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64)화 (165/227)

164화 수복기 (14)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가 도래했을 때 가장 재미없고 지루한 구간은 뭘까?

유능한 주인공이 초인적인 능력과 카리스마를 뿜뿜하면서 ‘나 혼자 부동산 독식’ 하는 것? 아니면 좀비들과 치고받아도 모자랄 판국에 못난 인간들끼리 서로 피곤한 정치질을 하는 것? 그것도 아니면 뜬금없는 로맨스 분위기를 흘리면서 남녀끼리 명륜진사갈비 같은 무제한 썸을 타는 것?

놀랍게도 나는 이 모든 요소가 가미된 매우 현실적인 드라마를 넷플러스에서 본 적이 있다.

무려 11시즌이나 기록한 역대 최대 규모의 좀비 아포칼립스 드라마였는데, 나는 그 드라마를 다 감상한 뒤에 굉장히 비현실적인 내용이라며 별점 1점과 악플 리뷰를 박았었다.

아니, 세상에 어떤 미친놈들이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가 도래했는데 서로 정치질을 하고, 죽이네 살리네 싸우고, 피비린내 나는 전장 위에서 갑자기 그윽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베드신에 당당히 돌입한단 말인가?

하지만 막상 내가 현실에서 진짜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거대한 태풍에 휘말려 보니 알겠더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생각했던 것만큼 상식적이지 않고, 이성적인 인간들보다 짐승 같은 유사 인간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지금, 나는 생각 없이 던졌던 별점 1점을 다시 10점으로 바꾸고 싶었다. 만약 미래에 넷플러스를 복구한다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그 드라마 감독에게 갈채를 보내고 추모비도 세워 줄 생각이다.

그 양반만큼 현실적인 좀비 아포칼립스 드라마를 만든 인간도 없으니까. 아마 사회 심리학자들도 인정하는 부분일 것이다.

차치하고, 나는 며칠 전에 박지찬 병장을 전령으로 보내서 거제도에 자리 잡고 있는 정규군과 무사히 ‘대리 접촉’했다.

창원을 노리는 데다 군함을 보유한 해군이라면 십중팔구 거제도 조선소 인근에 자리 잡았을 것이라는 내 예측은 그대로 적중했고, 이쪽의 의사를 무사히 전달할 수 있었다.

사실 UCAV로 확인할까 생각도 해 봤지만, 아직 우리에 대해서 모르는 저쪽이 UCAV를 포착한다면 지난번처럼 또 격추시킬까 봐 일부러 박지찬 병장을 보낸 것이다. 군복을 입고 있는 그라면 최소한 덜 경계당할 테니까.

“오늘 정오에 만나기로 한 거 맞죠?”

“예, 분명 오늘 정오에 이곳 해군 사관 학교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높으신 분들이라 엉덩이가 좀 무거우신가, 아니면 이것도 전략적 지각인가 뭔가 하는 자존심 세우기인가?

어느 쪽이든 그냥 빨리 만나서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다시 겨울 바다를 구경하던 그때였다.

저 멀리서 헬기 3대가 나란히 날아오는 게 보였다. 그 아래에는 고속정 몇 척이 일정한 대열을 형성해서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군함을 통째로 끌고 오는 건 저들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역시 물자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자, 선수들 입장.”

‘좋네, 한번 진행해 봐’와 함께 K-영화에서 가장 진부한 대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볕 잘 드는 곳에 깔아 두었던 선베드를 치우고 팀원들과 함께 회담 장소로 이동했다. 저쪽에서 우리를 불온세력이라고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박지찬 병장과 휘하 군인들을 잘 보이는 곳에 배치해 둔 건 덤이었다.

찰싹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힐링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차가운 겨울 바닷바람에 푸석푸석해진 내 피부 건강은 누가 챙겨 주고, 해안가 특유의 짠 내와 비린내에 고통받고 있는 내 정신은 누가 케어해 준단 말인가.

애초에 난 이 만남을 질질 끌 생각이 없다. 복잡한 정치질은 내 취향도, 내 전문도 아니니까.

나는 낄끼빠빠가 확실한 남자. 꼬인 매듭을 묶고 푸는 것이 마술사처럼 능수능란한 남자, 다음 대통령 선거(미정)에 최연소로 당선될 가능성이 농후한 마성의 남자 아닌가.

이런 곳에서 필요 이상으로 시간 낭비를 하기엔 내가 너무나도 아깝다는 뜻이다.

-수송 헬기에서 내린 이들을 확인했습니다. 군 장교와 호위 병력, 개중에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도 확인되었습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저격 포인트에서 대기 중인 한동석이 망원경으로 확인한 내용을 그대로 보고해 주었다.

헬리포트에서 순차적으로 착륙한 헬기들이 수송 인원을 내려 두고, 고속정도 속속 도착해서 병력을 하선시켰다.

교과서만 보고 공부했어요, 라는 느낌을 물씬 풍기는 정예 군인들의 질서정연한 모습이 그들의 훈련도를 가늠케 했다.

무수한 실전 경험을 통해 습득한 자연스러운 행동보다는 빡빡한 훈련을 통해 강제로 때려 박은 질서와 절도가 느껴진다.

서로 최소한의 호위 병력 배치가 끝나고, 마침내 나와 회담을 갖기로 약속한 고위급 인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착륙해서 움직인 건 미군 측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대통령이나 의원 같은 정치적 고위 인사는 없었으나, 대신 미 해병대와 해군의 장교진들이 나선 모양이었다. 아마 저들이 실질적인 미군 측 실무 인사일 터. 우선 가볍게 인사라도…….

잠깐, 미 해병대?

“어엇!”

미군 측에서 누군가가 나를 삿대질하더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어라 외쳤다.

“Master Lee?!”

“음? 미스터(Mr.)가 아니라 마스터? 자네, 그게 무슨 소린가?”

“아니, 다들 모르십니까?! 마스터 이가 이끄는 지옥의 3인조는 우리 해병대 내에서 아주 유명 인사들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무려 종전 선언 직전까지 우리 미 해병대의 군수 물자를 ‘긴빠이’했답니다! 그래서 선임 지휘관들을 비롯해 해병대원들이 CCTV에 찍힌 저자와 지옥의 3인조 일당 얼굴 사진을 각 야전 부대 숙영지마다 붙여 두고 ‘이자의 긴빠이를 조심하시오’라고 경고문을 써 붙여 둘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긴빠이 마스터 이, 줄여서 마스터 이입니다!”

줄이지 마, 시발! 괜히 우주류 검법을 써야 할 것 같은 이름이 됐잖아!

내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자 주위에 있던 팀원들이 내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아니, 대체 왜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지? 나는 정당한 긴빠이를 했을 뿐인데?

“아니, 저 코쟁이 놈들이 감히 우리도 쉽게 못 먹는 김치를 소수의 동양계 미군을 위해 보급한다기에 몇 개 빌렸을 뿐입니다. 다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김치는 한국인의 것이니까! 오직 한국인만 먹을 수 있으니까!

내가 필사적으로 변명을 하는 와중에도 삼삼오오 모인 미군들은 매우 심도 깊은 ‘긴빠이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대체 ‘긴빠이’라는 게 뭡니까?”

“오, 하나님 맙소사. 긴빠이를 정녕 모르신단 말입니까? 그것은 ‘물건의 위치를 옮긴다’에서 기원한 대한민국 북진군(육군, 해병대) 출신들의 고유 표현입니다. 그들은 우리 해병대원들의 야투경부터 각종 자잘한 장구류, 심지어 MRE와 빵 통조림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건들을 귀신같은 솜씨로 훔쳐 가고는 ‘작전명 : 긴빠이, 개같이 성공’이라는 이상한 쪽지만을 남기고서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무시무시하군. 현장에서 그들을 체포하지는 못했나?”

“5년 내내 북한 땅에서 활동한 그들의 은엄폐와 침투 능력은 불운하게도 우리 미합중국의 자랑스러운 해병대원과 헌병들조차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괴도 루팡의 영역이었습니다!”

“저런!”

“맙소사!”

“오, 하나님!”

다른 장교들은 그 해병대 장교가 하는 말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고, 육지 상황을 잘 몰랐던 물개(해군)들은 연신 한탄을 토해 냈다.

아,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회담을 미룰 수도 없었기에, 나는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움직였다. 다행히 뒤늦게 도착한 국군 측 인사들이 저 얘기를 못 들어서 망정이지.

‘초장부터 분위기 조지고 시작하네.’

적법한 김해 군주 이승권의 위엄을 내세워서 정치질의 ‘ㅈ’자도 못 꺼내게 압박할 생각이었는데, 저 말 많은 해병대 놈 때문에 다 망쳤다.

나는 서둘러 이들을 회의실에 밀어 넣기 위해 다짜고짜 선인사를 박았다.

“반갑습니다. 창원 내의 불온세력을 처단하고 창원을 ‘합법적으로’ 점거한 김해 생존자 집단의 리더 이승권입니다.”

“허허, 엄연히 국가 소유의 땅을 ‘합법적으로’ 점거했다는 말은 조금 어폐가 있군요. 나 이세호 대통령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나를 도와 국토 수복 계획을 수립한 박명식 함장입니다.”

나는 1년 전쯤 TV에서 목이 터져라 종전 선언과 우리 시대의 평화를 외치던 대통령 이세호를 실제로 만나게 되어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전대 대통령과 달리 눈앞의 현 대통령은 나와 큰 관계가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애초에 종전 이후 사회에 대한 모든 관심과 기대를 접고 김해 변방에 처박혀서 세월아 내월아 집돌이 생활만 했으니, 눈앞의 인간이 정확히 어떤 정책을 펼쳤고 사회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는 인물인지도 잘 모른다.

‘가끔 들리는 말에 의하면 종전 선언 이후 평화 시대의 상징으로 불렸다지.’

좋게 말하면 기가 막힌 타이밍에 권력을 쟁취한 능력자이고, 나쁘게 말하면 시대의 격류를 이용해서 운 좋게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기회주의적인 인간.

고작 인사 한마디 나눴을 뿐인데 ‘국가 소유의 땅’을 언급하는 걸 보니 정치 짬밥을 아주 헛으로 먹은 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 또한 본격적인 회담에 들어가게 되면 결국 말뿐인 압박에 불과할 터.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아 그냥 적당히 웃어 주고 넘겼다.

내게 군과 정부에 대한 혐오가 뿌리 깊이 박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저렇게 나오지는 않았겠지. 그러니까 모르면 얻어맞는 거다.

다음으로는 미군 측 인사들과 대면했다.

“반갑습니다, 마스터 이.”

“……이승권입니다. 대한민국에는 사실 적시 명예 훼손이라는 악법이 존재하니 가능하면 평범하게 불러 주시길.”

“하하, 바다 위에서만 근무했던 우리는 잘 몰랐던 사실인데, 알고 보니 한반도 북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꽤나 유명 인사더군요. 그러니 그때 ‘빌려 간’ 물건값에 이자까지 쳐서 요구해도 크게 화내지 않을 거라 믿겠습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우리 알 거 다 아는 사이잖아?’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시선에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맞잡은 손에 힘을 조금 실었다. 절대 고의는 아니었다.

나는 신의를 빼면 시체인 남자라고. 

기호 1번 이승권, 믿어 주십시오!

“자자, 겨울 바닷바람이 춥습니다. 다들 얼른 들어가시죠. 안쪽에 회담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내 정신력이 먼저 바닥나기 전에 이 끔찍한 시간을 서둘러 끝내야 할 것 같아서 서둘러 그들을 안내했다.

다행히 해군 사관 학교 내부에는 적당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이 제법 있었고, 서로 배치한 호위 병력의 질과 양을 어느 정도 가늠한 지금이라면 부담 없이 회담을 진행할 수 있었다.

겉보기에는 3개의 세력이니 삼자 회담 같지만, 일단 뜻을 함께하는 미군과 국군 측 인사들은 서로 가까운 자리에 앉았으며, 그 반대편에는 당연히 나와 팀원들이 앉았다.

하기야 같은 배(이중적인 의미로)를 타고 있는 저들 입장에선 굳이 자신들끼리 이권 다툼을 할 필요 없이 이쪽만 압박하면 되니까 그쪽이 편하기는 할 거다.

반면 우리는 세력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각성자를 내세운 막대한 영향력을 지역 단위로 행사하고 있는 입장이다.

또한 대구에서 꾸준히 유입되는 피난민들을 받아들인 덕분에 전체 인구는 가뿐히 1만을 넘겼으며, 곧 3만 단위를 바라보고 있다.

더 많은 인구, 더 많은 생산량, 더 많은 안전 지대가 확보될수록 지금에 비해 인구의 증가 속도는 곱절로 증가할 것이며, 순수 세력 규모로는 대구를 따라잡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없고 저들에게는 ‘그것’이 있다.

이쪽으로서는 손쓸 방법이 없는 바다 위의 군함과 잘 훈련받은 군인들, 그리고 각종 최신예 무기까지.

만약 불가피하게 서로 적대하게 된다면, 각자 상대의 급소를 노릴 수 있는 한 방을 믿고 처절하게 싸워야 한다.

그런 불상사를 막고 서로의 입장을 확실하게 정하기 위해 지금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문제는 서로의 입장 차가 좀처럼 좁혀질 분위기가 아니란 말이지.’

우리는 침묵 속에서 정신없이 눈알을 굴렸다. 물론 내 눈알이 가장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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