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투쟁기 (48)
세상이 이토록 인정머리가 없다는 걸 좀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는데, 나는 벌써 예측하지 못한 사고로 2대째 떨군 나의 소중한 UCAV를 위해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부디 천국에선 배터리 소모도, 대공 방어 체계에 노출될 걱정도 없이 원하는 만큼 하늘을 날아다니길 바란다.
엎지른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듯, 이미 하늘에서 산산조각 나 버린 UCAV 또한 고칠 수 없다.
빠르게 미련을 떨친 나는 각성자 전용 ‘귓속말’을 통해 박지찬에게 미리 따 두었던 타격 좌표들을 전송했다.
내가 보낸 타격 좌표를 제대로 수신한 박지찬 병장은 곧 예정된 시간이 다가오자 포격을 시작했다.
대전기부터 냉전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포병들에 의해 사용되어 온 155mm 포는 빳빳한 포신을 치켜세운 채 우렁찬 포성을 터뜨렸다.
나는 선베드에 누워 선글라스를 쓴 채, 익숙한 폭발과 파괴의 하모니를 감상했다.
솟구치는 불기둥과 공장의 인화 물질로 인한 2차 폭발, 폭압을 견디지 못하고 하늘 높이 튀어 올랐다가 떨어지는 공장 건물의 잔해들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추억의 문이 스르륵 열린다.
아! 달콤쌉싸름했던 ‘개미핥기’ 작전의 추억이여!
당시 북진군과 함께 가장 먼저 북한 땅에 상륙했던 대한민국의 용감한 해병대 전우들은 어떻게 땅굴 속으로 숨어든 빨갱이들을 혁신적으로 조질 수 있는지 우리와 함께 고민했었다.
양키 독수리(공군)들의 1차 지원과 국군 참새들의 2차 지원으로 놈들이 가진 외부 방위 무기 대부분은 무용지물이 되었으나, 여전히 산속 땅굴에 숨어서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기열 북한군들이 한가득 있었던 것이다.
놈들은 빨간 맛을 외치다가 진짜 빨갛게 물드는 자신들의 국토를 보고, ‘수령님 존버하신다!’를 외치며 숨었는지라 밖으로 끌어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놈들을 조질 방법은 딱 하나, 전설적인 모 해병님의 명언에 의하면 그냥 폭탄을 있는 대로 갖다 퍼붓는 것만이 답이라고 하셨다.
바로 지금처럼.
155mm 고폭탄의 포격이 잠시 끊긴 틈을 타, 나는 또 한 대의 UCAV를 내보내서 공업 단지의 상황이 어떤지 살폈다.
화재로 인한 연기가 마구 치솟고 있는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좀비들은 개미 떼처럼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임이 느리고 외부 충격에 민감한 폭발형 좀비들은 대부분 첫 포격과 화재에 휘말려 자멸하듯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움직임이 재빠른 원거리 공격형 좀비들은 최대한 폭심지로부터 멀리 벗어나기 위해 엄청난 속도로 도망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연사 속도가 느린 155mm 견인포 몇 대로는 저놈들을 죄다 놓칠 게 뻔했다.
“감히 전우를 버리고 역돌격을 하는 괘씸한 찐빠짓을 벌이다니, 세상 모두가 용서해도 나 이승권이 너희를 용서치 않으리.”
준비된 각도로 조준하시고, 좌표를 향해 쏘세요.
그렇게 원격 명령을 내리자 ATX에 탑재된 105mm 곡사포들이 포성을 터뜨렸다.
155mm에 비하면 지형 파괴력이 그리 대단한 편은 아니나, 그럼에도 보병 상대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자랑하는 것은 변함없었다.
실제로 겁 없이 뉴밀양역을 노리고 침투했던 타락한 군인들의 혼을 쏙 빼놓는 데는 단 하나의 105mm 곡사포로도 충분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려 105mm 곡사포를 4대나 운용하고 있는 데다, 하늘에 띄워 둔 UCAV 덕분에 실시간으로 좌표를 따면서 예측을 넘어선, 예언에 가까운 정밀 타격을 자랑했다.
놈들이 도망치는 방향과 거리, 포탄이 도달하는 시간과 파괴력까지 내가 골 아프게 직접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좌표만 따서 적을 지정하기만 하면, 해당 적을 인식한 거점 방위 무기가 알아서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직접 보정하고 빵빵 쏴 댔으니까.
한술 더 떠서 힘들게 수동 재장전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눈 깜짝할 사이에 재장전과 포격을 끝내는 미친 연사력도 보여 주었다.
ATX가 보유한 105mm 포탄의 재고가 모두 떨어질 때까지,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무시 못 할 화력을 쏟아 낸 후에야 포성이 멈췄다.
안타깝게도 적을 모두 처리한 건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 저만한 머릿수가 튀어나온 건지는 몰라도, 벌집과 개미집을 동시에 들쑤신 것처럼 어마어마한 수의 좀비들이 공업 단지를 탈출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놈들의 눈물겨운 ‘작전명: 대탈출’을 3D로 관람하고 있자니 메말랐던 내 감수성도 조금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지적 좀비 시점에서 일어나는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는 한국 정서상 천만 관객을 찍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신파극이 있을지언정 국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놈들의 희생을 내 안락한 노후 생활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직접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영역 지정 스킬을 A-급으로 올려서 영역 통제 스킬을 활성화하려면 직업 숙련 포인트를 조금 더 모아야 하고, 결국 내가 직접 뛰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단 말이지.’
대대적인 포격으로 김해 공항 군인 각성자들과 경험치를 좀 많이 나눠 먹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주워 먹을 게 좀 남아 있다.
그냥 영역 지정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만약 포격으로 놈들의 머릿수를 대폭 줄여 두지 않았다면 저놈들을 나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무리다.
구미에서 벌였던 영역 전쟁은 어디까지나 영역 지배자 단일 개체를 팀원들과 함께 조지는 깜짝 이벤트였기 때문에 ‘비교적’ 쉬웠지만, 저 개미 떼 같은 놈들은 많아도 너무 많다. 아마 부산역에서 싸운 좀비들의 몇 배는 될 거다.
‘게다가 평범한 일반 좀비도 아니고 인간 사냥에 도가 튼 원거리 공격형 좀비와 폭발형 좀비 떼를 어떻게 나 혼자 싸워서 이길 수 있겠어?’
오히려 섣불리 공업 단지를 내 영역으로 지정했다가 머릿수도 줄여 두지 않은 저놈들에게 역으로 영역이 파괴당한다면?
나는 졸지에 아까운 영역을 잃는 것도 모자라 공업 단지를 두 번 다시 영역으로 삼을 수 없다는 뼈아픈 페널티까지 받았을 것이다.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패배가 확정된 도박을 할 이유가 없지.
하지만 이제 이쪽의 승리 확률이 대폭 올라갔으니 슬슬 테이블 위에 판돈을 올려도 될 것 같다.
마침 거점 지정과 영역 지정 스킬은 얼마나 다른지 궁금했던 참이다. 이제 그 실체를 확인할 차례다.
“영역 지정.”
-김해 남부 해안 공업 단지를 영역으로 지정하시겠습니까?
-경고 : 해당 지역에 다수의 적성체가 존재합니다.
“YES. YES. YES.”
본래 거점 지정 스킬은 특정 건물을 지정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스킬이었다면, 영역 지정은 문자 그대로 ‘영역’을 내 것으로 만드는 스킬이었다.
그 증거로 공업 단지 전체가 갑자기 눈부시게 빛나더니, 곧 지진이라고 착각할 만큼 익숙한 진동을 토해 냈다.
박살 나고, 무너지고, 불타고 있던 모든 공장의 잔해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리뉴얼되는 광경은 흡사 로봇의 변신 장면을 보는 듯했다.
지금까지는 고작 건물 한 채를 바꾸는 것에서 그쳤었는데, 이제는 지정하기에 따라 한 번에 수십, 수백이 넘는 건물들이 모두 스킬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예상대로 각 건물마다 거치는 리뉴얼 효과는 거점 지정 스킬보다 훨씬 못하군.”
기존에 거점 지정 스킬로 확보해 두었던 독립 건물들은 무려 고급 별장을 고급 호텔로 바꿔 놓을 만큼 무지막지한 리뉴얼 효과를 자랑했으나, 영역 지정으로 확보한 신생 건물들은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느낌이 강했다.
사이버펑크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SF풍 최신예 공장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리뉴얼된 공장들은 포격으로 파괴되기 전의 공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건물이 조금 더 커지고, 조금 더 깔끔해지고, 거점 방위 무기들이 여드름처럼 여기저기서 불쑥 돋아난 점을 제외하면 딱히 이렇다 할 만한 차이점은 없었다.
‘하지만 거점 지정 스킬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확장 효율이 좋아.’
건물 하나하나의 방위력이나 인프라의 수준, 리뉴얼 규모는 영역 지정 스킬이 거점 지정 스킬보다 훨씬 못하지만, 다수의 건물과 넓은 땅을 한 번에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점에선 궤를 달리하는 효율을 자랑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조금이라도 더 넓은 땅을 확보해야 하는 이 시국에는 최고의 스킬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영역 지정이 거점 지정의 상위 스킬인지 알 것 같다.
‘내가 평생 혼자 먹고사는 ‘나혼자독식충’이었다면 거점 지정 스킬이 더 매력적이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앞으로 먹여 살려야 할 사람, 피해를 복구하고 재건해야 할 지역, 좀비로부터 되찾아야 할 잃어버린 영역이 너무나도 많다.
나는 전지전능한 신도, 나 혼자 다 해 먹는 슈퍼맨도 아니니까 타협할 부분은 타협해야 한다.
오히려 그런 문제를 타협 한 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기꺼이 거점 지정 스킬을 버리더라도 아깝지 않다.
바이바이 내 예쁜 거점 지정 스킬아.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소중한 소꿉친구 같은 스킬을 떠나보내고, 이제 국밥처럼 든든한 금발 태닝 양아치 스킬과 함께 밝은 미래를 열어 가야 할 시간이다.
우선 남아 있는 좀비들부터 처리하고.
“후우, 겨울인데도 후끈하구만.”
경사스러운 1호 영역으로 재탄생한 공업 단지에 발을 들이자 본능적으로 적대감을 느낀 좀비들이 흉흉한 기세를 흩뿌렸다.
좀비들에게 있어서 내 거점과 영역은 모두 인간처럼 공격해서 내구도를 깎아 내고, 끝내 파괴해야 하는 적성체 취급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내 거점과 영역도 좀비들을 적성체 취급하기 때문에 거점 방위 무기들이 즉시 좀비 떼를 조준했다.
나는 박지찬 병장에게 귓속말로 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는 온전히 기묘한 이승권의 어드벤처 타임이다.
“카아아아아아아!”
“끼이이이이!”
“아오아아아 아아아!”
주변의 분위기가 확 바뀌자 도망치려던 좀비들은 목표를 바꾸고 자신들이 인식한 ‘적성체’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달려들었다. 당연히 거기에는 수많은 거점 방위 무기와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
역시 적을 보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 놈들의 호전성을 잘 자극한 것 같다. 아무리 영악해졌다고 한들, 근본은 어디 가지 않는 법.
나는 즉시 가까운 공장으로 뛰어 들어가 로드롤러에 탑승했다. 중장비 운전면허 따윈 없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ATX처럼 시스템을 이용한 원격 제어가 가능하니까.
영역 내에 존재하는 모든 거점마다 배치된 거점 방위 무기들이 개떼처럼 우르르 몰려드는 좀비들을 향해 무차별 난사를 가하기 시작했다.
눈 없는 포탄이 이 지역의 모든 것을 파괴할 때와는 달리, 거점 방위 무기들은 철저하게 적성체만을 분간해 내고 100%의 명중률로 놈들을 조졌다.
이쯤 되면 사실 거점 방위 무기가 본체고 내가 부속품 취급받아도 할 말 없는 것 아닐까?
‘아니, 김해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내가 곧 김해니까!’
나는 거점 방위 무기의 원호를 받으며, 로드롤러를 힘차게 몰았다.
지금부터 네놈들을 끝내는 데 9초도 쓰지 않겠다.
부르르릉.
1초 경과.
드드드드드드!
2초 경과.
“캬아아아아!’
“그아아아! 아아아아아아!”
3초 경과.
퍼벅! 퍼퍽! 빠직!
원거리 공격형 좀비들이 쏘아 낸 투사체가 로드롤러의 정면 장갑과 방탄유리를 두들겼지만 뚫리지는 않았다. 이것도 내구도가 있는 거점의 물건이니까.
내구도가 절반 이하로 떨어지기 전까지는 절대 파괴되지 않는다.
4초 경과.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살짝 긴장되는 순간이다.
5초 경과.
이제 놈들이 코앞까지 달려들었다. 중간중간 섞여 든 폭발형 좀비들도 보인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다. 왜냐하면…….
6초 경과.
“로드롤러다아아아아아아아!”
우직! 빠지지직! 우드드득!
마침내 나의 로드롤러가 눈앞의 모든 것을 짓뭉개기 시작했다.
로드롤러의 엄청난 중량과 압력에 짓눌린 좀비들이 썩은 과일처럼 퍽퍽 터져 나가며 피륙을 마구 흩뿌렸다.
좀비 압착 기계. 멋진 단어 3개로 이루어진 로드롤러는 거머리처럼 달려드는 좀비들의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거대한 로드롤러 위로 기어오른 원거리 공격형 좀비가 초근거리에서 운전석 방탄유리에 대고 투사체를 열심히 쏴 대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이거 바아아아앙탄유리야, 벼어어어어엉신아!”
백 날 천 날 쏴 봐라. 이게 뚫리나 네놈 뚝배기가 뚫리나.
콤바인을 타고 밀과 옥수수밭을 가로지르던 미국 농부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전방에 존재하는 모든 좀비들을 문자 그대로 쥐포로 만들며 쭉쭉 나아갔다.
중간중간 폭발형 좀비가 로드롤러에 달려들었지만, 폭발에도 차체가 살짝 흔들릴 뿐 큰 피해는 없었다. 오히려 거점 방위 무기들이 먼저 총과 포를 마구 쏴 대는 통에 놈들이 먼저 좀비들 사이에서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그보다 제 발로 로드롤러를 향해 밀려 들어오는 DNA 샘플과 경험치 웨이브에 행복해서 내 입이 찢어질 것 같다.
이날 김해 남부 공업 단지는 해골 3개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