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44)화 (145/227)

144화 투쟁기 (44)

종전 후 우리는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트라우마 센터에서 일종의 ‘인간성’ 테스트를 거쳐야 했다.

기본적으로 상이군인(부상자)은 병원에서 전문적인 치료를 받게 하지만, 그 이전에 먼저 정신 감정을 진행해서 사회로 복귀시켜도 되는지 따져 봐야 한다는 높으신 분들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는 반발했다.

5년간 전장에서 개처럼 구른 것도 서러운데, 이제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 전에 가축인 양 일일이 검사까지 받아야 하느냐고.

물론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어느 시점에서 보더라도 상태가 심각한 전우들이 많기는 했다.

더 이상 총성이 울려 퍼지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여전히 자신이 전장 한복판에 서 있다고 착각하는 전우들이 더러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딱히 착란 증세를 겪고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쉴 틈 없이 전투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을 뿐이지.

이제 안심해도 되겠지? 하는 순간에 자살 폭탄 테러나 기습적인 저격이 수십 수백 번도 넘게 날아들었다고 생각해 보라, ‘아, 아직 안심하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나를 비롯한 전우들은 그저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마음 놓고 쉬어도 총탄과 폭탄이 더 이상 날아들지 않는다는 확신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런 잠깐의 확신도 주지 않으면서 무작정 너희들의 정신 상태는 위험해 보이니까 철저하게 검사하고 따져 봐야겠다고 하면, 대체 어떤 미친놈이 그걸 순수한 의도로 받아들인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헛소리를 하는 트라우마 센터 상담사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트라우마 센터 보안 직원들이 달려와 뜯어말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지난 5년간 우리 코로 들어왔던 냄새는 딱 2개뿐이었다. 화약 냄새, 그리고 피 냄새.

그들 말마따나 우리는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맞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환자가 되고 싶었던 사람은 없었다.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을 뿐.

-우리가 정신병자 취급이나 당하려고 5년간 그 개고생을 한 줄 알아?!

캑캑대는 상담사에게 크게 한 방 쏘아붙인 나는 그를 구석으로 던져 버린 다음 트라우마 센터를 박차고 나왔다. 그 시점에서 나는 세상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다.

그런 나를 명령 불복종에 근무지 무단이탈이라고 악을 쓰며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앞을 가로막던 지휘관도 있었다. 나와 전우들을 사지로 밀어 넣던 놈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휘관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고 한들, 전쟁은 이미 끝났다. 우리는 본래 돌아가야 할 장소로 돌아갈 일만 남은 마지막 전역 예정자들이었다.

내가 그리 주장하자 아직 전산 시스템상으로 완전히 전역한 게 아니니 너희는 여전히 상급자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군인 신분이라고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참다못해 침을 튀겨 가며 헛소리나 지껄이는 지휘관의 주둥이를 주먹으로 날려 버렸다.

그의 부관과 휘하 군인들이 당황하며 내게 총을 겨눴지만, 나와 함께 트라우마 센터의 정신 감정 테스트를 거부한 북진군 전우 수천 명이 우르르 뛰어나오자 지레 겁을 먹고 총구를 내렸다.

-이, 이 미친 새끼가……이거 상관 폭행이야! 군사 재판감이라고!

-느금마.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내 입에서 터져 나온 건 패드립 한 마디뿐이었다.

사실 전쟁 중이라고 해도 현역 군인의 복무일 연장 기한은 최대 1년까지다. 즉 우리 같은 현역을 전쟁에 투입시켜도 되는 기간은 기존 복무일을 포함해서 최대 3년까지인데, 거기서 2년이나 더 복무시켰던 것이다.

전쟁 중이었다는 걸 감안해도 우리는 군대를 2번이나 입대한 셈이 된다. 이러니 패드립이 안 나오고 배겨?

-우리가 지난 5년 동안 참았던 건 각자 지켜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야. 크게는 국가와 내 가족 그리고 재산, 작게는 우리의 친구와 이웃. 이 나라에서 애국하는 놈이 병신이라는 걸 알아도 막상 총 쥐여 주고 싸워야 할 적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묵묵히 5년간 싸웠던 거라고.

그런데 전쟁 다 끝나고 나니 다시 평소처럼 호구 노예 취급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정신병자로 몰아가려 한다. 헬조선이라는 멸칭이 정말 잘 어울리는 국가다.

나는 대령 계급을 달고 있던 지휘관의 계급장을 툭툭 건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 같은 작자들은 우리한테 고마워해야 해. 우리가 5년간 묵묵히 호구처럼 전쟁을 수행해 줬다는 사실을 고마워할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가 당신네들 모가지 잘라서 북한 땅 어딘가에 파묻지 않는 걸 고마워해야 한다고.

-…….

-그리고 아직 전산 시스템상 전역시키지 않았으니까 군인 신분이라고? 그럼 영원히 전역시키지 마. 우리도 당신네들 허가 필요 없어.

나는 자신의 병장 계급장을 직접 손으로 뜯어서 그의 앞에 내던졌다.

-스스로 퇴역할 테니까.

수많은 전우들이 나와 함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신의 계급장을 손으로 뜯어서 그의 앞에 던졌다. 산더미처럼 쌓인 계급장과 함께 우리는 전역자가 아니라 퇴역병의 신분으로 북한 땅을 떠났다.

높으신 분들이 군사 경찰을 동원하든, 계엄령 선포해서 진압군을 내보내든 뒷일 따윈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우린 그만큼 지쳐 있었고, 더 이상 이 나라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내심 놈들이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면 한바탕 뒤엎어 버릴까 하고 기대도 했는데, 정부와 군대가 우리 눈치를 본 건지 별 탈 없이 ‘퇴역’을 인정해 주었다.

우리가 최전방에서 전쟁하는 사이 돈과 실적에 눈이 멀었던 정부와 기업이 열심히 재개발에 투자한 덕분일까, 이미 2년 전쯤에 개통된 평양-서울 직통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나는 5년간 소식 하나 없었던 부모님의 이름 석 자가 새겨진 합동 추모비 앞에 섰다.

거기까지가 내 기억이었다.

“……오랜만에 별 좆같은 꿈을 꾸네.”

내가 비록 만성 불면증이라 제대로 잠든 적이 얼마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좆같은 꿈을 꿀 정도로 나약한 정신 방벽을 가진 건 아니었는데. 내 SSS급 정신 방벽이 대체 언제 뚫렸단 말인가.

꽤나 오랫동안 감고 있었던 것 같은 뻑뻑한 눈을 뜨고, 양팔을 하늘 위로 쭉 뻗어서 기지개를 켰다.

이렇게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양팔을 쭉 뻗어서 기지개를 켜면 혈액 순환에도 도움이 되고 피로도 빨리 떨쳐 낼 수 있다고 어디서 들었던 기억이 있다.

“라이라이…… 차차차!”

피로를 잊게 해 주는 마법의 주문까지 외치면서 기지개를 켜니 과연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내가 등신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다행히 그 의문은 빠르게 해소되었다.

“아, 일어났어요?”

어쩐지 내가 누워 있던 자리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캡슐 호텔의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진가희였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그녀가 나를 보살펴 주고 있었는지, 한 손에는 물이 담긴 작은 대야와 수건을 들고 있었다. 구미에서 대구로 복귀한 것이다.

“눈 뜨자마자 낯선 천장을 마주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긴 한데,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죠?”

“이틀 정도 잠들어 있었죠. 우리 팀 아재들이 돌아가면서 사장 오빠 업어 들고 대구까지 돌아온 게 어제였고요.”

다행히 이세계에 전생한 것도 아니고, 50년간 잠들었다 깨어난 캡틴 코리아 스토리도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순도 100% 이승권이었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별일 없었죠?”

“음, 딱히 없었죠. 아, 더 이상 변종들이 도시를 습격하지 않으니까 군부랑 대구 시청에서 나온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와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캐묻기는 했어요.”

“뭐라고 대답했는데요?”

“우리는 그냥 사장 오빠한테 보수 받고 일하는 하청 같은 거라 잘 모른다고 했죠.”

“크, 모범 답안 너무 좋고.”

내가 직원들 하나는 참 잘 뒀다고 자화자찬하면서 그녀가 가지고 온 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상쾌한 수분기가 찝찝한 피부를 말끔하게 닦아 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상쾌한 기분을 그대로 간직하고서 카페테리아로 걸어 나오자, 지난번보다 훨씬 더 불어난 인파가 나를 반겨 주었다.

우리가 구미에 가서 뭔가를 뚝딱뚝딱 처리하고 복귀하자마자 갑자기 대구가 안전해진 덕분일까, 눈치 빠른 사람들은 어떻게든 뉴동대구역으로 찾아와서 줄을 대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일감을 구하는 사람들, 물물 교환을 위해 자발적으로 좌판 깔고 장사하기 시작한 사람들, 나와 계약한 각성자들을 붙들고 어떻게 하면 계약할 수 있냐고 캐묻는 사람들까지, 상당히 다양했다.

나는 인파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온 한동석을 찾아내고 그에게 다가갔다.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내가 독사과 먹고 잠들어 있을 때 자기들끼리만 꿀잼 콘텐츠를 즐기고 있었던 거예요?”

“아, 일어나셨습니까, 사장님. 그보다 말조심하십쇼. 사장님이 잠들어 있는 동안 우리가 임시로 여길 관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립니다. 딱 하루 관리했는데 죽을 맛입니다.”

나와 계약한 직원들은 ‘거점 방위자’로 등록되었기 때문에 내가 부재 중일 때도 거점 시스템을 일부 관리할 권한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고작 하루 임시 관리하고 앓는 소리를 내다니, 엄살도 심하지.

“거점 관리가 뭐 어렵다고 그래요. 각 분야의 수요와 공급을 전제 조건으로 두고 거기에 맞춰서 사람을 1차 분류한 다음 적합한 인재와 단순 노동자를 2차 분류하면 되잖아요. 수요와 공급의 밸런스가 맞지 않는 곳은 밸런스를 우선적으로 맞춘 다음 새로운 이슈가 발생하기 전까지 당분간 내버려 두면 그만이고요. RTS 게임 하는 감각으로 생각하면 편한데요?”

“……세상 어느 누가 현실의 문제를 RTS 게임 하는 감각으로 처리합니까?”

“높으신 분들은 다 그렇게 하던데요.”

내가 RTS 게임 속 병사 A로 활동했던 경험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한숨을 내쉰 한동석은 냉수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임시로 게이트가 내려와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 플랫폼 방향을 가리켰다.

“사실 다른 문제는 저희가 임시로 대응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이곳으로 몰려드는 민간인들 중 7~8할은 이주를 원하는 사람들일 지경입니다.”

“이주 요청자가 그렇게나 많다고요?”

“군부도, 대구 시청도, 심지어 순수 무력으로는 군대조차 압도하는 각성자 집단도 해결하지 못한 도시의 안보 문제를 사장님이 해결했잖습니까. 그런 사장님이 대구에 오기 전부터 관리하고 있었던 후방 남부 지역은 얼마나 더 안전하고 살기 좋겠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겁니다. 무력 집단이 쓸데없는 권위만 내세우며 노동과 희생을 강요하는 이곳보단, 차라리 사장님이 직접 관리하는 안전지대를 선호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내가 잠들어 있던 탓에 ATX를 못 움직이고 있어서 곤란했다?”

“맞습니다. 물론 저희가 ATX를 운용할 권한이 있었다고 해도 지금처럼 사장님이 깨어나기를 기다렸을 겁니다. 단순히 사람 몇 명 뽑아서 쓰는 것보다 대규모 이주를 시키는 게 훨씬 더 까다로운 문제 아닙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모든 거점의 통제 권한을 가진 주인이었고, 거점 일원이 되어 거점 내에서 생활할 수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내 허가를 받아야 했으니까.

물론 평범한 민간인이라면 대부분 그냥 받아 주겠지만, 거점 내에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회색분자들을 걸러내는 작업은 필요했다.

수상쩍은 사상이나 종교를 가지고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 단체 생활에 비협조적이고 협력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 흉악 범죄를 저지른 전과가 있는 사람 등등.

그런 점을 미루어 봤을 때 팀원들이 내 허가 없이 무작정 이주민을 받아들이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

“마침 잘됐네요. 이참에 이주를 원하는 사람들을 내려보내면서 우리도 함께 움직이죠. 대구는 어느 정도 안정시켰으니 이제 우리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켜야 하지 않겠어요?”

“꼭 정치인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지역 경제 활성화시킨다고 하면 다들 좋아하더라고요.”

나는 개운하게 자고 일어난 김에 팀원들과 함께 본격적인 인재, 노동자, 이주민의 선별 작업에 들어갔다.

슬슬 김해로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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