라는 한국의 섬으로 옮겨 왔기에 숨통이 조금 트였으나, 여전히 생활 수준은 최악을 밑돌고 있습니다. 게다가 물자의 소모 속도가 상당한지라, 당장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군 장병과 피난민들의 수를 감안해 보면 자력으로 올 겨울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국이 이렇다는 변명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런 변명을 한다고 해서 없던 물자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린 현실적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이런 일에 자존심을 내세울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마치 한 편의 감동 실화를 보는 듯한 감성 팔이의 극치.
하지만 결코 가식 따윈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감성 팔이였기에 나의 심금을 울리기에는 충분했다. 보통 윗사람이 저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며 도와 달라고 부탁하기 쉽지 않은데, 한국과 미국의 정서는 달라도 확실히 다르구나 싶었다.
“미군 측에 할당할 수 있는 지분은 국군 측과 같은 10%입니다. 합동작전을 벌여서 똑같이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으니까요. 물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필요하다면 양측의 합의하에 상거래를 활성화할 것이며,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적절한 대가를 받고 제공해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라고 하셨으니, 우리도 딱히 대가 지불 방식에 제한을 두지는 않겠습니다. 현 시국에 사용할 수 없는 돈이나 귀금속을 제외하면 뭐든 받도록 하죠.”
현물 거래도 좋고, 정보 거래도 좋다. 어느 쪽이든 나는 무조건 남는 장사니까.
현 시점에서 나는 차고 넘치는 게 현물(생필품, 식자재, 원자재)이라 필요하다면 저들의 요구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는 것이 가능하다.
현물 거래나 정보 거래가 여의치 않다면 아예 인력 사무소처럼 군인들을 파병해서 이쪽에 인력을 제공하고,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아 가는 식의 서비스 거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린 한국군에 비해 그리 많은 병력을 투입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같은 비율로 봐 준다는 겁니까?”
“사람 목숨에 일일이 값을 매기고 싶지 않을뿐더러, 지금 이 자리에선 ‘결과’만 말하는 게 서로에게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 누구 씨 말마따나 결과론적인 얘기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결과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게 차라리 낫다.
내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에빈 부함장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하다는 뜻이리라.
합당한 지분을 할당받을 수 있다는 것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제시할 기회가 생겼다는 뜻. 그들은 얘기가 잘 풀리자 미리 정리해 둔 물자의 품목을 이쪽으로 건네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물자 품목의 절대다수는 식료품과 식수가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외에는 이 험난한 시국을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각종 위생 용품과 의류(피복), 의약품, 연료 등이 남은 자리를 차지했다.
또한 한국은 서방권과 같은 5.56mm NATO를 주력 탄종으로 사용하는 만큼, 탄약도 조금이나마 원하는 눈치였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다 보니, 문득 나는 상대 측에 각성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들이 사태 초기부터 좀비를 피해 바다로 달아났다면 각성자가 없을 만해.’
대구 출신 각성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각성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건 사태 초기의 매우 짧은 시간대였다고 한다.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진 남부 지방과 달리 서울에서부터 악착같이 좀비들과 싸워 오며 대구로 도망쳐 내려온 그들은 당연히 각성한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각성할 수 있는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지금, 일반인들이 적극적으로 무기를 들고 좀비를 죽여도 더 이상 새로운 각성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만약 좀비를 사냥하기만 하는 것으로 새로운 각성자가 계속 등장했다면 대구는 일반인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각성자 천지가 되었을 것이고, 내가 이끄는 생존자 집단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거다.
즉, 시스템이라는 정체불명의 초자연적 현상이 인간들에게 제공해 준 매우 짧은 시간의 기회(이벤트)는 이미 버스 타고 떠난 지 오래.
각성자가 되지 못한 일반인들은 필연적으로 뒤처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사태 초기에 적극적으로 좀비를 사냥해야만 각성할 수 있는 시스템은 언뜻 굉장히 불합리하지만, 오히려 그런 불합리함을 이겨 낸 사람들이 각성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인류가 이 극악한 환경에서도 완전히 멸종하지 않았던 거야.’
각성 조건을 만족하고 각성하기 전 모든 각성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시스템 메시지, [당신은 생존할 자격이 있습니다.]는 그런 의미였던 것이다.
살고 싶다면 투쟁(사냥)하라.
투쟁을 위한 힘(각성)을 주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좀비와 인간 모두에게 통용되는 시스템의 고유 법칙이다.
사태 초기에 이 법칙에 따르지 않은 자들, 즉 겁쟁이들은 이후에 추가 각성을 막아서 철저하게 도태시켜 버리겠다는 시스템의 악의가 느껴지는 듯하다.
‘그래서 대구는 유독 각성자 비율이 높았던 거야. 군인들과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은 사태 초기부터 수많은 피난민들을 지키면서 좀비들과 투쟁해 왔으니까. 반대로 사태가 터지자마자 바다로 도망친 저들은 투쟁하지 않았으니 단 한 명의 각성자도 나타나지 않았던 거지.’
만약 각성자가 있었다면 저들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상의 좀비들을 학살해서 대량의 DNA 샘플을 벌고, 각성자들을 대거 동원해서 창원도 손쉽게 점거하여 어떻게든 자급자족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래서 패배했다.
새로운 각성자가 더 이상 등장할 수 없다는 건, 기회를 놓친 일반인들은 이전보다 더욱 악착같이 노력하고 굴종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거다.
기존의 자본주의가 정립해 두었던 세계의 질서와 상식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이제는 강대한 무력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두루 갖춘 각성자가 새로운 질서와 상식을 정립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셈.
나는 영역 지정의 최상위 스킬인, 사실상 퇴역병이 가질 수 있는 최고 등급의 스킬 ‘국가 선포’를 다시금 떠올렸다.
모든 것에 지쳐 집구석에 처박힌 채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내가, 어쩌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은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니.
‘정말 아이러니하군.’
그 작은 계기가 없었다면, 어쩌면 이 회의장의 갑을 관계는 정반대였을지도 모른다.
압도적인 무력과 권력을 두루 갖춘 저들이 갑, 쥐뿔도 없는 내가 을.
이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은 고작 밑바닥 인생들이 투쟁 좀 한다고 해서 이 절대적인 갑을 관계가 손바닥 뒤집히듯 쉽게 바뀌지는 않았는데, 시스템은 우리의 투쟁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가치를 매겨 주었다.
마치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보라는 것처럼.
‘시스템에 대해선 생각할 때마다 골치 아프군. 난 이런 복잡한 건 딱 질색인데.’
어쨌든 지금은 회의 중이다. 거의 끝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무리는 확실하게 해야지.
시스템에 대한 잡념을 떨쳐 낸 나는 국군 측과 미군 측에서 지분 행사권 혹은 제시한 물자 품목을 대부분 수용하는 것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측 대표 인사들과 웃는 얼굴로 악수를 하고, 다 같이 기념 사진도 찰칵 찍었다. 이 순간을 단순한 기억보단 치밀한 증거로 남겨 두고 싶으니까.
최종적으로 내가 저들에게 할당한 창원 점거에 대한 지분은 25%. 국군 측이 협상 끝에 15%를 가져갔고 미군 측이 시원하게 10%를 가져갔다.
사실 엉망진창이 된 창원에서 지분이니 뭐니 따질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내가 영역으로 지정해서 리뉴얼된 장소만 ‘유의미한’ 땅이기 때문이다. 또한 새롭게 생산되는 물자 역시 버려진 폐공장이 아니라 내 영역에서만 나올 것이고.
‘그래도 쓸 만한 방파제를 구해서 다행이야.’
대구에서 지속적으로 피난민을 받으며 김해 인구를 꾸준히 늘리고 있다지만, 아직 김해 전체를 완전히 복구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 창원까지 점거했는데 정작 창원을 지키고 복구할 사람이 부족하다면 낭패 아니겠나. 그러니까 그 역할의 일부를 저들에게 맡길 생각이다.
저들도 내심 불안한 섬이나 바다보다 안전한 육지의 거점을 원하는 것 같고, 무엇보다 재정비를 통해 군을 복구해서 이 사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주 목적이라고 들었다.
나는 저들에게 대가를 받고 창원의 특정 구역을 임대해 주면서 약간이지만 김해의 방파제 역할을 맡길 수 있고, 겸사겸사 저들이 대구에 자리 잡은 육참총장과 접촉하는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
사람을 믿지 않는 나는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협약서도 더 강한 무력에 의해 매우 손쉽게 파기될 수 있음을 안다. 그런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국군이 언젠가는 다시 이세호 대통령 아래에 모이겠지만, 그 시기를 최대한 늦출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다. 누가 뭐래도 내 세력을 키우는 게 우선이니까.
‘대한민국 대통령보단 김해 군주가 더 낫다는 걸 만천하에 알리는 게 중요하지.’
위대한 지도자도, 무자비한 폭군도, 야비한 위정자도 결국 여론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내 뒤통수를 치겠다면, 그땐 각성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 주면 된다. 각성자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저들에겐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오겠지.
“슬슬 크리스마스인가.”
이맘때면 항상 눈이 내리던 한반도 북부가 지긋지긋해서 따뜻한 남부 지방으로 내려온 건데, 다시 위쪽 지역이 나를 부르는 느낌이다.
더 위로 혹은 더 아래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입성하고, 그곳에서 가장 낮은 땅굴까지 내려가 적을 토벌했다.
언젠가는 대구보다, 구미보다, 포항보다 더 위쪽 지역으로 올라가야겠지. 어쩌면 강원도 산골일 수도 있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서울일 수도 있다.
한술 더 떠서 구 38선을 넘고 백두산 천지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땅을 밟아야 할 것이다.
북쪽에서 내려온 겨울철 바람이 내게 ‘고향’으로 돌아오라며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에.
아무래도 나는 천생 북진(北進)할 팔자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