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43)화 (144/227)

143화 투쟁기 (43)

터널 시야(tunnel vision)는 보통 극도로 흥분한 상태이거나, 고도의 집중력 탓에 정말로 터널 중앙 속을 걷는 것처럼 시야가 좁아지는 현상이다.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도 이것에서 비롯된 말인데, 나도 몇 번인가 겪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 총탄이 빗발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런 현상을 겪었을 뿐, 내가 원한다고 해서 터널 시야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전투 자극제 한 방 맞았다고 갑자기 시야 가장자리에 암막 커튼이 쳐지는 것처럼 어두워질 줄이야. 내게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지레 겁먹어서 몸이 굳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시야가 좁아진 만큼 시야 끝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뚜렷하게 보였다.

지금이라면 이 역겨운 영역 지배자의 몸 구석구석을 선명하게 핥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투 자극제의 이로운 효과 덕분에 모든 능력치가 200% 상승했다는 말은, 심플하게 말하자면 기존의 내가 인식하고 있던 세상보다 200% 더 느린 세상과 마주했다는 뜻이다.

세상은 그대로지만 나는 200%만큼 더 빠르고, 강해졌으니 인지 능력과 사고 능력도 그만큼 향상된 것 아니겠나.

그 증거로 쳇바퀴처럼 정신없이 돌아가던 영역 지배자의 몸도 느릿느릿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찾았다.’

미묘하게 총알이 닿지 않으면서도 최우선적으로 뼈 갑옷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두개골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약점 간파 효과에 의해 유독 붉게 빛나고 있는 그 두개골은 유독 눈동자가 크게 떨리고 있었다. 좀비도 불안감을 느끼는 것일까?

‘놈은 자신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던 살덩어리 대부분을 포기하면서 막강한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극단적인’ 몸을 손에 넣었다. 밤에만 활동할 수 있는 변종과 비슷한 조건을 가지게 된 거야.’

다시 살덩어리로 가득 찬 육체로 되돌리지 못하면 오래 버틸 수 없다거나, 아니면 좀비가 자랑하는 특유의 생명력이 크게 줄어든다거나 하는 리스크를 짊어진 것이겠지.

즉 자신이 이곳에서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만한 리스크를 짊어지고서도 나를 빠르게 제압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거다.

“걱정도 팔자군!”

콰직!

날카롭고 두꺼운 뼈 가시와 온갖 함정들이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는 지옥의 회전초 속에서 나는 군용 대검을 휘둘러 틈새에 때려 박았다.

복잡한 공장 기계의 정교한 부품 사이에 이물질이 낀 것처럼 가가가가각 하는 충돌음과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테니 아예 틈새를 더욱 벌리고자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타타타타타타타타!

관통 옵션이 붙은 초고속 철갑탄 수십 발이 핀 포인트로 쏟아지자 결국 대검이 틀어박힌 뼈의 틈새가 버티지 못하고 망가졌다.

고작 이 정도의 피해라면 놈이 스스로 부서진 뼈를 빼내고 다시 재조립하기까지 수 초면 충분하다는 걸 안다.

나 역시 수 초에 불과한 짧은 틈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걸리적거리는 소총들을 인벤토리에 도로 수납하고, 작은 틈새를 메꾸기 위해 모든 뼈가 질서정연하게 움직여 재조립되는 사이를 노렸다.

특수 전대물에서 주인공의 로봇이 합체 중일 때 가장 약하듯,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는 놈의 뼈가 재조립되는 순간도 가장 약할 터.

게다가 내부에만 신경 쓰느라 외부는 조금도 신경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아쎄이…… 참새 돌격 실시!”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압!”

대학 새내기 정도 될 법한 여자의 목청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우렁찬 ‘기합’이 허공에서 울려 퍼졌다.

저 멀리서 오함마 아재가 밑져야 본전으로 홈런을 치듯 크게 휘두른 오함마를 발판 삼아 단숨에 총알처럼 쏘아져 나간 진가희가 문자 그대로 공간 그 자체를 갈라 버렸다.

눈으로 좇기도 힘들 만큼 엄청난 스피드로 죽음의 회전초를 스쳐 지나간 그녀는 두꺼운 뼈 갑옷을 통쾌하게 반으로 쪼개 버리는 쾌거를 이뤄 냈다.

그녀가 혼신의 힘을 담아 허공을 내달리듯 터뜨린 흉악한 참새일섬(一閃)은 총알조차 튕겨 내는 뼈 갑옷으로도 완전히 막지 못한 것이다.

만약 영역 지배자가 외부를 감싸는 뼈까지 통째로 재조립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강력한 스킬로도 저 방어선을 돌파하기 힘들었겠지.

팀의 책임자인 내가 혼자서 이놈을 처리할 수 있었다면 참으로 경사로운 일이었겠으나, 원래 책임자의 앙증맞은 찐빠는 곧 기합이었으니 팀원인 그녀의 공이 내 공이라 할 수 있다.

여기까지 도움을 받았는데 마무리를 짓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수줍은 찐빠가 아닌, 그저 ‘폐급’에 불과하다.

미국 서부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름 모를 카우보이처럼 멋들어지게 뽑아 든 권총이 박살 난 뼈 갑옷 아래의 두개골을 정확히 겨눴다.

분위기에 맞춰 내 뒤로 회전초가 굴러다녀야 할 것 같지만, 지금 내가 회전초 안에서 굴러다니고 있으니 별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한다.

뼈 감옥 속에 갇힌 내겐 아주 작은 틈이었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두개골이 사격(A) 스킬을 보유한 내 총구를 피할 수는 없었다.

타앙! 타앙! 타앙!

퀵 드로우한 .38 구경 리볼버로 깔끔한 모잠비크 드릴을 시전했다.

눈알에 각각 한 발씩, 미간 정중앙에 마지막 한 발. 놈의 하나뿐인 뇌를 보호하고 있던 마지막 껍데기가 박살 나고 .357 매그넘탄이 바이러스로 점철된 단백질 덩어리를 헤집었다.

놈의 죽음과 동시에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뼛조각이 기분 나쁜 생기를 잃고 썩은 고목처럼 바스러지며 후두둑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영역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영역 지배자에게 결정타를 달성했습니다.

-최초로 영역 지배자를 처치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모든 적성체에게 ‘공공의 적’으로 인식됩니다. 모든 적성체가 당신을 인지했으며, 특정 영역에 진입할 경우 더욱 집요하게 추격하고 공격합니다.

-당신은 이제 특정 적성체로부터 ‘특수 DNA 샘플’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특수 DNA 샘플은 ‘DNA 합성창’을 통해 랜덤한 스킬 획득, 또는 추가 스텟 능력치 상승 효과를 획득하는 데 사용됩니다.

-‘구미’ 영역이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구미 영역에서 거점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영역 전쟁 승리 보상(퇴역병) : 숙련 포인트 +25, 특수 DNA 샘플 +1, ‘영역 지정’ 스킬 획득(거점 지정(B-)을 영역 지정(B-)로 강화)

이 지역의 우두머리인 영역 지배자가 쓰러지자 내 예상대로 모든 분열된 좀비들 역시 일반 좀비 수준으로 능력치가 크게 감소했다.

덕분에 머릿수에서 밀리고 있던 팀원들은 다시 손쉽게 놈들을 도륙해 냈다. 이번만큼은 놈들도 되살아날 수 없었는지 얌전히 시스템에 의해 시체가 소멸되었다.

“……이겼다.”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안도감.

내가 사지로 끌고 온 팀원들을 책임지고 살려 냈다는 것에서 오는 만족감.

그리고 긴장의 끈을 놓치자마자 밀려오는 어마어마한 탈력감이 거의 동시에 내 몸을 덮쳤다.

-전투 자극제의 이로운 효과 지속 시간(5분)이 종료되었습니다.

-모든 신체 능력 -200%가 12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직후, 아무리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고 피곤한 상태를 유지해도 쌩쌩하게 움직였던 내 몸은 거짓말처럼 지면에 널브러졌다.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빙글빙글 돌고, 누군가가 내 근육 마디마디에 빨대를 꽂고 힘을 쭉 빨아먹는 듯한 기이한 감각이 느껴졌다.

내 인생 경험 중에서 이것과 가장 비슷한 상황을 하나 꼽자면, 학창 시절 식중독에 걸려서 병원에 실려 갔을 때였던 것 같다.

“아니, 아직 상태창이나 스킬창 열어서 보상도 제대로 확인 못 했는데…….”

흐릿한 시야 너머로 마지막 남은 좀비까지 확실하게 처리한 팀원들이 우르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내가 이렇게 누워 있으니까 빨리 다 같이 와서 헹가래 좀 해 줘. 그리고 날 ‘속사의 이승권’이라고 불러 줘.

그리고 김해의 적법한 군주이자 부산시장 후보, 이제는 오염된 구미를 해방한 환경 보호 단체장이 된 나를 지지해 줘.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팀원들을 향해 따봉을 만들어 보인 후, 무겁게 짓누르는 눈꺼풀과의 힘 싸움에 밀려 결국 눈을 감았다.

* * *

박명식 함장은 평상시의 그답지 않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독도급 1번 함 독도함의 함장이자 국가적 비상 사태에도 냉정하게 휘하 부대를 운용해 VIP를 비롯한 정치 고위층의 신변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

나아가 동해안에서 합류한 미 해군 함정을 이끌어 당당하게 제주도 해군 기지로 복귀, 이후 자연스럽게 대한민국 최후의 해군을 지휘하는 제2의 이순신 장군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신중하게 행동하면서 결코 권력을 대놓고 탐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리더십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총동원, 지휘관으로서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모범을 선보이려 했다.

때문에 처음 제주도 인근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섣불리 해군 기지에 입항하는 것이 아닌, 우선 우도 인근에 정박하여 소수의 정찰 병력을 제주도에 상륙시키는 신중함까지 보였다.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 건너는 게 아니라, 아예 돌다리의 재질까지 파악하려는 치밀함으로 접근했건만, 생각지도 못한 비보가 날아들었다.

‘육지를 점령한 그 괴물들이 아니라…… 같은 인간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고?’

심지어 그냥 인간도 아니다.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기갑 차량까지 동원한 중무장 고화력 병력이다.

일순간 그는 제주도 내의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섬을 완전히 요새화하고 외부인을 거부하는 것인가 의심했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내보낸 정찰 헬기의 보고에 의하면 상대는 한국군이 아니었다.

-중국군! 중국군이 제주도를 점령했습니다!

“빌어먹을!”

6년 전 2차 남북 전쟁이 벌어질 당시에는 북한이 먼저 빌미를 제공했고, 한미 연합이 재빨리 군을 움직인 덕분에 중국과 러시아가 국경 근처에 군대를 배치하는 게 전부였다.

아시아-태평양 진출과 확장을 꾀하는 중국이 2차 남북 전쟁 기간 내내 맹비난을 퍼붓고 언제든지 군을 동원할 수 있다는 식으로 으름장을 놨지만, 결국 통일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그 순간까지 뛰쳐나오지는 않았다.

아니, 그때는 미군 때문에 뛰쳐나오지 못한 것이겠지만, 중요한 건 왜 하필 지금 제주도를 점령했냐는 것이었다.

중국 땅은 더럽게 넓고, 중국 앞마당에는 제주도보다 훨씬 더 큰 대만이나 다른 동남아 국가들도 있지 않은가.

“함장, 후퇴합시다.”

“하지만 대통령님, 자국 땅이 저 괴물 놈들도 아니고 중국 떼놈들에게 점령당했습니다! 지금 물러난다면……!”

“예전부터 제주도에 밀입국한 중국인들도 많았고, 알짜배기 땅을 사들인 중국인도 많았습니다. 저들은 아마 오래전부터 제주도 상륙과 점령 계획을 준비해 뒀을 겁니다.”

“…….”

한국, 미국, 일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었을 때는 중국도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좀비에 의해 육지란 육지는 모두 점령당하고 있는 지금이 놈들에겐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었을 터.

미리 공들여 준비해 온 제주도에 정보원이나 공작원을 심어 두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사태가 터지자마자 10억이 넘는 좀비 떼로 바글거리는 중국 대륙에서 곧장 탈출해 제주도에 자리 잡은 것이리라.

좀비 사태로 인해 외부와의 통신과 지원이 끊어진 제주도는 기습적으로 상륙하는 중국군을 막을 방법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땅을 내줬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 군도, 미군도 지금 오랜 시간 동안 보급과 정비를 받지 못해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습니까. 여기서 무턱대고 남아 있는 모든 병력을 차출해서 제주도에 상륙한들, 이미 방어 태세를 굳힌 저들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의 말마따나 한반도 북부에서 급하게 도망치듯 내려온 미 해군이 멀쩡할 리는 없고, 자신들 역시 상태가 좋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동해에서 제주도 해군 기지 하나만 보고 무작정 달려왔으니 오죽할까.

“……여기서 물러서면 더는 갈 곳이 없습니다.”

“일단 거제도로 복귀합시다. 그곳에 국내 최대 규모의 조선소가 있으니, 어떻게든 남아 있는 설비나 자재를 이용해서 배를 정비하는 겁니다. 또 김해와 창원이 가까우니 운이 좋으면 생존자와 합류하거나 보급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침 군 통수권자인 내게 대한민국의 모든 군수물자 보관 시설과 피난, 구호 시설의 위치 데이터가 있으니 이걸 적극 이용해 보자는 겁니다.”

어쩌면 중간에 생존한 군부대와 합류해 병력을 충원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니 박명식 함장은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이미 정찰 헬기를 통해 중국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확인한 이상 더 지체하는 것은 자살 행위일 뿐이었다.

일단 육지로 한 번 돌아가 충분한 정비와 보급, 그리고 병력 충원까지 진행한 후에야 제주도를 다시 공략할 기회가 생길 터.

박명식 함장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함 내 모든 인원에게 회항을 전달했다.

반드시 다시 돌아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 떼놈들을 모조리 용궁 밑바닥에 처박아 넣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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