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투쟁기 (45)
이주민 선별 작업은 얼추 끝났다.
그런데 내가 잠들어 있던 사이에 뉴동대구역의 구조가 좀 바뀌었나? 어쩐지 건물이 더 커진 것 같고 인테리어도 조금 더 세련된 분위기로 바뀐 것 같다.
구미에서 그 난리를 피운 것도 모자라 이틀을 내리 잠들어 있었으니 뉴동대구역이 익숙지 않은 거겠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대기 중인 ATX에 탑승한 이주민들의 인원을 마지막으로 체크했다. ATX 한 대당 800명씩, 4대의 ATX에 꽉꽉 채워서 순차적으로 보내니까 총 3200명이다.
물론 이주를 원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후발 주자 이주민들은 뉴동대구역에서 며칠 더 기다리며 다음 ATX를 기다리면 된다.
‘김해에 부족한 노동력과 인재, 그리고 무력의 핵심인 각성자까지 한가득 챙겨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니까 이것도 나름 금의환향인가?’
생각해 보니 금의환향은 너무 오버하는 것 같다. 은의환향 정도로 하자. 그 금이 아니라고? 아무렴 어떤가.
나와 추가로 계약한 각성자들 중 일부는 뉴동대구역이 빈집 털이 당하지 않도록 거점 방위자로 세워 두고, 나와 함께 이동하길 원하는 각성자들만 우선적으로 ATX에 태웠다.
민간인의 짐을 ATX 짐칸에 싣고 있던 한동석은 플랫폼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팔짱을 끼고 있는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장님은 안 타십니까? 이제 다들 준비가 끝났습니다.”
“저는 느린 거 딱 질색이라서요.”
“기존의 KTX에 비해 무거운 무장이나 장갑을 덕지덕지 붙여서 속도가 덜 나오긴 합니다만, 그래도 자동차보단 훨씬 빠르지 않습니까? 아니, 애초에 이 시국에 ATX 보다 더 나은 이동 수단이 어디 있다고…….”
이래서 ‘서-민’들은 안 되는 거다. 고작 시속 200km를 웃도는 ATX 따위에 만족하다니.
나 이승권은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닭장 같은 ATX에 갇혀서 거북이 같은 속도로 내려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팀원들과 함께 움직이자고 말은 했지만, 애초에 기대를 하니까 배신을 당하는 거다.
“저는 걱정 말고 먼저 타세요. 지금 출발하면 저녁쯤에는 다시 김해에서 만날 수 있겠네요.”
한동석은 의문을 표하면서도 닭장 같은 ATX에 몸을 실었다. 모든 인원이 짐을 챙겨서 탑승한 것을 확인한 나는 순차적으로 ATX를 출발시켰다.
어째 역의 규모가 더 커진 느낌이라 그만큼 추가 선로도 깔렸는데, 아무래도 내가 너무 대단해서 뉴동대구역이 감격한 나머지 스스로 진화한 게 아닌가 싶다.
“슬슬 나도 가 볼까.”
거점 공유 스킬에 딸려 오는 획기적인 기능, 빠른 이동을 통해 단숨에 다른 거점으로 이동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내가 서 있던 곳이 뉴동대구역 플랫폼에서 마이 스위트 홈으로 바뀌었…….
“……뭐야, 마이 스위트 홈 어디 갔어?”
야트막한 동산 위에 어느 졸부가 지어 놓은 고급 별장. 그게 없다.
채성아와 만난 후 거의 한 달 가까이 바깥을 나돌아 다니면서 집을 비우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 집이 발이 달려서 도망칠 만큼 호러 하우스는 아니다.
빠른 이동 기능이 오류를 일으킨 게 아니라면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내 집터였다는 건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주변에 고급 별장은 안 보인다.
혹시 내가 김해 공항을 점거하기 전에 그 망할 놈들이 포를 쏴서 내 집을 통째로 날려 버린 걸까?
잎사귀는 모두 진즉에 떨어지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은 나무들을 지나쳐 작은 숲을 빠져나오자 새로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지금은 겨울인데도 생명력으로 넘치는 푸른 잔디밭과 화원, 그리고 중앙에 위치한 분수대까지.
야트막한 동산을 통째로 깎아서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지형이 크게 바뀌어 있었다.
사실 무엇보다 믿기 힘든 건 따로 있었다.
도저히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는 거대한 호텔 건물이 떡하니 나를 반겨 주었다.
“그러니까 고급 별장이 고급 호텔로 바뀌었다 이건가?”
처음 내 거점 지정 스킬은 E급이었다. 그랬던 스킬이 지금은 영역 지정이라는 상위 스킬로 업그레이드된 것과 동시에 B- 등급으로 크게 뛰어올랐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내 스킬의 사기성을 고려해 보면 말이 되는 거다.
‘그러고 보니 구미에서 돌아온 이후에 상태창이나 스킬창, 거점창 점검을 안 했었지.’
뉴동대구역도 미묘하게 뭔가 바뀐 것 같다 싶었는데, 무려 한 달 가까이 부재 중이었던 집이 이렇게 급변했다고 해도 아주 이상할 건 없었다.
내 거점 지정 스킬은 평범한 기차역도 외세의 공격을 버틸 수 있는 방공호 기차역으로 개조시킬 정도였으니까.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한번 호텔을 바라보니 정말 더럽게 컸다.
객실은 얼마나 많을까? 100개? 아니 못해도 1000개는 되겠지.
자세히 보니 호텔 외벽에 설치된 자동 포탑이나 CCTV는 물론이고, 호텔 지붕에는 발칸포까지 달려 있었다.
이러다 막 중앙 분수대가 좌우로 쫙 갈라지면서 숨겨진 결전 병기 ‘이승권 Mk.X’ 같은 게 튀어나오는 거 아닐까? 청와대 지하에도 그런 게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으윽…… 내 서민 DNA가 한 모금에 만 원쯤 할 것 같은 고급 공기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있어!”
갓 태어난 아기 사슴처럼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어렵사리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프론트에서 나를 반겨 준 것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비 로봇이었다.
뉴밀양역과 뉴동대구역에도 있는 놈들이라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치려 했지만, 경비 로봇 중 하나가 내게 다가와 흉부 장갑을 개방했다.
유교 탈레반 정신으로 무장한 젊은 꼰대인 나는 경비 로봇도 가슴을 함부로 까면 안 된다고 경고하려던 찰나, 경비 로봇의 흉부 장갑 안쪽에서 튀어나온 따끈한 쿠키 한 접시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호텔 방문자에게 직접 구운 쿠키를 무료로 제공하는 경비 로봇? 사람보다 좋다.
알파고 님이 직접 빚으신 쿠키의 맛을 음미하며 안으로 걸어 들어가니, 중앙 벽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내 초상화와 마주쳤다.
터질 듯한 근육, 쌀국수처럼 빛나는 새하얀 치열, 초롱초롱한 눈, 우윳빛 피부, 거짓이나 과장 없이 이승권이라는 인간을 가장 잘 표현한 극사실주의 화풍이었다.
“어느 집안 자식인지는 몰라도 참 잘생겼단 말이야.”
20대에 김해의 적법한 군주이자 부산시장 후보, 동대구역의 지배자와 구미의 해방자가 될 법하다. 그야말로 타고났다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는 신이 내린 천재!
고급 호텔 아니랄까 봐 엘리베이터도 종류별로 나뉘어 있었는데, 우선 일반 객실이 있는 2층부터 4층까지 오르내릴 수 있는 엘리베이터, 고급 객실이 자리 잡은 5~6층 엘리베이터, 그리고 호텔 주인 전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었다.
호텔 주인은 곧 나를 말하는 것이기에, 가까이 다가가자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렸다.
고급스러움과 자동화의 편리함이 가져다주는 행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나 같은 후천적 집돌이에게 이보다 더 좋은 낙원이 어디 있을까.
부드럽게 최상층으로 올라간 엘리베이터는 곧 나의 진짜 스위트 홈, 그러니까 내 집안 내부를 그대로 가져다 옮긴 듯한 스위트 룸으로 안내해 주었다.
감촉이 예사롭지 않은 푹신한 거실 소파, 간식을 까먹으면서 넷플러스를 24시간 감상했던 널찍한 TV, 라면 끓이는 용도 외엔 사용해 본 적이 없는 부엌, 언제나 먹을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던 냉장고.
사이버펑크 속에 존재하는 빈티지가 이런 느낌일까. 나는 한 달 만에 찾은 자신의 집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이 감촉이 예사롭지 않은 소파는 언제나처럼 내 엉덩이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내 인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그 순간에도 나는 이 소파 위에 앉아 임종을 맞이할 생각이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부모님의 품을 제외하면 이 소파가 가장 부드럽고 따뜻하니까.
“집으로 돌아오니 좋네.”
타지에 있으면 고향이 그리운 법이고, 밖에 있으면 집이 그리운 게 사람이라는 동물이다.
한국이라는 국가가 자가 소유 부동산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국가였기 때문에 집에 대한 애착이 더 커진 것일지도 모르지.
나는 잠시 자가 소유 주택이 가져다주는 안락함을 만끽하다가, 문득 이 호텔이 가지고 있을 법한 특별한 기능을 찾아보았다.
내 별장이 기념비적인 첫 거점이기도 했고, 별장이었던 것이 지금은 대형 호텔로 탈바꿈했으니 분명 뭔가 더 있을 것이라는 게 내 추측이었다.
“거점창.”
자연스럽게 거점창을 호출해 봤지만 시야를 가득 매우는 반투명한 시스템 문구 박스 대신 집 내부가 기형적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평범한 가정집이 변신 로봇처럼 뚝딱뚝딱 바뀌더니 거실과 TV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고, 수많은 모니터와 계기판이 설치된 모니터링 룸으로 바뀌었다.
SF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비밀 기지의 지하 본부가 딱 이런 느낌이었다.
수많은 모니터들 중 하나가 끼기긱 움직여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화면에 시스템 문구 박스를 대신 출력했다.
[퇴역병 영역 본부(HQ)]
[당신은 이제 영역 본부에서 모든 영역을 원격으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
[현재 영역 내에 등록된 모든 거점 방위자와 거점 일원에게 원격으로 ‘메시지’를 발신할 수 있습니다.]
[‘메시지’는 시스템을 통해 발신됩니다. 모든 도청, 감청 스킬 효과를 무시합니다.]
[특정 지역 내에서 퇴역병의 영역 비율이 50%를 넘어갈 경우 해당 지역을 완전히 통제합니다.]
[현재 김해 영역 비율 : 45%(활천초 4%, 경희대 중앙병원 12%, 홈마트 7%, 김해 공항 22%)]
[현재 부산 영역 비율 : 15%(뉴부산역 15%)]
[현재 밀양 영역 비율 : 10%(뉴밀양역 10%)]
[현재 대구 영역 비율 : 15%(뉴동대구역 15%)]
[현재 구미 영역 비율 : 50%(공단 영역 해방 50%)]
[영역 통제 활성화 조건 : 영역 지정(A-) 이상]
[영역 통제 활성화 시 영역 내의 모든 외부인, 적성체의 침입 여부 확인 가능, 타 영역에서 영역 전쟁 선포 가능, 영역 지배자 생산 가능.]
[비활성화된 스킬 : 영역 통제(영역 지정(A-), 국가 선포(영역 지정(S-) + 최후의 보루(S-))]
“……진짜 나더러 뉴대한민국을 만들라고?”
다른 기능이나 추가 예정 스킬은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애초에 퇴역병의 거점 관련 스킬의 사기성을 감안하면 내 거점을 꾸준히 늘리기만 해도 땅따먹기는 식은 죽 먹기였으니까.
그렇게 먹은 땅을 거점 주인인 내가 관리하는 건데 이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당연한 권리 같은 것이니까.
하지만 비활성화된 스킬의 마지막 부분을 보고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 선포라니?
물론 영역 지정과 최후의 보루 스킬을 둘 다 S급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긴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일개 개인에게 국가를 건립하고 선포할 수 있는 기회와 자격을 준다는 것이 문제다.
사실 지금도 우스갯소리로 김해의 적법한 군주 어쩌고 하는 상황이지만, 그건 그냥 내 거점들이 이 지역을 대표하고 있으니까 그런 거고.
시스템이 현실에서 일으키는 특정 현상들은 은근히 강제성이 짙었기 때문에, 만약 정말로 내가 국가 선포를 하면 시스템이 인정하는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시스템이 인정하고 강제하는데 거기에 반발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어쩌면 나는 팔자에도 없던 독재자가 될 수도 있다.
“아니지, 그냥 국가 선포만 안 하면 되잖아? 대한민국을 어느 정도 안정화시키고 나면 정치나 국가 운영 같은 건 그쪽 전문가들에게 맡겨 두고, 나는 다시 집에 틀어박히면 돼.”
자고로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고, 국가도 운영해 본 위정자 놈들이 더 잘 운영할 것이다.
자기합리화를 끝마친 나는 때마침 잘됐다 싶어 김해의 모든 거점 방위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생각해 보니 지금껏 나 하나만 믿고 따라와 준 사람들에게 변변찮은 거처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냥 모든 거점에 잠자리와 식사가 준비되어 있으니 필요하면 그곳에서 먹고 자는 것이 거점 방위자들에게 일상이었던 것이다.
나도 집이 있는데 정작 나와 계약한 사람들에게 집이 없다는 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양아치스럽다.
-★거점 방위자 전용 고급 호텔 단체 입주식 개최 예정, 너만 오면 고★
곧 ATX를 타고 도착할 내 팀과, 지금쯤 김해 공항에서 고생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모두 메시지를 전송했다.
“완벽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