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46)화 (147/227)

146화 투쟁기 (46)

옛 중세 시대 유럽 군주들은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중세풍’ 판타지 소설과는 상당히 다른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들에게 광이 나고 멋들어진 식기나 예복 따윈 없었고, 딱딱하고 평평한 빵을 그릇으로 삼아 음식을 덜어 먹으며 야만적인 털가죽을 걸쳤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왕의 권력이 절대적이지도 않았으며, 각 지역의 영주들이 오히려 군주인 왕을 정치적으로 압박해서 각종 이권을 얻어 내거나 타 세력을 견제했다고도 한다.

당연히 우당탕탕 중세 대환장 파티에는 우리가 원하는 낭만이나 환상 같은 건 거의 없었다. 오직 처절한 삶과 허무한 죽음만이 공존하는 인류의 암흑시대였으니까.

하지만 나, 김해의 적법한 군주 이승권은 대다수가 원하는 ‘중세풍’ 낭만을 충족시켜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절대적 권력을 가진 철혈 군주 이승권이 봉신(계약 각성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다음, 대기업 회장이라도 되는 양 거드름을 피우면서 일일이 보고를 받는다거나.

봉신들의 가난한 영지 사정으로는 감히 맛볼 수 없는 산해진미(빵 그릇 아님)를 대접하며 그들과 나의 눈높이 차이를 똑똑히 느끼게 해 준다거나.

그 외에도 아예 노골적으로 일 잘하는 봉신에게 막대한 보상을 하사하면서 ‘허허, 짐은 대구 북부 대공을 믿고 있다오.’ 같은 싸구려 멘트 한마디씩 툭툭 던져 주며 저들끼리 경쟁을 유발한다거나.

아무튼, 나는 취직을 하지 못해 비탄에 빠진 역사학도처럼 어느 날 갑자기 과거로 돌아가서 비누와 화승총을 만들며 개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나는 준비된 군주이며,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은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21세기 현대니까.

우리의 소중한 한 표를 던져서 그나마 덜 병신 같은 대통령을 민주적으로 뽑을 필요는 없다. 김해의 모든 유권자는 한때 북쪽 괴뢰 정권의 수괴처럼 내게 몰표를 던질 테니까.

그 돼지와 나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나는 내게 몰표를 던져 주는 유권자들에게 기꺼이 쌀밥과 고깃국을 원 없이 먹여 줄 수 있는 이 시대 최고 알파 메일이라는 것이다.

급격히 변한 시대가 나를 인정하고, 거기에 반대표를 던질 반동분자가 없는 지금, 나는 당당하게 봉신들을 호텔로 소집했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하나둘씩 호텔 앞에 도착한 김해의 일꾼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기야 지금껏 내가 확보한 거점들이 모두 생존, 보호, 자립에 특화된 안전지대 느낌이었다면, 이 호텔만큼은 철저하게 현대인의 욕망을 200% 반영한 듯한 호화 건물이었으니까.

1박에 최소 수십만 원, 스위트룸은 못해도 수백은 써야 할 것 같은 사치스러움의 향연이 좀비 아포칼립스에 익숙해진 사람들을 압도했다.

특히 오랜만에 만나는 채성아와 김진경 경장은 한창 일하다 왔는지 드레스 코드를 안 맞춰서 쫓겨나는 것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병원장님, 오랜만입니다. ‘휴가’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잊지 못할 추억이었죠.”

대구의 군부랑 으르렁대고, 좀비랑 피 튀기는 사투를 벌이고, 끝끝내 우리를 괴롭히던 구미의 영역 지배자를 영혼까지 털어 버린 나의 영웅담은 미래의 자서전에 고스란히 쓰일 것이다.

“우와, 좋.겠.네.요. 우린 누구 씨가 맡긴 일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김해를 재건하고 있었는데.”

내가 김진경과 악수를 하며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고 있으려니, 옆에 선 채성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토로했다.

나 못지않게 피곤한 시간을 보냈는지 채성아라는 인간이 좀 더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들의 고생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두 사람을 호텔 안으로 안내했다.

김해 군주 이승권이 주최하는 제1회 직원 회식은 이미 밑 준비가 모두 끝났다.

한낱 드레스 코드보다 나와 우리 영역을 위해 얼마나 더 열심히 일을 해 주었는지, 얼마나 큰 실적을 세웠는지가 더 중요한 자리가 될 것이다.

자고로 윗사람의 의무는 아랫사람들이 세운 공적을 크게 치하하고, 또 우리 조직은 상벌이 확실하다는 선례를 만드는 것이다.

주먹구구식 운영과 체계도 잡히지 않은 엉망진창 조직은 금방 망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물론 ‘누가 더 잘났네’, ‘누가 더 못났네’로 끝내기만 하면 그건 실적 부풀리기만 유발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으니, 끊임없이 새로운 의견을 받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면서 미래에 대비하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

선의의 경쟁과 협력을 통한 발전이야말로 이 격동의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 아니겠나.

“와, 서울 한복판에서도 보기 힘든 고급 호텔이 김해에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가만, 여기 위치상으로는 승권 씨가 전에 살던 별장이 있던 곳 아닌가요?”

“그 별장이 무럭무럭 자라서 고급 호텔로 진화했더라고요.”

“세상에, 그야말로 부동산 투기의 혁명이네요.”

강남의 금싸라기 땅들? 그런 건 이제 줘도 안 먹는다.

내가 영역으로 지정하는 곳이 곧 강남이요, 땡전 한 푼 없어도 고급 건물과 인프라, 그리고 대량의 물자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

회귀자들이 비트코인인지 뭔지 하는 걸로 온몸을 비틀며 피똥을 싸도 나한테는 안 된다는 거다.

“다른 사람들도 도착했나 보네요. 잠깐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두 사람을 먼저 연회장 안에 대기시켜 둔 뒤, 조금 늦게 도착한 대구 출신 각성자들을 맞았다.

그들은 뉴동대구역의 위용을 이미 겪은 바 있었지만, 설마 이런 시대에 온전한 기능을 하는 고급 호텔을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곤 예상 못 했던 모양이다.

하나같이 촌놈들처럼 입을 쩍 벌리고 감탄사만 내뱉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괜히 내 어깨가 들썩일 지경이었다.

이것이 가진 자의 여유인가?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처음에 시스템을 통해 날아든 메시지를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건 뭐였습니까?”

“저랑 계약한 각성자들에게만 보낼 수 있는 귓속말 같은 거죠. 양방향 통신이 안 된다는 점이 좀 아쉽긴 한데, 그건 각 거점마다 배치된 통신기를 이용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요.”

“사장님 스킬이 사기적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내 살다 살다 이런 곳에도 다 와 보고, 참 감개가 무량합니다.”

“호들갑 그만 떨고 얼른 들어가기나 해요, 아재.”

“야! 너도 같이 감탄했잖아!”

“감탄도 너무 심하게 하면 없어 보이는 거 몰라요? 나처럼 딱 1절만 하고 끊을 줄 알아야죠.”

“아주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해요.”

틱틱대는 두 사람 뒤로 내 팀원들과 추가로 계약한 각성자들이 보인다. 그들도 반갑게 맞아 주면서 연회장으로 안내하니 질리지 않고 늘 새롭고 신선한 감탄이 계속 터져 나왔다.

그렇게 연회장 안에 자리 잡은 각성자들의 수가 얼추 50명.

처음부터 나와 여정을 함께해 주었던 채성아와 김진경 경장은 각각 오른팔과 왼팔답게 상석에서 가장 가까운 양옆에 앉았다.

그다음으로는 이른바 ‘2기’에 해당하는 구미 해방 작전 팀원들과 내게서 가능성을 보고 의탁하기로 한 다른 각성자들까지.

원탁의 기사로 유명한 아서왕 전설에서도 내용상으로는 13명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기사들이 아서왕과 함께했다던데, 나도 가상의 아서왕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은 성장한 것이다.

사실 진짜 감개무량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기에, 나는 연회용 테이블 위에 준비된 각종 산해진미와 술, 음료를 아낌없이 베풀었다.

연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위엄 넘치는 건배사 같은 건 준비하지 않았다.

노동과 여독에 지친 사람들에게 교장 선생님 훈화만큼이나 의미 없는 건배사를 늘어놓는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대신 나를 믿고 따라와 준 당신들만큼은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가 선사하는 추위와 굶주림, 불편함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겠다는 의사 표현 하나면 충분했다.

“다들 뭐 하고 있어요? 오늘 하루 종일 일만 하고 식사도 걸렀을 텐데 배 터지게 먹고 마셔야죠.”

“““우오오오오오오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오랜만에 맛보는 귀한 산해진미에 일제히 달려들었다.

마치 피라냐 떼가 커다란 먹잇감을 순식간에 뼈만 남기고 먹어 치우는 것처럼, 엄청난 열량을 필요로 하는 각성자들의 식탐도 결코 피라냐에 뒤지지 않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뭔가를 하려면 일단 배가 부르고 등도 따뜻해야 하는 법이다.

“와, 상점창에서 한 접시 50 DNA 샘플에 팔던 참치 대뱃살……”

“이게 그 유명한 돈스파이크인가 뭔가 하는 건가?”

“아재, 그거 다 먹을 수 있습니까?”

“아무렴! 없어서 못 먹지, 없어서. 대구에선 식량이 귀하니까 항상 양이 부족해서 큰일이었다고.”

“그래서 그때 L 마트에서 자빠진 겁니까? 흐흐.”

“어허, 그땐 바닥이 너무 미끄러웠다니까.”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희망보다는 절망, 풍족함보다는 부족함으로 평등하게 모든 인간을 압박하고 있던 좀비 아포칼립스의 악랄함도 오늘만큼은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 버릴 수 있었다.

처음 만나는 사이라도 좋은 분위기에서 한솥밥을 나눠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게 한국인의 특징이라고 했던가, 채성아와 진가희는 팀 내에 얼마 없는 여자들이라 그런지 서로 죽이 잘 맞았다.

엽사 한동석도 김진경 경장과 어떤 식으로 총을 다루는지, 또 경남과 경북 지역의 좀비들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 심오한 대화를 나누며 금세 친해졌다.

산더미 같은 음식을 준비했는데, 한자리에 모인 각성자만 50명이라 음식들이 금방 동났다.

나는 거점 창고에서 추가 음식들을 꺼내 놓으면서,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는 것을 보고 본격적인 연회를 위해 술을 준비했다.

고급 호텔에는 손님을 위해 고급 와인이 상시 구비되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과연 내 호텔도 리뉴얼을 거치면서 거점 창고에 엄청난 양의 술을 쟁여 두고 있었다.

거점 창고는 다른 거점의 물자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각성자들의 취향 따라 입맛 따라 와인, 위스키, 브랜디, 샴페인, 막걸리까지 되는 대로 막 꺼냈다.

고급 음식을 맛보면서 싼 술을 즐기면 되겠냐는 누군가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소맥을 말기 시작한 오함마 아재.

전직 땅꾼 박마춘은 아예 자신이 알고 있는 뱀술과 가장 비슷한 맛을 재현해 보이겠다며 획기적인 폭탄주 제조에 들어갔다.

“뱀술은 부드러운 향과 강한 맛이 일품이야. 우리 집에는 30년짜리 백사주도 있었는데 그걸 못 가져온 게 한이구만.”

“누구는 백사주보다 노봉방주가 더 낫다던데요.”

“예끼, 이 사람아! 최고는 뭐니 뭐니 해도 뱀술이야! 그보다 이거나 한잔 쭈욱 들이켜 봐.”

“……뭐 넣었는데요?”

“내 스킬로 만든 신경 활성제.”

“아니, 누가 폭탄주 제조에 스킬을 써요!”

“안 죽어!!”

음식에 이어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들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확 취해 버리면 안 되니까 적당한 선에서 끊기로 했다.

각성자들이 술 몇 잔 마신다고 취하겠느냐마는, 박마춘 아재가 스킬까지 써 가며 만드는 폭탄주의 위력을 보니 각성자도 능히 보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땡땡땡.

스푼으로 글라스를 가볍게 두들겨서 각성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각성자 1인당 호텔 방 하나씩 제공. 실적이 가장 좋은 상위 10명은 스위트룸 입주 가능.”

“““!”””

“식사, 간식, 기타 보급 물자 무제한 제공, 또한 장비와 소모품 생산 설비 확보 시 무조건 상점창의 반값으로 할인해서 판매.”

“““!!”””

“새로운 거점(영역) 확보 시 실적이 가장 좋은 사람은 해당 지역의 감독으로 임명. 거점 방위자보다 높은 보수와 대우 약속. 추후 연봉 협상 가능.”

“““!!!”””

나는 우선 스위트룸 전자 키 4개를 준비해서 미리 생각해 둔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채성아, 김진경, 한동석, 진가희. 그 외의 각성자들에게는 일반 객실 키를 따로 지급했다.

“다음 부산 시장 선거, 이 기호 1번 이승권을 기억해 주십시오.”

내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승권! 이승권! 이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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