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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47)화 (148/227)

147화 투쟁기 (47)

인생을 살아가면서 절대로 해선 안 될 4대 해악이 있다면 그건 바로 술, 담배, 마약, 도박이다.

그런데 어젯밤은 다들 실컷 4대 해악 중 하나를 즐긴 탓에 좀비 못지않게 흐느적거리고, 끔찍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신경 활성제 폭탄주…… 다시는 안 마신…… 우욱!”

박마춘 아재가 땅꾼 스킬까지 써 가며 제조한 폭탄주에 제대로 K.O 당한 인원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화장실로 달려갔다.

정작 폭탄주를 제조한 당사자는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꿀잠을 자고 있었으니, 젊은 세대의 머리통을 술병으로 깨고 남을 만했다.

“날씨 한번 죽여주는군.”

만성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내게 숙취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서 호텔의 산책로를 걸었다.

김해가 따뜻한 남부 지방이긴 해도 12월의 겨울이 쏟아 내는 아침의 칼바람은 충분히 매서웠다.

남부 지방은 눈이 잘 안 내릴 뿐, 오히려 바다와 가까운 탓에 해풍을 다이렉트로 얻어맞는다.

현대 사회의 인프라가 가져다주는 풍족함과 안락함이라면 사시사철을 원하는 대로 시원 뜨뜻하게 보낼 수 있겠으나, 안타깝게도 좀비 아포칼립스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앗아가 버렸다.

더우면 에어컨 틀고, 추우면 난방을 틀던 21세기 인류가 갑작스러운 겨울에 알몸으로 내던져졌는데 버틸 재간이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적잖은 사람들이 온갖 악재 속에서 고통받고 있겠지.

‘언젠가는 지금보다도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하고, 재건한 사회가 제 기능을 할 때까지 내가 그들을 책임져야 한다.’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게 목표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마지못해 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벽에 똥칠할 때까지 혼자 살 자신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내 ‘벽똥칠’ 계획에 직, 간접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게 아이러니한 점이다.

사실 이 모든 게 시스템의 농간 아닐까? 어떻게든 움직이기 싫어하는 나를 자극하고자 넷플러스를 막아 버린 거지.

내 머릿속에 베리칩이 박혀 있다는 망상보다는 좀 더 그럴듯한 음모론이다.

“후우, 일을 꽤 크게 벌인 것 같은데 아직도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네.”

청명한 겨울 하늘도, 칼바람 속에서 은은한 온기를 내려 주는 햇빛도 산더미처럼 쌓인 내 과제를 덜어 내 주지는 않았다. 대학 교수 같은 놈들.

“일단 각성자들에게 적절한 보상과 앞으로의 계획을 전달했으니, 다음은 일반인들 차례인가.”

활천초에서 처음 나와 만나 지금까지도 활천초를 꾸준히 관리해 주고 있는 여행 동아리 친구들, 인제대에서 구한 사람들, 경희대 중앙 병원에서 구한 의사들, 기타 등등.

그들은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이라서 어젯밤 연회에 따로 초대하지는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충분히 챙겨 줄 생각이다.

일반인으로 구성된 거점 일원들이 각성자로 구성된 거점 방위자보다 책임져야 할 것이 적다고는 하나, 그들의 헌신과 노동, 협력은 결코 까 내려선 안 된다.

그들에게는 개별적으로 거점 내에 설치된 통신기를 이용해 보상을 논하고, 거점에서의 생활이 더욱 윤택해지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예정이다.

좀비와 약탈자, 기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조직 전체의 안전을 책임지는 건 우리 각성자들이지만, 조직 내부에서 우리를 받쳐 주고 뒤를 지켜 주는 건 그들의 역할 아닌가. 당연히 존중받아 마땅하다.

뿌드드득!

조금 과할 정도로 기지개를 켜면서, 한편으로는 또 다른 과제인 추가 영역 확보를 생각했다.

거점 지정에서 영역 지정으로 업그레이드된 스킬은 이제 거점 하나를 지정하면 그와 관련된 영역 전체를 확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다. 아직 실험하지는 않았지만, 마침 좋은 실험 대상이 김해에 하나 있다.

예전부터 확보해야지, 확보해야지 생각은 하면서 자꾸 후 순위로 미뤄 두었던 김해 남부 공업 단지.

본래는 김해 공항을 접수한 뒤에 곧바로 남부 공업 단지까지 먹을 생각이었는데, 도중에 밀양과 대구를 다녀오느라 또 미뤄 버린 놈이었다.

‘마침 충분한 수의 노동자와 전문 기술을 가진 인재, 그리고 영역을 방위할 수 있는 각성자들까지 대거 확보한 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공업 단지를 확보해서 나만의 작고 소중한 생산 시설을 돌릴 때가 됐어.’

문제는 우리 거점 방위자와 거점 일원들이 꾸준히 김해 내부를 청소하면서도 공업 단지만큼은 아직 손도 대지 못했다는 건데, 어젯밤 박지찬 병장으로부터 그곳에 상당히 많은 수의 좀비가 도사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처음 박지찬 병장 일행이 나와 만나기 전, 그곳에서 잠복하고 있던 원거리 공격형 좀비들로부터 기습을 받은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밤에만 활동하는 그 변종들은 각성자들이 작정하고 포지션을 갖춰서 대응하면 어찌어찌 처리할 수 있었지만, 원거리 공격형 좀비는 상당히 까다롭단 말이지.’

놈들이 소나기처럼 쏴 대는 그 기형적인 투사체는 각성자들에게도 상당히 부담되는 것이었다. 당장 나도 어쩔 방법이 없어서 방탄 방패로 몸을 보호했던 경험이 있으니 말 다 했지.

“미사일을 한 방 꽂을 수 있다면 남부 공업 단지 전체를 석기 시대로 만들어 버리고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거점 리뉴얼 생활’을 진행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내겐 미사일이 없다. 언젠가는 생기겠지.

그래도 꿩 대신 닭으로 쓸 건 있다.

나는 즉시 거점창을 열어 박지찬 병장에게 다이렉트로 시스템 메시지를 보냈다.

다행히 그는 군인으로 각성한 덕분에 야간 경계 스킬을 보유한지라 금방 호텔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그 역시 나처럼 피로와 숙취에 상당히 강한 인물이라는 거다.

“부르셨습니까?!”

“급하게 부른 건 맞는데 왜 그리 헐레벌떡 뛰어나와요?”

“아, 그게…… 저도 더 열심히 노력하면 그 스위트룸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하!”

처음 만났을 때는 주변 환경 때문에 상당히 딱딱한 친구였는데, 이제는 곧잘 너스레도 떨게 되었다. 좋은 변화다.

“어제도 말했다시피 저는 상벌이 확실한 사람이에요. 조직 내 규율과 질서를 잘 지키고, 꾸준히 실적도 낸다면 더한 보상도 줄 수 있죠. 실제로 그럴 능력이 있고요.”

“예, 제 눈으로 본 게 있으니 그 부분은 딱히 의심하지 않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제 저랑 일 하나 같이 하죠. 김해 공항 격납고에 네오암스트롱사이클론제트암스트롱포 있죠?”

“155mm 견인포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거요.”

“예, 포탄과 장약도 약간이지만 여유분이 있고, 관리 상태도 준수합니다. 원래 우리 군이 옛날부터 구식 장비 관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

나는 설마 21세기 동아시아 선진국(아님)에서 M48 패튼을 현역으로 굴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현대화 개량을 끝마친 M1 에이브람스 전차를 타고 다니던 미 전차병이 K1, K2 전차 사이에 섞여서 움직이던 국군 해병대의 M48A5K 패튼 전차를 보고 지었던 표정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웹 소설 속 대한민국이 어째서 1940년대로 회귀해도 승승장구하는 것 같은가? 그건 바로 그 시대 무기에 누구보다 익숙한 ‘선진국’이기 때문이다.

‘그 양키놈들한테 우리 K-군대는 여차하면 M1 개런드 소총도 꺼내서 쓴다는 걸 보여 줬어야 했는데.’

아련한 추억팔이는 이쯤 하고, 나는 박지찬 병장에게 슬슬 부사관 하고 싶지 않냐는 악마의 유혹을 속삭였다.

하지만 박지찬 병장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엄청난 기세로 정색했다.

“……저는 그냥 병장이 좋습니다. 앞으로도 병장만 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병사보단 부사관 대우받는 게 더 낫지 않아요?”

“아무리 그래도 병장에서 하사는 진짜 아닙니다.”

어쩔 수 없지. 이것만큼은 대한민국 남성들 모두가 그와 같은 생각일 테니 더 이상 권하지 않기로 했다.

“그럼 그건 제쳐 두고, 1300시까지 공항에 있는 병사들이랑 부사관들 총동원해서 목표 지점까지 견인포 방열해 줄 수 있겠어요?”

“타격 지점은 어딥니까?”

“김해 남부 해안가에 위치한 공업 단지요. 타격 좌표는 내가 직접 따 줄 테니까 따로 정찰이나 관측반 보낼 필요는 없어요.”

“아, 혹시 그 지역에 자리 잡은 좀비들 때문에 그러십니까?”

“맞아요. 그놈들을 싹 처리해야 우리 뒷마당이 안전해지고, 겸사겸사 생산 시설을 확보해서 이것저것 뽑아 낼 수 있잖아요.”

“괜찮은 계획인 것 같습니다. 김해 공항 인근 도로는 도시 재건 작업을 하면서 진즉에 정리해 두었고, 거점화된 공항에서 연료도 넉넉하게 확보했으니 군용 차량도 충분히 동원할 수 있습니다.”

“그럼 부탁하죠.”

박지찬 병장은 그 길로 즉시 두돈반을 타고 호텔을 떠났다.

나는 빠른 이동 기능을 사용해서 단숨에 정차해 둔 ATX로 이동한 뒤, 105mm 곡사포와 UCAV 발사대를 점검했다.

김해 공항과 김해 남부 해안 공업 단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기 때문에 포탄을 빵빵 쏴 대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막강한 155mm 포탄이라고 해도 넓은 공업 단지를 전부 타격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직 포탄 생산 라인이나 추가 군사 시설을 확보한 것도 아니라서 포탄이 무한정 샘솟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좀 거들어 줘야 할 것 같아서, 내친김에 대구에서부터 내려와 일을 끝마치고 선로 한복판에 대기 중인 모든 ATX들을 원격 제어로 불러들였다.

총 4대에 달하는 ATX가 105mm 곡사포의 사거리 내에 공업 단지를 두도록 포지션을 미리 잡아 두고, 나는 느긋하게 ATX 지붕 위에 선베드를 깔고 누웠다.

지금부터 군인들이 뭐 빠지게 움직여서 몇 시간 내로 포 방열까지 끝마치는 동안, 우선 남부 공업 단지가 얼마나 심각한 마굴로 변했는지 확인해 두기로 했다.

발사대에서 퉁! 하고 하늘 높이 쏘아져 올라간 UCAV가 본격적으로 활공을 시작하자, 그리 멀지 않은 남부 공업 단지의 풍경을 금세 감시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컨트롤러인 스마트 패드를 붙들고 가볍게 선회 명령을 내리니 UCAV가 공업 단지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공업 단지의 주요 길목과 공장 부지 내부를 우선적으로 촬영했다.

‘구미랑 다르게 이놈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인간 사냥을 해 왔단 말이지.’

명령을 내리는 상위 개체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자발적으로 무리 생활과 매복, 기습을 터득한 놈들이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멍청한 일반 좀비들과는 비교도 안 된다.

특히 원거리 공격형 좀비들은 마치 친근한 이웃이라도 되는 양 폭발형 좀비들과 함께 움직였는데, 이는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며 상당수의 인간을 효율적으로 사냥한 경험에서 비롯된 공생 관계였다.

지금껏 중간중간 통신기를 통해 보고받은 내용에 의하면 놈들은 활천초를 처음 습격했을 때처럼, 주기적으로 특정 거점에 수백 마리씩 우르르 몰려가 대대적인 습격을 감행했다고 한다.

김해 공항은 육지와 연결된 교각만 집중적으로 틀어막으면 놈들의 침입을 매우 쉽게 저지할 수 있었지만, 주변 진입로가 많은 병원과 활천초는 꽤나 고생했던 모양이다.

다행히 이전보다 늘어난 방위 병력(주로 군인)과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거점 방위 무기들 덕분에 피해는 거의 없었으니 망정이지.

문제는 내 거점 일원이 되지 않은 소수의 생존자 집단들, 혹은 김해 시내 중심지에 숨어 기회를 엿보고 있던 몇몇 약탈자 잔당들이 저놈들에게 된통 당했다는 것이다.

소수 집단의 피해는 곧 놈들의 머릿수가 이전보다 한층 더 불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금까지는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기에 이쪽의 여력이 충분치 않아서 내버려 두고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

놈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 놈들이 주된 은신처로 삼고 있는 공장 건물, 놈들이 퇴각로로 사용할 수 있는 예측 지점까지 모두 좌표를 딴 다음, 아직 배터리가 한참 남은 UCAV를 조금 다른 곳으로 돌렸다.

김해 바로 아래에는 거제도가 있다. 그리고 거제도는 과거, 대한민국의 가장 커다란 밥그릇 중 하나인 대형 조선소 시설과 관련 업체들이 한가득이다.

당장 바닷길을 살필 여유는 없지만, 그래도 나중을 위해 겸사겸사 거제도의 조선소 인근을 대충 훑어보기로 했다.

바로 그때.

삐삐삐삐!

UCAV 컨트롤러 화면에서 록온되었음을 알리는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더니, 곧 저 멀리서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오는 게 보였다.

왠지 모를 데자뷔를 느낀 순간,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든 무언가가 정확히 UCAV 감시 카메라를 들이박으면서 폭발, 이윽고 익숙한 ‘LOST SIGNAL’ 문구를 출력했다.

나는 바나나를 빼앗긴 원숭이처럼 분노했다.

“아니, 씹! 어떤 새끼가 자꾸 내 피 같은 UCAV를 떨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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