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63)화 (164/227)

163화 수복기 (13)

군인에게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 있다.

첫째는 패배요, 둘째는 명령 불복종이며, 셋째는 경계 실패다.

개중에 군인에게 가장 뼈아픈 실책이 패배인 만큼 수많은 정상 참작 사유가 존재하지만, 사실 높으신 분들 입장에선 어떤 중간 과정이 있었든 패배는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군대는 승리를 전제 조건으로 윗분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데, 패배라는 요인이 추가되는 순간 기존의 계획이 싹 다 어그러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하물며 병력과 물자를 살려서 무사히 복귀한 철수(후퇴)가 아니라 전멸에 가까운 도주라면 얘기가 한층 더 복잡해진다.

얘기가 복잡해졌다는 건 그만큼 따져 봐야 할 것이 많다는 의미이고, 지금 회의실 내부에서 입이 근질거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한국 해군 측은 박명식 함장을 필두로 몇몇 장교와 대통령, 그리고 비서실장이 자리하고 있다.

비록 세상이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군통수권자이며 창원에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한 작전의 핵심 정보를 제공한 VIP였다. 오히려 정치인임에도 이런 자리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반면 미군 측은 한반도 북부에서 급히 병력과 물자를 실어 도망쳐 내려오다시피 한 이지스 구축함의 함장과 휘하 장교,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극소수의 해병대를 지휘하게 된 무늬뿐인 지휘관이 함께 자리했다.

그들에게 작전의 실패는 뼈아픈 손실이지만, 단지 실패했을 뿐이라면 아직 어떻게든 만회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극소수의 생존자만 간신히 도망쳐 왔다면 만회고 뭐고 피해 복구를 하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에, 특히나 미군보다 큰 피해를 입은 한국군 측은 먼저 상대방에게 질타를 보낼 수 있었다.

“분명 그쪽에서 제공해 준 정찰 정보에 따르면 도시 내부의 위험도는 크지 않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만, 대체 작전 지역 정찰을 어떻게 하면 부대원들이 갔던 곳마다 부비 트랩이 터지고 그 괴물들이 한 무더기나 쏟아져 나오는 겁니까? 그리고 정체불명의 무장 세력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가 정규군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습을 해 왔다는데, 정말로 정찰 과정에서 위험 요소를 조금도 파악하지 못했던 겁니까?”

박명식 함장이 ‘너희가 정찰을 대충 해서 우리 애들이 다 죽은 거 아니냐’ 같은 뉘앙스로 물고 늘어지자 미군 측 인사들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지만 박명식 함장이 아주 틀린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이는 군인은 없었다. 실제로 보고받은 정찰 정보와 달리 현지 상황은 완전히 딴판이었으니까.

그 탓에 한국군만이 아니라 미군도 적잖은 피해를 입었으니 박명식 함장이 대놓고 ‘정찰’을 문제 삼아도 할 말은 없었던 것이다.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이지스 구축함의 함장 잭 커닝햄 대령이 무겁게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우선 작전 실패에 따른 아군과 우군의 피해가 컸던 점은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력부터 물자, 장비까지 모두 부족한 상황에서 우리 측 정찰대원들은 최선을 다했고, 난 그들이 겁쟁이처럼 도시 깊숙이 들어가기 싫어서 정찰을 대충 하고 돌아왔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애초에 정찰대원의 헤드 캠으로 녹화된 정찰 영상은 전부 공유하지 않았습니까. 부비 트랩이 터진 장소는 대부분 정찰 대원들이 시간상 꼼꼼하게 살필 수 없는 건물 내부였으며, 그 괴물들도 부비 트랩처럼 누군가에 의해 몇몇 건물 내부에 숨겨져 있다가, 군이 도시에 진입하자마자 풀려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결정적으로 우리 군은 한국 도시의 모든 지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혹시 모를 시가전에 대비해 최소한의 도로 상태와 건물의 구조, 도시의 규모 정도를 확인했을 뿐입니다.”

잭 함장은 도시의 기본적인 구조를 파악하는 선에서 정찰을 끝마친 것은 인정하지만 그건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실제로 여력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기도 했고.

“우린 테러리스트가 득시글거리던 아프간에서도 모든 도시와 마을의 건물을 하나하나 수색하고 모든 사람들을 붙잡아 불심 검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나 많은 군인과 정찰 자산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정찰 대원 몇명 내보낸 것으로 그 넓은 공업 도시의 이면에 숨겨진 비밀을 어떻게 다 파악할 수 있었겠는가.

미군이 자랑하는 정찰 자산을 창원에 집중시켰다면 또 모를까, 본국과의 연락은커녕 당장 북한에서 헤어진 본대와의 연락도 끊어진 마당에 그런 것을 기대하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정찰이 부족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그 부분은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양해해 주길 바랍니다. 애초에 육지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그 괴물들이 몰려올 수도 있으니 먼저 정찰 헬기를 동원하지 말자고 요구한 것은 그쪽 아니었습니까.”

정찰 헬기로 도시 내부를 돌면서 훨씬 더 넓은 시야로 지상 정보를 파악하는 것은 분명 큰 도움이 되었겠으나, 헬기 특유의 소음과 과하게 눈에 띈다는 점 때문에 사용을 자제하자고 했던 것은 박명식 함장의 요구였다.

헬기를 이용한 빠른 병력 침투가 아닌, 고무 보트와 고속정을 이용해서 해상으로 병력을 조용히 침투시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렇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회의의 참된 모습이라고는 하나, 결과적으로는 해결책이 나오는 게 자꾸만 늦어지는 원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군가가 총대를 메고 ‘그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고 잔잔한 수면 위에 과감한 돌팔매질을 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서로 대립하고 있는 군인들 중 누군가가 말을 꺼내면 분위기만 더 흉흉해질 뿐이니, 마지못해 이세호 대통령이 총대를 멨다.

다행히 회의실에 모인 군인들 중 그 정도로 눈치가 없는 사람은 없었다.

“헬기를 동원해서 다시 한번 창원 내부의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고, 그냥 포격 좌표를 땁시다.”

“군수 물자와 적들을 함께 날려 버리자는 겁니까?”

“지금 우리가 보유한 병력으로 저 도시를 완전히 제압할 방법이 있습니까? 애초에 우린 제주도에서도 중국 놈들에게 쫓겨 이곳까지 도망쳐 온 신세 아닙니까. 우리가 보유한 장비의 수준이나 병사들의 정예함은 분명 믿음직합니다. 당연히 우리가 전력을 다하면 이기겠지요. 저들을 제압하고 도시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할 겁니다. 안 그래도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상황인데 무리해서 병력을 밀어 넣고 소모전을 벌이는 건 하책 중의 하책입니다.”

“그 말에 이견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군수 물자까지 싹 날려 버린다면 본말전도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정확한 정찰을 통해 정확한 좌표를 따서 최대한 핀 포인트로 공격하자 이겁니다. 다행히 중국 놈들과 직접적으로 맞붙지는 않아서 아직 함포와 함대지 미사일의 여유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독도함 산하의 군함들과 우리 측 군함이 합공을 가한다면 도시 내에서 암약한 무장 세력과 괴물들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겁니다.”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면 결국 선택을 해야 한다.

큰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아득바득 저 도시에 다시 병력을 밀어 넣어서 어떻게든 도시를 점령할지, 아니면 거제도에서 미사일과 함포를 퍼부어 적들을 반쯤 죽여 놓은 뒤 케이크처럼 손쉽게 도시를 떠먹을지.

부족한 병력과 물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고, 오랜 기간 동안 편치 않은 잠자리가 이어진 탓에 훈련받은 군인들조차 점점 버티기 힘들어 했다.

저 아래에는 중국군이라는 증오스러운 적이, 저 위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장 세력과 놈들이 사냥개처럼 부리는 다수의 괴물들이 있다.

이대로 샌드위치처럼 짓눌린 채 자멸하기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활로를 찾아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역시 도시에 포격을…….”

박명식 함장이 어렵사리 입을 연 그때, 한국군과 미군이 동시에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와 각 함장들에게 귓속말로 어떤 소식을 전달했다.

“아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고무보트를 타고 접근해 왔다고? 그게 사실인가?”

“예, 약 2개월 전 김학렬 소장님이 이끄는 임시 예편 부대에 소속되어 함락된 부산에서 김해로 후퇴, 이후 김해 공항에서 다수의 민간인을 보호하며 항전을 이어 가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타 세력에 합류한 군인이라고 합니다.”

“본인이 그렇게 밝혔나?”

“예, 일단 군번줄을 확인했고 현재 몸 수색을 거친 뒤 폭발물이나 무기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함내에 임시 구금 중입니다.”

하필 이 타이밍에 대뜸 아군이 창원에서 자신들이 버리고 온 고무보트를 타고 거제도로 넘어왔다? 그것도 혼자서?

창원과 거제도는 분명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기는 하지만, 대체 어떻게 자신들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접근해 왔는지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창원은 지금 적들이 점거하고 있어서 굉장히 위험하기도 했다.

“일단 회의를 잠시 중단해도 괜찮겠습니까. 아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자발적으로 우리 측에 접촉해 왔으니 함장으로서 진의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신 우리에게도 정보 공유를 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 동맹군과 척을 질 만큼 박명식은 멍청하지 않았다.

회의가 중단되고 박명식 함장과 휘하 장교진, 그리고 이세호 대통령이 예의 육군 병장이 임시 구금되어 있다는 장소로 향했다.

식당에는 총을 든 수병들에게 억류된 채 말없이 식탁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한 청년이 있었다. 군복을 보니 확실히 육군 소속이었다.

관계자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을 모두 식당에서 내보낸 박명식은 이세호와 함께 청년의 맞은편에 앉았다.

“반갑네. 나 박명식 함장이야. 아, 딱딱하게 관등 성명 댈 필요는 없네. 이미 자네에 대한 보고는 받았으니까. 부산에서 근무하다가 사태가 터지면서 김학렬 소장님이 이끄는 임시 예편 부대에 소속되어 있었다지.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김학렬 소장님을 비롯한 임시 예편 부대가 아직도 건재한가?”

“김학렬 소장님께선 안타깝게도 이미 작고하셨습니다.”

“지금 자네 앞에 계신 분이 대통령이시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예, 김해에서 저희와 함께 항전을 이어 나가시다 좀비들의 대규모 습격에 그만 전사하셨습니다. 2차 감염을 막기 위해 부득이하게 유해를 화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쯧, 이런 시국일수록 군에 한 명이라도 더 유능한 인재가 필요한 법인데. 혹시 유언 같은 것을 남기셨나?”

“소수의 군인들만으로는 다수의 민간인을 보호할 수 없으니, 민간인 생존자 세력과 손을 잡아 지역의 안전을 확보하고, 피난민들을 보호하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박명식은 정말로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김학렬 소장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군 장성인 그가 육지에서 여전히 건재한 상황이라면 함께 협력하여 창원을 더욱 쉽게 공략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외람되지만 사실 저는 김학렬 소장님에 대한 얘기를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그럼 자네와 함께 활동하고 있는 군인들이 우연히 우리 측 소식을 듣고 이쪽에 합류하기 위해 온 건가?”

“그것도 아닙니다. 현재 저를 비롯해 김해 공항에서 항전하던 군인들이 소속된 생존자 집단이 어제 막 창원을 점거한 참입니다. 해당 지역의 불온세력을 기습하여 전멸시켰고, 현재까지도 도시 내의 좀비들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좀비들의 수가 워낙 많아서 특정 구역 단위로 처리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만, 외부에서 좀비가 더 유입되지 않는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

“…….”

박명식도, 잠자코 있던 이세호도 박지찬 병장의 충격적인 발언에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기만 했다.

“잠깐잠깐. 지금 전시 상황에 준하는 국가 재난 상황이야. 자네를 포함한 군인들이 군에 합류하지 않는 것도 문제인데, 자네들이 소속된 생존자 집단이 창원을 점거했다고? 대체 언제 말인가?”

“예, 이곳의 군인들보다는 조금 늦긴 했습니다만, 저희는 김해에서 창원 경계를 넘어 공단과 시내에 진입, 적들의 전초 기지 및 본거지를 우선적으로 타격하여 성공적으로 진압 작전을 완료했습니다.”

“자네들의 병력 규모는?”

박지찬 병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답했다.

“저는 그저 집단에 소속된 일개 전투원일 뿐이라, 전 병력의 정확한 규모를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전령 역할을 맡은 것도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였습니다.”

마치 일부러 알려 주지 않는 듯한 느낌이 있었지만, 박명식은 그런 사소한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적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을 텐데, 지휘 체계도 제대로 잡혀 있을 리 없는 자네들이 그 부분은 어떻게 해결한 건가?”

“집단에 유능한 리더가 있었기에 그 부분은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소속된 집단은 아랫사람보다 윗사람이 더 전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오히려 저 같은 일개 전투원은 편하게 싸웠을 지경입니다.”

그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당연히 직접적인 전투는 아랫것들인 병사들이 하는 건데.

연이은 상식의 붕괴에 박명식은 어질어질한 기분을 느꼈다. 오죽하면 평생 안 하던 뱃멀미가 갑자기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일단 박지찬 병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상대측은 창원의 그 불온세력과 괴물들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을 만큼 강대한 화력과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건데, 이런 시국에 그만한 규모의 지상 병력이 남아 있을 수가 있나? 설령 남아 있다고 해도 집단의 지휘 체계를 군이 아니라 민간인이 장악할 수가 있나?

‘최신예 장비와 막대한 양의 군수 물자, 그리고 잘 훈련된 정예군이 자리 잡은 한반도 북부라면 또 모를까, 최후방의 약소 부대만 남은 남부 지방에서 이만한 힘을 키울 수 있는 집단은 없다. 그걸 주도할 수 있는 민간인은 더더욱 없고. 아니면 정말 내 상식이 무너지고 있는 건가?’

종전 선언 이후 남부 지방에선 교육 및 훈련용을 제외하면 구닥다리 전차도 보기 힘들어졌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기갑 병력은 거의 대부분 중국과 러시아 국경선 인근으로 재배치되었으니까. 특정 집단이 힘을 키우고 싶어도 키우기 힘든 환경이라는 거다.

‘잠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큰 충격을 받은 탓에 잠시 얼타고 있던 그였지만, 박명식은 아직 중요한 얘기가 나오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자네가 소속된 집단이 창원의 불온세력을 처리하고 지역을 점거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인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안 그래도 저희 측 리더가 창원에 개입하기 전에 이곳에서 투입시킨 군부대가 큰 피해를 입은 것을 파악했습니다. 저희와는 일절 관계없는 결과이기에 행여나 오해의 소지가 생길 일이 없도록 회담을 가졌으면 한다, 그 전언을 전달하기 위해 제가 직접 찾아온 겁니다.”

“……그 불온세력과 조금도 관계가 없다는 걸 증명할 수 있겠나?”

“창원에서 활동하던 불온세력의 리더를 생포했습니다. 필요하다면 회의를 끝낸 뒤 즉시 신병을 인도해 줄 의향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박명식은 입술을 짓씹었다.

불온세력의 리더까지 잡아 놨다고 한 이상 저 집단의 꼬투리를 잡는 것은 힘들어졌다.

자신들과 달리 별다른 피해를 입은 것 같지도 않고, 성공적으로 창원을 점거했으며, 불온세력을 처리했다는 명분과 정당성까지 거머쥐고 있는 상태니까.

때문에 국가적 재난 상황이니 정부 수반의 필요에 의해 싸울 수 있는 사람을 군인으로 징병하고, 물자를 징발하겠다는 말을 꺼내기도 난처해졌다.

일은 저쪽이 다 했는데 이쪽이 권리만 주장하는 건 너무 뻔뻔하니까?

‘아니, 뻔뻔함 따위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체면이고 뭐고 신경 쓸 처지가 아니니까.’

자신들이 불온세력을 상대로 정보의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섣불리 방심한 탓에 큰 피해를 입고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고 있는 동안, 저쪽은 진즉에 불온세력을 처리하고 전후 처리를 준비 중이지 않은가.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규모가 큰지, 어떤 목적과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를 신흥 세력과 무작정 척을 지자니 이쪽에서 손해 볼 것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기껏 다 차려 놓은 밥상을 남에게 넘겨줘야 할 판이다.

“정식으로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자 하는 거라면 어렵지 않지. 이쪽에서도 논의를 해 봐야겠지만 대화를 할 뿐이라면 미군 측에서도 거절할 사람은 없을 걸세.”

고민하는 박명식을 대신해 대통령인 이세호가 그리 말했다.

비록 망국의 대통령이긴 해도 가장 높은 사람이 하는 말이다 보니 박지찬 병장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럼 전언을 전달했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약속 장소와 일정은 이틀 후 정오, 해군 사관 학교 부지 내로 하겠습니다.”

자신이 임시 구금된 상태라는 것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박지찬 병장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식당을 떠나 고무보트에 다시 탑승했다.

본래 세력 간의 전령은 예나 지금이나 억압하지 않는 게 관례이기에, 누구도 선뜻 그의 행동을 막아서지 않았다.

박지찬 병장이 ‘각성자’에 대한 정보를 일부러 알려 주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다면 당연히 막았겠지만, 거의 반년이 넘도록 바다 위에만 있던 사람들 중 누가 각성자니 뭐니 하는 것을 알 수 있었겠나.

그들은 여전히 눈뜬 장님, 귀머거리 신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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