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수복기 (9)
자, 우리의 혁명적 정신으로 미제앞잡이 이승권에게 투항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 친구들은 내 마음 한편에 묻어 두고.
이제 본격적으로 소수 정예의 힘을 살려서 한층 더 빡치는 게릴라전을 벌일 차례다. 원래 게임과 전쟁은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상대방 빡치라고 하는 거니까.
공장 옥상 위로 올라간 나는 느긋하게 UCAV 컨트롤러를 손에 들었다. 몸에서 탄내가 풀풀 풍기지만 잠깐 시원한 겨울바람 좀 맞아 주면 금세 지워지겠지.
그보다 중요한 건 우리 팀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굴리며 적들에게 최대한 크고 아름다운 엿을 먹여 줄 수 있느냐다.
다행히 내게는 거점 일원에게 일방적으로 귓속말을 속삭일 수 있는 스윗한 능력이 있었고, 높은 하늘 위에서 지상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눈(UCAV)도 있었다.
-포로들에게서 정보를 얻지는 못했지만, 어차피 놈들도 지금쯤 열이 잔뜩 올라서 우릴 찾고 있을 겁니다. 압도적인 머릿수와 화력 앞에선 소수 정예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겠지만, 처음부터 싸워 주질 않는다면 얘기가 달라지죠.
팀원들에게 귓속말을 속삭이면서 각 인원이 담당하게 될 포지션을 정해 주었다.
-채성아 씨는 김진경 경장과 함께 장갑 구급차를 타고 다니면서 어그로 역할을 맡아 주세요. 무력이 필요해지면 김진경 경장이 나설 거고, 도주 루트는 제가 실시간으로 짜 드리죠.
하늘을 경계하던 남쪽의 무장 세력이 헬조선 놈들에게 당한 지금, UCAV는 다시 창원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며 모든 루트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최신식 AI가 탑재된 내비게이션도 지금 나보다 더 뛰어날 순 없을 터. 단순히 장갑 구급차를 이끌고 안내해 주는 루트를 따라 도망치기만 할 뿐이라면 채성아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겸사겸사 무력을 쓰게 될 김진경 경장이 만에 하나라도 부상을 입는다면, 그녀가 바로 곁에서 치료해 줄 수도 있다.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쉽고, 가장 제격인 일이다.
-다음으로 한동석 씨는 저격 임무를 맡아 주세요. 저놈들은 우리가 창원에 오기 전부터 건물 옥상이나 골목길 등에 감시자들을 배치해 두고 이쪽의 움직임을 파악해 왔어요. 지금까지는 우리가 차량을 이용해 워낙 빠르게 몰아친 탓에 놈들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을 뿐, 놈들이 분산된 병력을 결집시키면 정보도 그만큼 빨리 전달될 거예요. 저격 포인트는 제가 찍어 드릴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시고, 놈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는 것만 집중하면 됩니다.
실적 욕심이 나더라도 절대 과욕을 부리지 말라는 주의 사항을 끝으로, 귓속말 대상은 한동석에서 진가희로 바뀌었다.
-진가희 씨는 놈들이 다른 팀원들에 의해 큰 혼란을 겪고 있을 때 빈집 털이를 하는 역할입니다. 놈들이 우릴 잡기 위해 출진하면 필연적으로 주요 거점에 병력 공백이 발생할 텐데, 제가 찍어 주는 포인트로 이동해서 잔당 처리하고 불 지르거나 폭파시키세요. 실내전, 근접전이 강요되는 만큼 제 쪽에서 도와주기 힘들기 때문에 계획이 틀어진다거나, 거점 내 병력이 예상 이상으로 많다면 자율적으로 판단해서 후퇴해도 상관없어요.
진가희에게 마지막 귓속말을 전달한 다음, UCAV로 촬영한 창원 시내의 풍경을 확인하고 곧바로 좌표를 땄다.
어느 지역에 얼마나 많은 병력이 모이고 있는지, 어떤 루트를 사용할 수 없는지, 어떤 포인트가 최적의 저격 포인트인지, 얼마나 많은 놈들의 눈과 귀가 시내에 퍼져 있는지 등등.
흡사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사령관이라도 된 양 나는 쉬지 않고 UCAV로 정보를 취득하면서 팀원들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자꾸 귓속말을 속삭였다고 하니까 어감이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귓속말은 원래 속삭이는 거다. 어떤 미친놈이 귓속말로 윽박지른단 말인가.
‘채성아와 김진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 전술에 큰 이견은 없는지 채성아와 김진경이 탑승한 장갑 구급차가 창원 시내를 쌩쌩 달렸다. 여봐란 듯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장갑 구급차의 어그로는 굉장했다.
‘놈들의 눈과 귀가 가장 먼저 장갑 구급차를 목격했고, 몇몇 이들이 단거리 무전기로 본대에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달리 조금 고도를 낮춰서 저속으로 날고 있는 UCAV는 고화질 감시 카메라로 저 미어캣 같은 놈들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 냈다.
이미 자신들의 거점을 몇 개나 태워 먹은 장갑 구급차를 확인한 헬조선 병력들은 예상대로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놈들은 어디서 확보했는지 모를 대량의 바이크와 트럭에 병력을 태우고서 곧장 장갑 구급차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세기말이 도래하면 악당들은 모히칸 헤어스타일을 하고 바이크를 타고 다니는 게 일종의 법칙처럼 정해진 걸까? 아포칼립스가 사람 여럿 망치는 것 같다.
‘놈들은 시내에 풀린 좀비 떼를 다시 유인해서 한 지점에 모아 두거나 적당한 공장 건물에 가둬 두었다. 장갑 구급차의 움직임을 보고 다시 좀비 떼를 풀겠지.’
인간 사냥 경험이 거의 없는 좀비들은 굉장히 멍청해서 어그로에 쉽게 끌린다. 그런 좀비의 습성을 이용해 미끼 역할을 맡은 누군가가 좀비들을 유인해 한 지점에 가둬 버리면 자연스럽게 가두리 양식장이 되는 것이다.
철저하게 좀비를 배제한 대구와 달리, 창원에 자리 잡은 저놈들이 어그로에 매우 취약한 좀비들을 써먹기 쉬운 고기 방패 겸 사냥개로 활용할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효율적인 덫도 쿵짝이 잘 맞아야 활용할 수 있는 법이지.’
장갑 구급차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꾸준히 정보를 흘리는 헬조선의 눈과 귀에 구멍이 생긴다면?
-한동석 씨, 눈앞에 보이는 A 상가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세요. 옥상에 쥐새끼 한 마리 있으니 처리하시고, 북동쪽 방향으로 150m쯤 떨어진 곳 건물 옥상에 한 놈 더 있습니다. 처리하세요.
눈과 귀가 아무리 많으면 뭐 하나. 하늘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나 하나만 못한데.
귓속말로 내 지시를 전달받은 한동석은 곧바로 눈앞의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망원경과 무전기를 들고 있는 쥐새끼를 배후에서 습격했다.
왕년에 야생 동물 도축 좀 해 본 솜씨로 단숨에 사람의 멱을 따 버린 그는 조심스럽게 시체를 정리하고, 망원경을 들어 내가 알려 준 장소를 확인했다.
곧 그가 엽총을 들어 목표 대상을 쏴 갈기자 꽤 멀리 떨어져 있던 놈의 머리가 퍽 터져 나갔다.
그의 엽총은 유해 조수 사냥용이라 장거리 사격용이 아니지만, 그 부분은 엽사로 각성하고 레벨을 올리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고 한다.
아이템과 스킬의 보조를 받는 각성자는 막말로 탈인간을 넘어선 탈인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 둘, 셋.
주변에서 총성이 울려 퍼지는 이유는 자신의 동료들이 총을 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크게 경계하지 않았던 놈들의 머리통이 순차적으로 사라졌다.
뒤늦게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다른 눈과 귀가 ‘무언가’에 당했음을 눈치채도 그때는 너무 늦었다.
이미 저격 포인트에서 벗어난 한동석은 내 보조를 받으며 번잡한 시내를 제집 안방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녔으니까.
그냥 높은 곳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며 주기적으로 특이 사항을 보고하는 게 전부였던 놈들은 자신들을 집중적으로 노리는 저격에 대응할 방법이 없다.
본대에 보고를 올려도 ‘지금은 다른 놈들 잡느라 그쪽을 지원해 줄 여력이 없다.’ 같은 소리만 들을 테고, 자신들이 직접 대응하자니 감시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된다.
사실 직접 대응하려고 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본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불시에 울려 퍼지는 총성. 총성보다 더 빨리 날아드는 탄환. 어디선가 총성이 울려 퍼졌다면 이미 동료 중 누군가는 죽었다는 얘기가 된다.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확실한 사실은 자신 또한 저격수의 암살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은 도피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게 바로 인간 사냥과 짐승 사냥의 공통점이기도 하고.’
사냥이 전매특허인 저격수들은 그런 식으로 상대를 압박해 왔다.
때로는 직접 날아드는 총탄으로, 때로는 귓가를 때리는 무시무시한 총성으로, 때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자신을 조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으로.
바로 그래서 단독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저격수가 무서운 거다.
충분한 화력과 희생을 감내할 수 있는 충분한 머릿수만 있다면 포위망을 형성해서 쉽게 처리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불가능할 때는 단 한 명의 저격수가 1개 대대를 멈춰 세울 수도 있다.
‘눈과 귀가 쪼그라들면 너희는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까?’
단거리 무전기로 통신한다고 해도 정보를 얻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고, 정보의 우위에 서지 못한다면 더 이상 상대를 앞지를 수도 없다.
그때부터는 실력으로 승부해야 하는데, 각성자와 실력 승부가 가능한 건 같은 각성자뿐이다.
‘놈들 중에도 각성자가 있겠지. 하지만 좀비를 경험치가 아닌 고기 방패 겸 사냥개로 쓴 시점에서 ‘강력한’ 각성자는 아닐 거다.’
좀비는 걸어 다니는 경험치와 DNA 샘플인데, 특히 저렇게 인간 사냥을 제대로 못 해서 무지성이나 다름없는 좀비들을 각성자가 내버려 뒀을 리가 없다.
쉽게 강해질 수 있는 수단이 눈앞에 있는데,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깊다면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좀비를 사냥해서 자신을 강화했을 터.
‘놈들이 보유하고 있을 각성자는 ‘생각만큼’ 그리 강하지는 않겠지.’
오히려 각성자에 대한 대응은 각성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당연한 상식도 없을 것이다. 각성자조차 부비 트랩으로 사냥하려 했던 안일한 놈들이니까.
-진가희 씨, 전방에 병원 건물 뒤쪽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 둘 보이죠? 굳이 처리할 필요는 없어요. 옆의 도로를 건너서 담벼락을 타 넘고 산책로를 통과하면 병동으로 진입할 수 있으니까요.
환자들의 정신 건강과 육체적 건강을 위해 산책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정원은 비록 겨울일지라도 훌륭한 자연 위장막이 되어 주었다.
다람쥐처럼 벽을 타 넘은 진가희는 특유의 왜소한 체구와 날렵한 몸놀림으로 단숨에 정원을 주파, 병동 내부로 침투했다.
저놈들이 환자들을 떠맡아 치료해 주고 있을 만큼 인격적인 놈들은 아니니, 아마 병동을 숙박 업소처럼 사용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병력 대부분이 외부로 빠진 지금, 텅 빈 병동은 뒷공작을 벌이기에 안성맞춤이다.
‘좀비 사태 초기에 약탈자와 각성 범죄자를 상대로 싸워 봤다고 했으니 이제 와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주저하지는 않겠지.’
그 부분은 팀원들의 강인한 정신력보다는 ‘그랬던 적이 있다’는 과거 행적을 믿는다.
살인은 처음이야 어렵지만 익숙해지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쉽게 할 수 있는 것이기에.
‘내가 이렇게 부려 먹혀진 적이 있어서 그런가, 사람을 이렇게 부려 먹어 보는 게 마냥 어색하지는 않네.’
역시 뭐든 경험이 중요한 것 같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장갑 구급차를 뒤쫓고 있는 헬조선 본대를 주시했다.
놈들은 창원에서 군수 물자를 독차지한 덕분에 무장 상태는 어지간한 정규군 못지않았으며 동원할 수 있는 장비나 전투원도 많았다.
장갑 구급차의 성능이 좋다고는 하나, 놈들이 작정하고 달려들어서 총과 폭탄을 퍼부으면 제아무리 튼튼한 장갑 구급차라도 조금 위험하다.
‘하지만 눈과 귀가 받쳐 주지 않는 너희도 결국 똑같이 독 안에 갇힌 쥐 신세야.’
한동석이 벌써 두 자릿수에 달하는 눈과 귀를 제거했을 때, 나는 슬슬 놈들의 병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지정했다.
“영역 지정.”
영역 내에 좀비와 적으로 가득 차 있다면 자칫 파괴당할 수도 있기에 섣불리 영역으로 지정할 수 없지만, 때마침 공교롭게도 놈들이 우르르 몰려 나간 탓에 빈집이 많이 생겼다.
위험 요소가 없는 빈집을 단돈 1원도 들이지 않고 통째로 꿀꺽하는 남자. 그게 바로 부동산계의 떠오르는 샛별이자 먹방 유튜버인 나 이승권이다.
“진짜 가두리 양식장이 뭔지 보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