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투쟁기 (50)
이쯤 되면 내 행보에 루즈함을 느낄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놈, 좀비들이랑 잘 싸우다가 갑자기 거점 내실 다지기에 들어가니 엄청 답답하네’ 같은 민심은 충분히 우려할 만하니까.
하지만 최신 거점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나를 지지하는 거점 일원과 거점 방위자의 긍정적인 평가는 무려 100%에 달했으니, ‘이승권은 잘하고 있다’라고 자화자찬해도 딱히 양심에 찔릴 일은 없다.
내 통치는 완벽하니 이 문제는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다.
그보다 나는 다른 문제 때문에 1년 중 가장 춥다는 계절의 칼바람을 몸소 느끼면서도 한창 고민 중이었다.
‘현재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금처럼 김해 내부에서 자급자족 시스템을 돌리면서 각종 식료품과 생필품, 그리고 군수품을 생산하며 유비무환 정신으로 무한 존버하는 것.
부족한 노동 인력과 방위 인력은 지속적으로 대구에서 유입되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김해 전역의 인프라와 일터가 복구된다고 해도 사람이 부족할 일은 없다.
대신 단점을 꼽자면 사람이 늘어날수록 대구처럼 지역 단위의 ‘좀비 웨이브’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대구는 우리가 변종 문제를 해결해 준 덕분에 더 이상 과한 인력 낭비로 대구 외곽을 방어해야 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외부에서 유입된 좀비들의 꾸준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은 좀비가 알아서 찾아간다, 이 부분은 강대현 교수의 추측대로 다수의 인간이 내뿜는 생명력과 그 생명력을 쫓는 좀비, 그리고 인간을 그냥 두지 않는 시스템의 강제성이 뒤섞인 결과물일 것이다.
그러니 내가 책임지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내 영역이 넓어질수록 외세의 침입 빈도가 더욱 잦아지고 위험성도 커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이것만큼은 나도 피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무장을 나눠 주는 것으로 대처할 생각이다. 거점 방위 무기도 만능은 아니니까.
어쨌든 이번 겨울은 거북이처럼 웅크린 채 내실을 다지고 미래에 대비하는 것. 이것이 첫 번째 계획이다.
두 번째 계획은 당연히 첫 번째 계획의 정반대에 해당한다.
공격적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좀비들이 특정 지역에만 몰려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인원을 최대한 많이 분산시키는 거다.
그러면 각 영역마다 대구처럼 어마어마한 수의 좀비 대군에게 노려질 일도 없고,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도 있다. 또 중요도가 그리 높지 않은 영역이 있다면 좀비 놈들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면서 후퇴하는 ‘더미’처럼 사용할 수도 있다.
좀비들과 충분히 싸워 본 경험이 있는 각성자와 군인들, 그리고 꾸준한 훈련과 가벼운 전투로 실전 감각을 익힌 거점 일원 예비군까지 동원한다면 효율적인 방위 전선을 짜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결국 이 사태는 장기전으로 흘러갈 거다. 안전한 거점과 넉넉한 물자, 그리고 강력한 무력과 조직의 단합력을 두루 갖추지 못하면 인간이 살아남을 방법은 없어.’
좀비 놈들은 먹지도, 쉬지도 않고 무한한 체력과 끈질긴 생명력으로 움직이는 괴물들인 것에 비해 인간은 너무나도 약하다.
당장 이번 겨울만 해도 아직 우리가 되찾지 못한 영역 어딘가에선 좀비가 아니라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죽어 나가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이러니까 고민할 수밖에 없지.
‘안전빵? 아니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치킨은 양념 반 후라이드 반 같은 훌륭한 제3의 선택지가 있는데, 왜 이런 문제는 항상 선택지의 폭이 좁은 걸까.
‘동전 던지기로 선택할까? 아니야, 그건 너무 무책임해. 리볼버에 총알 한 발 넣고 러시안 룰렛? 살짝 끌리는데?’
머리가 맑은 상태로 고민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 일부러 찬바람을 맞으며 열심히 뇌를 혹사시켜 봤지만, 어느 쪽도 쉽사리 선택할 수 없었다.
‘역시 좀 더 전문적이고 체계가 확실히 잡힌 무력 집단이 더 필요해.’
내겐 이미 각성자로 구성된 거점 방위자와 일반 군인들로 구성된 병력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지역 단위로 놓고 보면 이마저도 한참 부족했다.
남들 눈에는 충분할지도 모르겠으나, 최소한 내 성미에는 차지 않는다.
내가 개똥같이 계획을 세워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으며,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쑤라는 명령을 내려도 불평불만 한마디 내뱉지 않고, 나와 함께 이 혹독한 좀비 아포칼립스 시련을 능히 이겨 낼 수 있는 막강한 정예 병력이 필요하다.
그런 정예 병력을 어디서 구할 수 있지?
“북쪽.”
나는 고개를 들어 북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묻거든 북쪽을 보게 하라. 대부분의 해답은 그곳에 있으니.
구미에서 우연히 접한 라디오를 통해 북진군 출신들 중 일부가 살아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내가 아는 북진군 출신이라면 몸을 숨기고 방어하기도 쉬운 강원도 산골이나 한반도 북부 지역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세 번째 계획, 문제고 나발이고 그냥 힘으로 다 털어 버리고 북진해서 옛 동기를 모은다.”
이승권의 명언 수첩 다음으로 가장 많은 페이지를 사용한 계획 수첩에 이 단순무식한 세 번째 계획을 써넣었다.
북진행은 대구나 부산행보다 훨씬 더 힘들고 많은 준비가 필요한 장기간 원정이 될 테니 본진의 방비를 허술하게 해 두면 안 된다.
‘공격적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방어적으로 내실을 다진다’, 누가 이런 짬짜면 같은 계획이 불가능하다고 했나? 내 명언 수첩에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더 기다릴 것 없이 김해 시내에 흩어져 있는 각성자 몇 명을 소집했다.
-각성자 1팀 전원 집합.
김해에 남아 있는 잔존 좀비들을 소탕하기 위해 지금쯤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을 각성자 팀 중 1팀에게만 따로 귓속말을 보냈다.
1팀은 이번에 새롭게 구성한 각성자 팀이었다.
우선 야전 의료 행위가 가능한 채성아, 나 다음으로 강한 김진경 경장, 근접전에서 없어선 안 될 프로 칼잡이 진가희, 사냥과 추적, 지원 및 야전 상식이 풍부한 만능 엽사 한동석으로 구성된 최정예라고 할 수 있다.
덧붙여서 박지찬, 이형진, 오함마, 박마춘 아재 등은 외부 원정보다는 ‘시가지 방어’에 더 어울린다고 판단해 2팀으로 배정하고 김해 방위를 일임했다.
그 외 각성자들에게는 일종의 예비 팀으로서, 영역 내에 머무르며 자잘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전투가 벌어지면 즉시 나서는 ‘소방수’ 역할을 맡겼다.
예전에는 부산만이 아니라 김해 내부에 있는 좀비들을 언제 다 처리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김해도 대구처럼 좀비 한 마리 없는 클린 도시로 탈바꿈하기 직전이었다.
약 1시간쯤 지났을까, 클린 김해 조성에 지대한 공을 세운 1팀이 내 연락을 받고 하나둘씩 모여들자, 나는 그들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창원, 포항. 둘 중 하나만 골라요.”
밑도 끝도 없이 두 도시를 선택지로 제시하자 팀원들이 서로 눈빛 교환을 하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미 김해 내부 문제는 착실하게 처리되고 있는 상황이니, 내가 미래를 위해서 두 지역의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확장을 꾀하려 한다는 걸 저들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부산에 도사리고 있는 좀비들의 수가 상당하다고 들었는데, 그쪽은 당분간 안 건드립니까?”
“김해 내실을 착실하게 다지고 나면 부산도 정리 작업에 들어가겠지만, 지금 당장은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쪽 지역은 좀비들의 수가 제법 많지만, 당장 김해로 넘어올 방법이 없어서 인간 사냥 경험을 축적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부산역을 점거하면서 김해와 이어진 교각이 복구되긴 했으나, 그곳에는 ATX와 군 병력 일부를 배치해서 김해로 넘어오려는 좀비들을 꾸준히 처리하고 있다.
“그럼 선택지에 포항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미 김해와 밀양을 확보했고, 대구를 동맹 지역으로 삼았죠. 거기에 포항까지 영역을 확장시킨다면 완벽한 경남 지방 포위망을 형성해서 향후 부산과 양산, 울산의 좀비들을 편하게 소탕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해당 지역에서 소수나마 외부로 새어 나가는 좀비들의 어그로를 여러 지역으로 분산시키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럼 창원이 선택지에 있는 건 가장 중요한 김해가 부산발 좀비에 의해 샌드위치 신세가 되는 걸 막기 위해서입니까?”
김진경 경장의 질문에 나는 따봉을 해 주었다. 이승권표 10따봉을 적립해서 가져오면 경품을 줄 예정이다.
“맞아요. 부산의 좀비들을 당장 소탕하자니 아직 우리 준비가 덜 됐죠. 그래도 낙동강 덕분에 어찌어찌 방어선이 유지되고는 있는데, 창원은 그런 게 없잖아요?”
창원과 김해는 바로 옆에 찰떡처럼 붙어 있는 공업 지역 콤비라서, 기껏 힘들게 김해 내부를 정리하고도 창원발 좀비 웨이브를 막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
그러니 창원에 추가적인 영역 확보를 하고, 놈들의 어그로와 웨이브를 막을 방파제를 세우는 것이 창원 원정의 목표다. 아니면 김해처럼 그 지역도 확실하게 접수하거나.
“그러니까 김해의 내실 다지기가 끝나는 대로 편하게 부산 지역을 정리하려면 대좀비 포위망 형성에 필수인 포항을 확보해야 하고, 반대로 당장 급한 불을 끄고 옆구리 방파제를 쌓으려면 이웃 지역인 창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군요.”
“그래서 선택지부터 제시한 거예요. 우리 조직 최정예 팀원들의 의견을 들어 보려고.”
이 작전들을 끝낸 뒤에 다 함께 우당탕탕 북진(장기 원정)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얘기는 아직 꺼내지 않기로 했다. 벌써부터 팀원들의 피로감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으니까.
“창원부터 갑시다.”
가장 먼저 얘기를 꺼낸 건 한동석이었다.
내가 그 이유를 물으니 그는 새삼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랑 이 꼬맹이가 대구에 있을 때 포항발 소식이 종종 들려왔는데, 그쪽 상황이 좀 안 좋긴 해도 대구처럼 어찌어찌 버티고 있다고는 합니다. 이런 말 하면 좀 이기적이고 쓰레기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거기서 우리 대신 좀비들 막아 주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 입장에선 당장 옆구리의 급한 불부터 먼저 끄러 가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창원은 김해의 2배에 달하는 인구를 자랑하는 공업 도시였고,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까지 내려온 피난민들 사이에서 발생한 좀비들이 창원까지 점령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몇몇 거점 일원들로부터 좀비들이 그쪽 방면에서 곧잘 나타났다는 보고도 수차례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는 김해에 자리 잡은 우리 조직의 규모가 대구에 비해 개미 눈곱만큼 작은 수준이라 ‘지역 단위’의 좀비 웨이브에 노출되지 않았을 뿐, 김진경 경장의 말대로라면 조만간 창원을 통해 대대적인 좀비 공세가 들어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사실 나도 포항보다는 창원을 더 급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견은 없었다.
“포항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좀 더 버텨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네요.”
의료인이라 그런지 다소 씁쓸한 선택을 내린 채성아도 결국 창원행에 손을 들어 주었다.
진가희는 처음부터 우리 의견에 따를 생각이었는지 딱히 이견을 표할 기색은 않았다. 팀원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리니 연장자들의 의견을 따르겠다는 기특한 생각이라도 한 걸까?
“창원이 더 가까운데 굳이 포항 다녀왔다가 다시 창원으로 가면 너무 피곤하잖아요.”
……그냥 귀찮은 게 싫은 꼬맹이였다.
“우리가 창원으로 가는 김에 남는 병력을 조금 서쪽으로 움직여서 전진 배치해 두죠. 혹시 모르니까요.”
“그게 좋겠습니다. 안 그래도 지난 한 달간 꾸준히 훈련시킨 성과를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체계가 잡힌 군인들이 좀비들과 얼마나 잘 싸울 수 있는지 알게 될 겁니다.”
김진경 경장은 자신이 직접 훈련시킨 이들이 드디어 활약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 자랑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김해에서 창원까지의 물자 보급, 그리고 병력 이동 및 배치는 박지찬 병장과 그 휘하의 군인 각성자들에게 맡겨 두기로 했다.
대략적인 계획이 정해지자 우리는 최종적으로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폭탄을 제거하기 위해 창원행을 결정했다.
어쩌면 이번에는 인간과 좀비 간의 대규모 전투가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희미한 불안감이 피어올랐지만, 그래도 움직여야만 했다.
정체된 끝에 현실에 안주해 버린 인간은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