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수복기 (6)
미국은 세계 최대 규모의 인종 용광로라고 불린다.
일단 겉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지라 그 어떤 인간도 종교, 인종, 문화, 성별, 사상, 국적 등으로 차별받아선 안 된다는 것을 국가적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미국과는 꽤 멀리 떨어진 동아시아의 작은 국가도 비슷한 별명을 가지고 있다.
바로 정치의 용광로라는 별명이다.
이 작은 땅덩어리에 모여 사는 인구만 무려 5천만에 달하며, 그 인구가 각기 다른 정치 이념과 사상을 품은 탓에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이 끊이질 않는 나라가 된 것이다.
오죽하면 이놈의 나라는 자국을 사랑하는 애국주의자들보다 다른 국가를 더 사랑하는 친미, 친일, 친중, 친러, 친북주의자들이 더 많을 지경이다.
좌우로 찢어진 상태에서 한 번 더 찢어지고 분열하고, 적의 적은 내 아군이라며 일시적으로 손을 잡고, 그렇게 엉망진창이 된 정치판은 5천만 국민이 참여하는 대난투였다.
종국에는 정치보다 종교를 더 신봉하는 광신도들, 정치고 나발이고 정부와 사회 시스템이 다 무너지고 멸망했으면 좋겠다는 무정부주의자들, 이왕 망하는 거 우리 손으로 망하게 해야 한다는 반국가 단체들까지.
짬짜면과 스까덮밥을 짬통 안에 때려 박고 민트와 초코를 같이 퍼부어서 믹서기로 시원하게 갈아 버린 듯한 이 총체적 난국은 급기야 끔찍한 존재들을 탄생시키고 말았다.
대표적으로 크게 셋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공인한 반국가 테러리스트 단체, 국 가를멸망시키는건뭐든자신있어 ‘헬조선’.
종교의 자유를 침해해선 안 된다는 헌법에 발이 묶여 끝끝내 뿌리 뽑지 못한 국내 최대 사이비 종교, 교 주님을찬양하는건즐거워 ‘새천년평화교’.
전쟁이 터지면서 국내의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도시부터 지방의 뒷골목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는 신흥 범죄 조직 K-카르텔, 불 법암시장을운영하는게제일좋아 ‘대한제국파’.
북한이 사라진 직후, 통일 대한민국의 새로운 골칫거리이자 3대 암 덩어리로 분류된 세 조직은 그들이 내세우는 가치관이나 조직의 목표만큼이나 그 특징도 뚜렷했다.
국가의 멸망을 바라는 밑바닥 인생들이 망해 버린 북한의 간첩들과 합류하면서 그들로부터 불법 무기와 약물, 폭발물 등을 다루는 위험한 지식을 전수받았다. 따라서 그들의 상징은 ‘무력’이었다.
반면 새천년평화교는 종교를 기반으로 두고 있는 만큼 순수하게 많은 머릿수를 이용해 압도적인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 냈으며, 이를 이용해 유권자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을 압박하거나 기업 총수들과 뒷거래를 하기도 했다. 이들의 상징은 ‘여론’이었다.
마지막으로 대한제국파는 전국 곳곳에 퍼진 자신들만의 사업장(암시장)을 운영하는 것으로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음지를 형성했다. 국내의 더러운 돈의 8할 이상을 독차지했다고 알려진 그들의 상징은 당연하게도 ‘자본’이었다.
여론의 사이비 종교, 자본의 범죄 조직은 굳이 창원에 자리 잡을 이유가 없다. 창원은 그들이 손쓰기 힘든 구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력을 표방하는 테러리스트 조직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들은 좀비 사태가 벌어진 것과 동시에 창원의 심장부로 침투했다.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자들은 모조리 좀비의 제물로 바쳐 자연적인 고기 방패가 되게끔 손을 썼으며, 군대와 경찰보다 먼저 대량의 군수 물자를 확보한 그들은 손쉽게 창원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거슬리는 놈들은 직접 나설 것도 없이 좀비 떼를 유도해 서로 맞붙게 하면 쉽게 공멸시킬 수 있었다.
아무런 피해 없이 힘을 키우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조직의 규모를 확장하는 것쯤 식은 죽 먹기. 헬조선이라는 조직은 마침내 대한민국 최대 공업 도시인 창원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에 성공했다.
“지부장님, 거제도에서 올라온 군바리들이 속천부두 방면으로 침투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얼마 전에 정찰하러 기어들어 왔던 그 쥐새끼 놈들의 본대인가?”
“아직 저들의 근거지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침투한 인원은 기껏해야 2개 중대 수준이니 본대는 아닐 겁니다.”
“무장 수준은?”
“몇 대의 전술 기갑 차량을 동원한 게 전부인, 사실상 알보병이나 다름없는 보병 중대입니다.”
부하의 보고를 받던 남자, 헬조선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간부이자 창원 지부장을 맡고 있는 심호연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그놈의 전술 기갑 차량은 개뿔, 최신예 전차랑 장갑차는 죄다 북한 땅으로 올려보낸 걸 모르는 새끼가 없는데.”
말이 좋아 전술 기갑 차량이지, 그냥 최소한의 방탄, 방편 기능을 갖췄을 뿐인 험비나 수송 트럭일 것이다.
그마저도 바다 너머로 수송하기 어려우니 거제도에 남아 있는 작은 바지선을 동원해서 몇 대 옮겨 놨을 뿐이다.
창원 곳곳에 자신들이 준비해 둔 온갖 함정과 고기 방패를 무식하게 힘으로 뚫을 작정이라면 최소 전차와 장갑차을 추가한 기계화 보병 정도는 돼야 한다.
그나마 보병들의 무장 수준은 봐줄 만한 데다 미군도 함께하는 걸 확인했으니 아주 당나라 군대는 아닐 터.
“놈들이 우리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은?”
“일말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앞서 창원에 침투했던 놈들의 수색조에게 들키지 않도록 고기 방패들은 미리 우리에 넣어 두었고 우리 애들도 각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도록 명령을 내려 두었습니다. 만약 발각되었다면 저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을 끌고 들어왔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 그럼 역시 물자 회수가 놈들의 목적인가?”
창원은 타 지역에 비해 군수 물자를 손쉽게 확보할 수 있는 곳이다.
군수 물자 생산 설비 대부분이 이 지역에 밀집되어 있으며, 그밖에도 군수 물자 생산에 필수적인 전문 인력과 제작 도면, 원자재까지 모두 갖춰져 있는 만능 무기 생산지 아닌가.
게다가 식량과 식수도 딱히 부족하지 않다. 창원 내부에는 크고 작은 저수지들이 있으며, 창원 시민과 근로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입점한 상가 건물들이 상당히 많았다.
편의점이나 약국, 마트와 병원, 호텔과 공장 기숙사 등등.
다양한 물자를 자체적으로 보급하면서 거점으로 삼을 수 있는 요충지가 상당한 천혜의 요새가 바로 이곳이다.
아직도 국가와 사회라는 시스템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병신들을 쳐 죽이고, 이 지상 낙원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개조하면서 유유자적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러기 위해 자신들은 오랫동안 준비해 왔고, 이제는 그럴 힘이 있으며, 머지않아 위에서 지령이 내려오는 대로 실행할 것이다.
인류가 내세운 가식적인 질서 따윈 필요 없다.
역겨운 법치와 알량한 도덕적 관념에 목맬 필요도 없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몸이 끌리는 대로 본능에 따라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에 억압받고 있던 자신들을 위해 친절하게도 이 세상이 먼저 망해 주었다. 그 눈물겨운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 나라를 좀먹고 있던 위선자들을 남김없이 쳐 죽이고 끌어내려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지부장님!”
한창 분위기 좋을 때에 문을 박차고 들어온 헬조선 단원의 모습에 심호연은 절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지금 중요한 얘기 중인데 경우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부장님께서 꼭 확인하셔야 하는 긴급 지령이 내려왔는지라…….”
지부장씩이나 되는 심호연에게 긴급 지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헬조선 내에서 단 한 명뿐이다.
“단장님께서 긴급 지령을 내리셨다고? 그분은 지금 강원도에 계신 거 아니었나?”
헬조선 본대는 좀비 사태가 발발한 시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강원도에서 타 세력과 피 말리는 영역 싸움을 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하지만 헬조선의 진짜 목적은 그런 놈들과 드잡이질을 하며 산중의 왕으로 거듭나는 게 아니라, 무려 수백만 위선자들이 자리 잡아 저들끼리 하하 호호 잘살고 있다는 대구를 침공하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
때문에 심호연에게도 준비가 되는 대로 단원들을 이끌고 북상해서 대구 침공 작전에 합류하라는 지령이 내려왔었는데, 이 판국에 긴급 지령이 내려왔다는 것은 내부적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음을 의미했다.
자칫 판도의 흐름이 크게 바뀔 우려가 있는 긴급 지령은 어지간하면 잘 내리지 않는 게 헬조선 단장의 스타일이었으니까.
“이리 내!”
말단으로부터 긴급 지령서를 낚아챈 그는 헬조선 조직 내에서 자체적으로 정립한 암호문이 빼곡히 쓰인 난잡한 내용을 천천히 해독했다.
-대구 내 정보원으로부터 첩보 입수.
-강력한 신흥 세력 출현 확인.
-대구 시청과 군부도 통제에 실패하여 접근 방식을 변경한 신흥 세력임.
-신흥 세력의 구심점이자 리더는 매우 강력한 각성자로 확인.
-군부 내 정보원에 의하면 해당 인물은 ‘북진군’ 출신이며 세력 확장에 매우 관심이 많음.
-소수 정예 각성자 팀을 구성해 단독 작전으로 구미의 ‘괴물’을 처리했음을 확인.
-현재 해당 인물은 ‘김해’로 복귀하였으며 다음 행보는 크게 둘로 추정하고 있음.
-A : 대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포항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 및 교섭 시도
-B : 창원 점거 및 군수 물자 확보
-창원 지부장은 해당 인물을 각별히 경계하고 돌발 상황에 대비하라. 또한 해당 인물을 처리하기 전까지 대구 침공은 무기한 보류한다.
긴급 지령 전문을 확인한 심호연은 뭐라 표현하기 난감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지령서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똥물을 뒤집어썼다.’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다른 건 다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북진군이 언급된 시점에서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북진군 출신들은 대부분 수도권에서 병원 신세를 지거나 통원 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사태가 발발하자마자 거의 사망했을 텐데.’
그런데 기어이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조직에서도 경계할 만큼 강력한 각성자가 되어 대구에서 큰 활약을 하고, 이제는 창원의 바로 옆인 김해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어쩌면 벌써 창원을 노리고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동안 창원 내에서 힘을 기르느라 타 지역에 너무 관심이 없었다.’
창원이라면 이미 그들의 안방이자 홈그라운드나 다름없으니까 침입자 정도는 쉽게 요격할 수 있겠지, 잠시나마 그런 안일한 마인드로 조직을 운영해 왔음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였다.
그런데 하필 북진군 출신이라니. 그 아스팔트 도로에 눌어붙은 껌딱지보다도 더 질기고 끈덕진 놈들 중 하나가 버젓이 살아서 창원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니.
심호연은 북진군 출신과 직접 접한 적이 없었음에도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북한 공작원이나 그들과 연계했던 국내 간첩이라면 모두가 북진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오직 빨갱이 하나만을 족치기 위해 5년간 북한 전역의 땅굴을 밑바닥까지 싹싹 핥아먹고 다녔다던 개미핥기들!
다른 건 괜찮지만 빨갱이만은 용납할 수 없다던 그 정신병자 집단 출신이라면 단 한 명이라도 상황이 매우 심각해진다.
심지어 나라가 망하기 전에도 헬조선은 북진군 출신 퇴역병들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실제로 서울의 모 대학 병원을 테러했다가 마침 그곳에 입원해 있던 북진군 출신 환자가 ‘빨갱이가…… 말대꾸?!’라는 이상한 말을 외치면서 당시 투입되었던 단원들을 모조리 참수해 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지금 당장 전초 기지에 나가 있는 애들한테 연락 돌려.”
“어떤 내용으로……?”
“당연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모든 침입자를 격퇴하라는 내용이지, 이 새끼야! 바다 건너온 저 머저리 새끼들이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위험한 놈이 지금 창원을 노리고 있다고!”
심호연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똥물을 스루 패스한 단장이 원망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