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62)화 (163/227)

162화 수복기 (12)

팀원 모두가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 채성아가 만든 특제 약(버프)을 먹었다고는 하나, 좀비가 아닌 인간과의 전투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김진경과 채성아는 그 많은 적들의 시선을 끌면서 내 준비가 끝날 때까지 유인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으며, 한동석은 본인에게 익숙치 않은 장거리 저격과 침투로 시내 곳곳에 위치한 적들의 눈과 귀를 잘라먹어야 했다.

그런 팀원들 중에서도 가장 힘든 역할을 맡았던 건 단언컨대 진가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녀는 단독으로 적들의 후방에 침투해 남은 잔당들을 직접 소탕했으니까.

후방에 침투해서 들키지 않는 것, 들키더라도 부상 입지 않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결과적으로 팀원들은 잘해 주었다. 자신들의 역량 이상으로 대단한 성과를 내 주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제 창원과 김해의 경계에서 대기 중인 박지찬 병장이 이끄는 군인들을 불러들여 창원 내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헬조선 잔당들과 좀비 떼를 처리하면 된다.

김해에 이어 창원까지 내 손에 넣는다면 지역 단위의 커뮤니티가 더욱 크게 활성화되고, 남부 지방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저 위쪽 동네의 좀비 군단에게도 맞설 힘이 생긴다.

이렇게까지 해도 아직 순수한 거점 규모로만 따지면 대구에 비해 한참 부족하지만(주로 머릿수), 그래도 꾸준히 피난민을 유입시키고 전투원을 양성하다 보면 언젠가는 거대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개똥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팀원들, 내가 자선 사업가처럼 공짜로 퍼 주지 않아도 알아서 벌어먹고 사는 거점 일원들,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이승권 랜드를 보고 더 많이 찾아오는 피난민들!

근 시일 내에 내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뭐 빠지게 뛰어다니며 고생할 필요도 없어질 날이 올 것이다. 아마도.

‘다 좋아, 다 좋은데…… 이놈만 없으면 더 좋겠군.’

밝은 미래를 상상하다가 다시 냉혹한 현실로 돌아온 나는 인상을 찡그려야 했다.

내 앞에 무릎 꿇려진 놈이 아까부터 제 주제도 모르고 건방지게 눈을 부라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장 오빠가 오더해 준 대로 후방에 침투했을 때 자기 부하들이랑 같이 도망치려던 걸 생포했어요.”

“진가희에게 이승권 포인트 10점!”

나중에 참 잘했어요 도장 10개로 바꿔 가길 바란다.

“하지만 이왕 생포해 올 거라면 눈알도 확 뽑아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이 적법한 김해 군주를 당당히 노려보고 있잖아.”

“지금이라도 무엄하다고 소리치면서 머리통 한 대 후려갈깁니까?”

한동석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으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하도 잃고, 거점도 잃고, 물자도 잃었는데 이제 남아 있는 자존심마저 잃게 된다면 저 머저리는 땡전 한 푼 없는 빈털터리 신세가 되지 않겠나.

차라리 내 눈에 띄기 전에 모가지를 잘라서 어디 효수시켜 놨다면 또 모를까, 이왕 잡아 왔다면 쓸 만한 구석을 찾아봐야 한다.

여기가 중세 유럽이었다면 상대 세력에게 몸값을 요구하고 반품시켰겠지만, 안타깝게도 놈이 소속된 ‘헬조선’의 본대는 이곳 창원에 없을 것이다. 택배 수수료가 더 많이 나올 거다.

게다가 채성아가 응급 처치를 해야 할 만큼 놈의 상태는 영 좋지 않았다.

양 손목은 모두 깔끔하게 잘려 나간 상태였고, 제압을 하는 과정에서 진가희에게 두들겨 맞았는지 여기저기 터지고 멍이 든 흔적이 보였다.

만약 놈을 소속된 세력에게 되돌려준다고 해도 ‘이거 제네바 협약 위반 아님? 전쟁 범죄 각이네, 전쟁 범죄 각!’ 하고 꼬투리를 잡힐 것이 자명한 바, 그러니 쥐꼬리만 한 몸값을 기대하는 것보단 아예 다른 용도로 써먹는 게 더 낫다.

발톱을 하나씩 뽑아내고 발톱을 뽑아낸 자리에 알보칠을 살살 발라 가면서 정보를 캐낼까?

창원에서 정확히 뭘 하고 있었는지, 네가 소속된 헬조선의 본대가 어디에 있는지, 대체 왜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는지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보려면 날밤을 까도 모자랄 것 같다.

으슥한 곳에서 단둘이 비밀스러운 시간을 가진다면 아마 저놈과 나는 죽이 꽤 잘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희망 사항일 뿐이다.

앞서 잡아 온 놈들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는데, 빨갱이 행동 대장쯤 되는 놈이 쉽게 입을 열 리가 있나.

‘죽이자니 아깝고, 살려 두자니 좆같고, 이것 참 계륵(鷄肋)이로다.’

한중을 두고 귀 큰 놈과 대립하던 쬬, 당신의 심정이 이러했단 말입니까.

자신을 헬조선 창원 지부장 심호연이라고 밝힌 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그때, 전투원들과 함께 창원 시내를 돌아다니며 청소하고 있던 박지찬 병장으로부터 무전이 들어왔다.

-병원장님, 창원 시내를 청소하면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상한 것이라면?”

-대한민국 해군 군복을 입은 군인들의 시체입니다. 군번줄을 확인해 보니 대부분 올해 입대한 애들입니다. 그리고 한국군이 아닌 타 국적의 시체도 확인됐는데…… 미군이었습니다.

미군! 그리고 물개!

나는 그제야 UCAV로 멀리서 희미하게나마 확인됐던 무장 세력의 군복이 어째서 육군과는 달랐는지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해군이 지금 남부 지방 육지에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들을 용의선상에서 잠시 제외해 두었던 것이 문제였다.

‘대한민국 해군은 2차 남북 전쟁 이후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각각 서해와 동해 위쪽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물론 제주도에도 엄연히 규모가 큰 해군 기지가 있는 만큼 남부 해역에 해군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좀비 사태로 나라가 망한 지금, 해군이 굳이 위험천만한 본토로 돌아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존버하기 편한 제주도와 남해 일대에 존재하는 수천 개의 섬들을 내버려 두고 굳이 본토에 상륙하는 건 너무 위험하니까.

육군의 병력 지원도, 공군의 정찰 지원도 없는 마당에 해군이 얼마 안 되는 병력을 쪼개서 지상으로 보내는 건 미친 짓으로 볼 수밖에 없다.

‘아마 미군과 함께 움직이니 그 부분은 커버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거겠지.’

확실히 미군이 가진 최첨단 장비의 성능은 국군보다 월등하고, 또 미군 개개인의 전투력 또한 상당한 편에 속한다. 그들은 전문적인 직업 군인이고 우리는 징병으로 끌려온 노예들이니까.

하지만 그런 미군도 대대적인 지원 없이 소수 병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막말로 인간 병기라고 불리는 특수 부대조차 엄연히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존재한다.

과거 미국이 이라크를 철저하게 조질 수 있었던 이유도 압도적인 폭격으로 지상을 싹 쓸어 버린 다음 엄청난 수의 지상군을 일시에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창원에 폭격이 있었나? 아니면 압도적인 지상군이 우르르 밀고 들어왔나? 하다못해 전차와 장갑차를 대거 동원하기라도 했나?

‘육지의 상황을 모르는 알보병 수백을 사지에 대충 밀어 넣고 일이 잘 풀리길 바랐다면 그 지휘관은 대가리에 총알 구멍이 뚫려도 할 말이 없지.’

“일단 시체는 싹 모아서 불태우고, 군번줄과 비교적 멀쩡한 장구류만 챙겨 주세요.”

-정말 불태워도 괜찮겠습니까? 좀비로 변한 이들은 저희가 이미 처리했고, 상태가 좀 심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좀비로 변하지 않은 시체가 여럿 있습니다.

“좀비로 변하지 않은 시체라고 해도 위생과 전염병 문제가 있고, 또 길거리에 방치된 시체들은 좀비들의 영양분이 돼요. 그들의 유가족이나 전우에게 시체를 돌려줄 수 없는 건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죠.”

-예, 그럼 그렇게 알고 시체를 처분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들의 동료로 추정되는 무장 세력이 나타난다면 섣불리 교전하지 말고 물러나세요. 아마 우리가 자신들의 동료를 죽였을 거라고 오해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교신을 끝마친 나는 잠시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상황이 참 묘하게 됐다.

빨갱이 테러리스트 조직(창원 1호점)을 조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하필 미군과 국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전멸당한 뒤에 우리가 창원을 손에 넣었다는 점이다.

생각지도 못한 부비 트랩과 사냥개처럼 풀려난 좀비 떼, 그리고 무장한 테러리스트들의 기습에 크게 당한 저들이 지금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창원에는 상상 이상으로 무장이 잘된 세력이 있다! 심지어 놈들은 온갖 더러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을 적대시한다!

그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창원의 주인이 된 우리와 마주친다면? 아마 높은 확률로 대화고 뭐고 일단 총질부터 할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소란을 피우지 않기 위해 아껴 두었던 함대지 미사일이나 함포를 쏠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던 우리가 괜히 똥물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는 얘기다.

“들었냐, 캡틴 빨갱이? 네가 건드린 게 국군이랑 미군이래.”

“상대가 정규군인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힘으로 놈들을 꺾었지. 예나 지금이나 짭새와 군바리들은 틀에 박힌 사고방식에 빠져서 우리의 자유로운 사상과 전술을 이해하지 못했지. 다만 네놈 모가지를 따지 못한 게 유일한 한…… 크윽!”

뻑!

짭새라는 말에 꿈틀한 김진경이 건방진 놈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평소에는 과묵한 인간이 빡치면 저렇게 무서운 법이다.

나는 바닥을 뒹굴고 있는 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폭력을 행하는 입장과 당하는 입장이 역전되면 이렇게나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6년 전에도 똑같은 상황을 질리도록 겪었다.

“너희 테러리스트 놈들이 저지른 수많은 범죄에 대단한 ‘사상’ 따윈 존재하지 않아. 하물며 남을 폭력으로 핍박하고 억압했으니 ‘명분’도 없지. 너흰 그저 개인의 쾌락과 이기심에 젖어 사회의 질서에 흠집을 낸 것으로 자화자찬할 뿐인 버러지들이야.”

“쿨럭! 쿨럭! 북한 땅에서 수많은 인간들을 닥치는 대로 쳐 죽여 왔을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네가 북진군 출신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너 같은 모순적인 전쟁광 정신병자들은 산 채로 잡아서 피부를 벗기고 불태워야 해! 비록 나는 실패했지만 또 다른 단원들이 내 뒤를 이어 줄 거다!”

“음, 아니지, 아니야. 지금 네가 해야 할 건 삼류 악당 같은 흔하디흔한 협박이 아니야. 아직도 모르겠어?”

나는 녀석의 앞으로 다가가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내가 북진군 출신인 걸 알고 있다며. 그런데 정말로 내가 다시 ‘북진’하길 원해?”

“……!“

“차갑고 삭막한 그 땅에서 편안한 죽음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 줌의 인간성이었어. 그것마저 잃어버리면 적들을 손쉽게 도륙할 수 있을지언정 어디 한군데는 반드시 망가져서 나오는 한낱 짐승만도 못한 놈으로 전락하곤 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땅에서 사지 멀쩡하게 돌아왔지. 그러니까 다시 묻는다.”

나는 놈의 떨리는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정말로 내가 다시 그 땅으로 돌아가길 원해?”

그 땅에 있을 수많은 네 동료들이 과연 나의 ‘복귀’를 환영할까? 날 잡아 죽이기 위해 전력을 다할까? 진심으로?

“…….”

“그래, 그게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이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어쨌든, 일이 좀 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무장 세력의 정체가 밝혀졌으니 이 계륵 같은 놈을 써먹을 구실이 생겼다.

“밑천이 다 드러나서 어디에 써먹을까 했지만, 저쪽에게 인사 선물로 주는 게 낫겠어.”

정부도, 법도, 질서도 사라진 마당에 과연 놈을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고 최소한의 인권을 지켜 줄 세력이 있을까?

나는 저쪽 세력과 접선할 명분이 생겨서 좋고, 저쪽은 창원에서 당한 울분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게 되어서 좋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뭐라도 되는 양 끝까지 모가지를 빳빳하게 세우고 있던 놈은 이제 기껏해야 잘 포장된 집들이 선물로 전락했다.

인간은 원래 적당한 선에서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굽힐 줄 알아야 하는데, 가정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놈들은 종종 이렇게 죽어라 뻗대다 자신의 신세를 말아먹기 마련이다.

나는 잔뜩 굳은 놈의 입 안에 다짜고짜 재갈을 물리고 단번에 발목의 힘줄을 끊어 냈다.

놈이 순간적인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나는 마법과 구분할 수 없는 수려한 칼 솜씨로 순식간에 작업을 끝마쳤다. 마장동 정육점 주인 아들에게서 배운 발골 솜씨가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일단 저쪽에서 오해하고 우리 땅을 먼저 공격하기 전에 연락해서 접선 일정을 잡죠. 정규군과 접촉하는 건 가능한 피하고 싶지만 그래도 우리가 적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게 알려야 하니까요.”

딱히 싸운다고 해서 질 것 같지는 않지만, 일부러 오해를 풀지 않아서 양측이 피를 흘리는 것보단 깔끔하게 입장 정리를 하는 게 낫다.

내가 무슨 착각계 순정 만화의 주인공도 아니고 일부러 오해를 풀지 않아서 일을 키울 이유가 없잖은가. 그건 혈관에 피 대신 사이다가 흐르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고구마다.

물론 겸사겸사 창원과 김해, 부산을 비롯한 경상남도 일대는 모두 우리 땅이라는 것을 저들에게 확실하게 알리려는 목적도 있으니 마냥 섣부른 접촉도 아니다.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대구 측 군부는 지역 동맹에 적극 동의하고 좋은 관계를 맺었지만, 과연 저쪽도 대구 군부와 똑같은 선택을 할지 알 수 없다는 게 유일한 변수다.

‘이쪽의 노력과 희생을 이해하고 정당한 권리를 존중해 준다면 대구처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겠고, 그게 아니라면…….’

아마 서로 끔찍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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