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투쟁기 (49)
박명식 함장은 얼마 전 제주도에서 쫓겨나다시피 도망쳐 나온 뒤, 거제도 조선소에서 어렵사리 재정비와 재보급을 주도하고 있었다.
거제도는 일단 교각 몇 개로 내륙과 이어진 섬답게 사태 초기에도 ‘비교적’ 안전했는지 내부 인프라는 크게 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지역 어민들이 보유하고 있던 어선을 비롯해 수많은 배들이 이미 다른 섬으로의 피난에 쓰였는지 단 한 척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건 거제도 내부의 물자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판단하자마자 챙길 수 있는 건 모조리 챙겨서 안전한 외딴 섬으로 도망친 것이리라.
한반도는 무려 3300개가 넘는 섬을 보유하고 있다. 서해와 남해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몸을 숨기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돌겠군. 하다못해 다른 섬으로 도망칠 거라면 교각은 그대로 놔둘 것이지…….”
박명식 함장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주름살을 손으로 꾹꾹 문지르면서 한탄했다.
거제와 통영을 잇는 거제 대교, 신거제 대교는 ‘전쟁 메뉴얼’에 따라 군부대가 진즉에 폭파시켜 버렸다. 평소에는 게으른 후방 부대가 얼마나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물론 그 거대한 다리가 완전히 파괴되어 있던 덕분에 해군이 빙 돌아오는 일 없이 거제도 내부 조선소에 무사히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래도 지상 병력이 자유롭게 내륙을 오갈 수 없게 된 것은 뼈아팠다.
거제도에서 김해와 이어지는 거가 대교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았는지라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려면 무조건 배를 써야 하는 상황이다.
‘거제도 내부 물자는 대부분 피난민과 탈영병들이 가지고 날랐다. 결국 주요 물자를 보급하려면 내륙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함장실에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탁탁 두들기던 그는 현재 독도함과 휘하 군함들이 운용할 수 있는 지상 병력을 계산해 보았다,
한계까지 쥐어짜 내도 200이 한계다. 그 이상으로 병력을 차출하면 군함과 조선소, 또 독도함에 몸을 의탁한 VIP와 고위 관료, 민간인들은 누가 지킨단 말인가?
그렇다고 알보병 200에게 전술 기갑 차량 몇 대 내어 주고 내륙에 밀어 넣는다고 한들, 그들이 무사히 물자를 가져와 주리란 보장은 있나? 내륙 상황을 보면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그나마 조선소는 멀쩡하게 남아 있어서 어떻게든 군함의 상태를 살피고는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우선 원자재, 예비 부품, 전문 인력, 전부 다 부족하다. 또 미군까지 포함해서 최소 수만 명이 조선소 인근에 머무르고 있는 지금, 가만히 있기만 해도 숨 쉬듯이 식량과 식수가 소모된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는 돈 먹는 하마였기에, 이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다시 제주도를 탈환하려면 전시 최전방 부대에 맞먹는 수준의 막대한 보급과 지원이 필요하다.
어마어마하게 산재한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함장실의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보고드립니다! 조금 전 미 해병대 측에서 휴대용 대공 미사일을 사용한 것이 포착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들린 희미한 폭음이 그거였나? 스팅어라도 쏜 모양이지?”
“예, 관측반에 의하면 스팅어였다고 합니다.”
“그래. 아니 잠깐, 지금 이 상황에서 대공 미사일을 발사할 이유가 있나? 하늘에 적 헬기가 날아다니는 것도 아닌데.”
제주도 근처였다면 중국군이 공격 헬기나 드론을 내보냈을 가능성은 있다. 당장 자신들만 해도 정찰 헬기를 내보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곳은 제주도에서 꽤 멀리 떨어진 거제도인 데다 내륙은 괴물들에게 완전히 점령당해서 하늘을 날아다닐 만한 게 없다.
그나마 거제도와 가장 가까운 부산에 국군 비행단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부산은 서울 다음으로 처참하게 함락된 비운의 도시였다. 드론, 헬기, 전투기, 여객기 등등 무엇 하나 날아다닐 수 없다. 애초에 사람도 없으니까.
“동맹국인 한국 소속 기체를 미군이 식별하지 못할 리도 없고 당연히 섣불리 격추할 이유도 없을 텐데. 혹시 제주도에서 날아온 기체였나?”
“그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미식별기가 날아온 방향은 내륙이었으며, 사전 통보 없이 드론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계 중이던 미 해병대가 ‘자폭기’, 혹은 그에 준하는 위험 기체로 보고 격추한 것 같습니다.”
“우리 군이 전쟁중에 ‘자폭기’ 같은 걸 쓴 적이 있던가?”
“제가 아는 한 없습니다.”
부관의 말에 박명식 함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와 군부에서도 필요 이상의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해 보병용 정찰 자산인 개인 운용 드론을 도입하기는 했지만, 자폭기 같은 건 고려하지도 않았다.
기껏 그런 비싼 놈을 만들어서 일회성으로 적에게 꼬라박아 아까운 돈을 태우느니, 차라리 싸게 먹히는 멍텅구리 폭탄과 강력한 미사일을 한 발이라도 더 찍어 내고 말지.
“남쪽도 아니고 북쪽에서 미식별 기체가 내려왔다면 민간인이 운용하는 사제 드론일 가능성도…… 아니, 드론보다 훨씬 빠른 속도라고 했었지. 자네는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할 것 같나?”
“솜씨 좋은 기술자에 의해 이런저런 개조를 거치면 사제 드론도 무시 못 할 속도로 날아다니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내륙에서 바다를 건너 거제도까지 도달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지, 배터리나 통신 범위 문제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미 해병대에서 격추한 미식별 기체의 크기가 일반적인 사제 드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고 합니다. 관측반의 추정으로는 못해도 성인 남성을 거뜬히 태우고 날아다닐 수 있는 크기였다고……”
“그정도면 자폭기라고 경계할 만하겠어.”
진짜 자폭기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만한 크기에 그만한 속도로 미식별 기체가 아군 경계 범위 내에 날아들었다면 어떤 군인이라도 선조치 후보고를 할 테니까.
“그래도 이것 하나는 확실해졌군. 이런 시국에도 그런 걸 운용할 수 있는 전문가나 어떤 세력이 우리 머리 위에 존재한다는 것. 물자 징발 팀을 내륙으로 보내는 김에 접촉을 시도해 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쪽에서 먼저 저쪽의 기체를 격추해 버렸으니, 저쪽에선 당연히 우리를 적대하지 않겠습니까?”
“우린 정규군이고 저쪽은 잘 쳐줘도 일개 민간인 세력일 게 뻔해. 거기에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잖나. 여차하면 힘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야.”
이제 와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지만 자신들은 세계 최강의 군대인 미군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
정작 그런 미군도 재정비와 재보급이 간절한 상황이라 제주도에서 함께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중국군이 없는 한반도 내륙이라면 사정이 다를 터.
그리고 VIP가 박명식 함장에게 따로 위치 정보를 제공한 ‘군수 물자 비밀 보관 시설’을 확보하려면 좋든 싫든 어차피 내륙으로 들어가야 한다.
거제도에서는 빈 깡통만 찼지만 가까운 창원이라면 아직 여유가 있을 테니까.
도망칠 시간이 충분했던 섬과 달리 내륙에선 그 난리통에 군수 물자를 건드릴 사람이 없었을 터.
“그리고 혹시라도 내륙에서 접촉한 세력이 아군이라면 이쪽이 겪고 있는 문제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일단 미군과 함께 내륙으로 보낼 병력을 차출하고 작전을 논의하는 자리를 가지자고 전달해.”
“그 외에 달리 전달하실 사항이 더 있으십니까?”
“자세한 건 논의할 때 내가 직접 말하지. 우선 우리 애들부터 먼저 준비시켜서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게 해.”
“예.”
부관이 경례를 한 뒤 함장실을 나가자 박명식 함장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혼란스러운 시국을 틈타 활동을 재개한 반국가 단체만 아니면 좋겠는데……”
북한을 완전히 끝장내고 종전 선언을 한 지 1년이나 지났지만, 대한민국은 이렇게 되기 전부터 크고 작은 문제들 때문에 끙끙 앓고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북한을 옹호하는 빨갱이 집단과 그냥 이 나라의 모든 것이 싫은 반국가 단체가 서로 연합하여 결성한 지하 조직 ‘헬조선’이 있다.
국가에서 공인한 회색 분자(테러리스트)들이 간첩인 양 일반인으로 위장하여 치밀하게 점조직 형태로 활동해 왔는데, 이 때문에 경찰과 방첩 기관이 아무리 꼬리에 꼬리를 잡아도 완전히 뿌리 뽑기 힘든 영악한 놈들이었다.
그 외에는 2차 남북 전쟁이 터지자마자 반전 운동을 벌이며 국민들을 선동한 사이비 종교 단체나, 국정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각종 흉악 범죄를 저질러 온 범죄 조직 등이 있다.
그나마 국가가 멀쩡할 때는 어떻게든 법과 절차를 따져 가며 힘들게 때려잡았지만, 사회 시스템이 완전히 정지한 지금이라면 놈들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특히 뒤가 구린 놈들일수록 쉽게 찾기 힘든 강원도 산골이나 북한 땅으로 많이 숨어들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괴물, 중국군, 이제는 잠재적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온갖 적대 세력까지 생각하니 박명식 함장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지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우선 당면한 문제에만 집중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미군과의 회의 준비에 들어갔다.
자신들만 병력을 차출할 게 아니라, 미군들도 공평하게 병력을 차출해서 내륙으로 보내려면 최대한 저들을 설득해야 한다.
설마 ‘북진군 출신’까지 미래의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원인이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채 그는 회의에 들어갔다.
* * *
“이게 그쪽 소유 공장, 아니 공업 단지인가?”
“그런 셈이죠.”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서 일하길 원하고.”
“그런 셈이죠.”
지금 내 앞에 서서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은 몇 주 전에 중장비를 동원해 우리의 북상을 도왔던 이만철 공장장이었다.
그는 좀비 사태 초기부터 자신의 동생과 직장 동료를 모두 규합해서 소규모 공단에 자리를 잡고 존버하고 있다가, 끝내 식량이 떨어지자 김해 시내까지 중장비로 밀고 들어온 전력이 있었다.
악착같이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상남자들 특유의 넘치는 에너지와 자신감으로 무장한 그들은 공장에서 무사히 좀비 사태의 첫 위기를 이겨 냈다.
그것도 모자라 다수의 각성자까지 만들어 낸 공장장 이만철, 그의 수완이나 리더십은 확실히 대단했다.
다만 그 난리 통에 급하게 대응하느라 식량을 구할 수 없어서 결국 내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그 점만 빼면 딱히 모자람이 없는 남자였다. 중간 관리직을 맡겨도 될 만큼.
“일전에 제가 보수로 지급해 준 식량이 지금쯤 거의 다 떨어지셨을 텐데요. 아닌가요?”
“……”
우리를 돕는 조건으로 계약해서 무려 3톤에 달하는 식량과 식수 등을 지급했었다.
그 외에도 우리 팀원들에게 개인 장비를 맞춰 주기 위해 이것저것 구입해서 최대한 저쪽의 편의를 봐줬지만, 그래도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었을 거다.
아무리 아껴 먹는다고 해도 저쪽은 원체 먹는 입이 많아서 3톤에 달하는 물자도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심지어 먹는 입 대부분이 활동에 엄청난 열량을 필요로 하는 각성자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또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식량이 부족해져서 김해 시내를 기웃거리며 우리 거점 인원들과 간간이 물물 거래를 했다는 보고는 이미 받았다.
저들도 눈치챈 것이다, 이제 식량이나 생필품을 구하려면 무조건 우리 거점을 통해야 한다는 것을. 아무리 이 잡듯이 폐허를 뒤져 봐도 나오는 건 대부분 썩어 버린 식품과 좀비들뿐이라는 걸.
“그 많은 식구들이 겨울을 나려면 제가 지급해 준 식량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했겠죠. 상점창에서 구입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테고요.”
“부끄럽게도 맞는 말이야. 어떻게든 자급자족을 목표로 움직여 봤지만, 애당초 우리가 잘하는 게 닦고 조이고 힘쓰는 일이다 보니 그런 쪽으로는 영 맹탕이더군.”
“그러니까 제가 그 문제를 해결해 드리죠. 앞으로는 이 공단에서 머무르며 일하시고 그에 걸맞은 보수 형태로 식료품과 생필품을 배급받으시면 됩니다. 물론 신변의 안전도 보장해 드리죠.”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순수 무력으로는 그쪽을 압도하고 있었는데, 이렇게나 빨리 상황이 역전될 줄이야. 그래서 우리가 정확히 뭘 하면 되겠나?”
그의 말투를 보니 거의 다 넘어왔다.
“우리도 일단 다른 지역에서 능력 있는 인재와 노동자들을 대거 이주시키긴 했지만, 그래도 이쪽 분야 전문가들을 확보하는 건 어렵더라고요. 남들보다 배 이상의 보수를 약속할 테니 공장장님께선 이 공단을 운영하시면서 우리 거점에 필요한 물건들을 납품해 주세요.”
“가볍게 만들 수 있는 농기구나 보호구, 무기, 이런 것들 말인가?”
“그런 것도 있으면 좋지만, 우리가 원하는 건 군수 물자예요.”
탄약, 폭탄, 총화기, 대포, 장갑 차량 기타 등등.
본래는 창원 공단에 다수 자리 잡고 있는 군수업체를 내 영역으로 삼아서 해결하려 했지만, 타 지역까지 진출하기엔 아직 우리의 ‘화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90% 이상이 군필자인 대한민국 남성들은 총 한 자루만 쥐여 줘도 곧바로 병력화할 수 있지만, 정작 지급해 줄 총과 탄약이 없는데 어떻게 병력화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언제까지 위험한 좀비와 약탈자 무리를 상대로 냉병기만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각성자들에겐 딱히 문제가 되지 않지만, 최소한 일반인으로 구성된 병력은 무조건 총기로 무장시켜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군수 물자를 제조해 본 경험도 없고, 그럴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네만.”
“각성하셨잖아요. 관련 제품들을 만들어 낼 스킬이나 제작 도면 같은 걸 얻으셨을 텐데요? 혹은 그걸 얻을 방도가 있거나.”
“……예전부터 느꼈지만 자네는 눈치가 상당히 좋군.”
“평범하게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좀비 사태가 벌어지자마자 훌륭한 무기와 방어구를 뚝딱뚝딱 만들어 냈는데, 그 정도 사실도 유추하지 못하면 눈치를 따지기 전에 멍청한 거죠.”
나는 사람을 믿지는 않지만, 이만철 공장장을 비롯해 그 휘하의 각성자들이 지닌 능력을 믿는다.
다행히도 내겐 이 공단 전체를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당분간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원자재를 충분히 공급해 줄 만큼 여유가 있다. 부족한 건 DNA 샘플로 구입하면 그만이고.
남은 건 공장의 반자동화(Semi-automatic)를 도와줄 전문 인력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안전하게 이번 겨울을 보내려면 여기서 일해야지 별수 있나.”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하세요. 이곳에서 구할 수 없는 건 제가 직접 상점창에서 구입해서 지급해 드릴 거고, 단순 노동 인력이 부족하다면 추가로 사람을 뽑아서 보낼 테니까요.”
“그거면 충분해. 앞으로 잘 부탁하지.”
그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내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이로써 또 다른 계약 형태로 이만철 세력이 우리에게 합류했다.
드디어 우리도 대구처럼 공장을 돌리며 부족한 것을 직접 생산하는 지역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됐다.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