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투쟁기 (42)
‘뼈?’
찰나의 순간이긴 했지만 분명 내 시야로 날아든 것은 살짝 거뭇거뭇하고 날카로운,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큰 뼛조각이었다.
뼛조각이 날아든 방향은 당연하게도 본체의 고치였다.
고치는 이미 반쯤 갈라져, 틈새에서 기분 나쁜 점액질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 안쪽에서 천천히 고치의 틈새를 벌리면서 기어 나온 것은 기존의 푸짐한 살덩어리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이어트로 체지방 0%의 한계에 도전한 영역 지배자의 모습이었다.
체지방 0%, 쉽게 말하자면 놈에게는 더 이상 ‘살덩어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건덕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뼈와 근육, 힘줄, 그리고 피부라는 최소한의 살가죽만 덮어 씌운 듯한 앙상한 외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좀비들을 품고 있던 놈 아니랄까 봐 엄청난 뼛조각들이 놈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머리뼈, 팔뼈, 다리뼈, 갈비뼈, 기타 등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뼈를 마구잡이로 쌓아 올린 뼈의 무덤이었다.
판타지풍 RPG 게임에서 등장할 법한 스켈레톤과의 차이점을 꼽자면 놈은 순수하게 뼈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뼈의 움직임을 보조하는 근육과 힘줄, 신경 다발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즉 정말로 살덩어리란 살덩어리는 모두 배제한 채, 뼈로 이루어진 육체를 움직이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만 남겨 둔 극한의 감량이었다.
‘놈의 그 푸짐한 살덩어리는 피탄 면적을 과하게 넓혔고, 반응 속도를 느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뺑뺑이를 돌리면서 편하게 두들겨 팰 수 있었던 건데.’
놈도 그걸 알아차린 거다.
튼튼한 뼈로 전신을 감싼다면 그것이 곧 방패이자 검이요, 살덩어리 생명체가 가지는 종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과연 변종까지 양산해 낸 상위 개체답다고 할까. 인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괴악한 발상을 스스로의 몸을 바쳐서까지 증명해 낸 것이다.
여간 기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푸짐한 살덩어리는 좀비 바이러스를 보관하는 든든한 저장 장치였을 텐데, 그게 없다면 좀비일 수도 없지.’
보통 좀비는 목을 자르거나 머리를 파괴하면 죽는다. 뇌가 없다면 좀비 바이러스도 육체를 움직이게 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저 수많은 뼈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죽음의 회전초처럼 생긴 영역 지배자는 좀비 바이러스를 어떻게 보관하고 있을까?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을 보관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은 역시 두개골 속 뇌겠지.
하지만 놈이 보유한 두개골 뼈는 족히 수백 개는 넘었다.
저 수많은 두개골 중에 어떤 곳에 명령을 내리는 뇌가 있는지 찾을 방법은 전무하다.
스켈레톤처럼 눈구멍이 뻥 뚫린 것도 아니고, 제대로 눈알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주 얇은 살가죽으로 덮여 있어 엄밀하게 말하면 전신의 뼈가 노출된 것도 아니었다.
놈이 보유한 수백 개의 뚝배기를 하나씩 깨다 보면 언젠가는 얻어걸리겠지, 같은 안일한 태도로 싸울 수는 없다. 조금 전 놈이 기습적으로 날린 뼛조각은 아직도 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으니까.
무엇보다…….
“분열된 살덩어리들도 똑같이 변이했군.”
하나둘 작은 고치를 깨고 나온 놈들 역시 앙상한 뼈의 윤곽에 맞춰 살가죽이 들러붙은 아귀 같은 형태였다.
순수하게 인간을 포식하겠다는 열망보다, 상처 입혀서 감염시키거나 갈기갈기 찢어발기겠다는 살의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우리와 싸우면서 놈도 궁지에 몰렸던 것이다.
지긋지긋한 3라운드가 사실상 마지막 페이즈라는 걸 알고 있어도 딱히 기쁘진 않았다.
상처 입은 맹수는 자신이 죽을 것을 각오하더라도 반드시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려는 악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잡생각을 떨쳐 내고 즉시 소총을 들어 사격을 개시했다. 영역 지배자가 보유한 수많은 두개골 중에 하나, 그곳에 명령을 내리는 뇌가 들어 있다. 그걸 파괴하면 이긴다.
타타타타타타!
내가 놈을 죽음의 회전초라고 생각한 이유는 온갖 기괴한 형상의 뼈들이 얼기설기 엮여서 놈의 전신을 보호하는 커다란 구체 형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격을 개시한 지금, 놈은 일부 뼈를 활짝 펼치더니 그것을 거미 다리처럼 이용해 다다다다다다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하고 속도는 또 어찌나 빠른지, 거대한 뼈로 이루어진 벌레 같은 생명체가 건물 외벽을 기어오르는 데 걸린 시간은 단 5초였다.
피이이잉! 씨이이이이익!
거의 몸을 내던지면서 열심히 구른 결과, 내가 서 있던 자리를 노리고 날아든 뼛조각들이 파공성을 흘렸다.
적중하면 확실하게 죽고, 스쳐도 감염당할 위험이 있다.
푸짐한 살덩어리 형태로 움직일 때는 그래도 어찌어찌 도망치면서 툭툭 건드릴 정도의 여유가 있었는데, 한 번 어그로가 끌린 지금은 도망치는 것도 아슬아슬했다.
“씨이이이이발!”
건물 옥상에서 몸을 내던져 다른 건물로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지면으로 그랩 훅을 발사했다.
중력에 더해 짚라인을 되돌리는 힘까지 더해지면서 나는 단숨에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쿠웅!
버려진 폐차량을 매트 삼아-조금도 부드럽지 않았지만- 어찌어찌 착지한 나는 재빨리 옆으로 굴렀다. 무릎이 아프다.
고치에서 하나둘씩 기어 나온 일반 좀비들이 나를 노리고 작은 뼛조각을 발사하거나, 우르르 달려들어서 내가 서 있던 폐차량을 금속째로 찢어발겼던 것이다.
김해에서 마주쳤던 원거리 공격형 좀비와 비슷한 느낌이면서 조금 달랐다.
그놈들은 근접전에 매우 취약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반면, 이놈들은 살덩어리를 포기하고 얻은 강력한 뼈를 검처럼 휘둘러대기까지 했으니까.
“도움!”
직역하면 Help me.
내 위기를 눈치챈 팀원들이 새로운 형태로 고치에서 기어 나오는 일반 좀비들을 보고 멈칫했으나, 곧 근거리 공격조와 원거리 공격조가 변종을 상대했던 것처럼 합공을 가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적극적이고 격렬하지는 않았다. 놈들은 더 이상 흐느적거리면서 무지성으로 덮쳐 드는 일반 좀비가 아니었으니까.
날아드는 뼛조각을 쳐 내고 사마귀의 앞발 같은 무시무시한 뼈 검을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그런 놈들이 압도적인 머릿수로 찍어 누르고 있는 형태였으니 숙련된 팀원들도 힘을 쓰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오히려 언제 사상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저 작은 놈들은 결국 영역 지배자에게서 떨어져 나온 놈들이다. 영역 지배자를 조지면 무력화되거나 최소한 타격 정도는 받겠지.’
문제는 내가 혼자서 그걸 할 수 있느냐, 인데.
나 이승권, 밤에 혼자서 폐쇄된 북한 땅굴 끝자락 터치다운 하고 돌아오는 담력 시험도 거뜬하게 통과한 남자다. 내가 바로 이 시대의 진정한 상남자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퇴역병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면 아이템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쪽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진해 오던 영역 지배자의 전방에 거대한 방탄 유리 벽을 세웠다.
쩌어어어어어엉!
적어도 대전차 포탄이 아니면 꿰뚫을 수 없는 엄청난 두께의 방탄 유리 벽이 내 앞을 가로막자 영역 지배자가 속도를 죽이지 못하고 충돌했다.
지면을 타고 부르르 흘러 들어오는 진동과 충돌로 인해 터져 나온 충격파가 주변으로 확 퍼져 나갔다. 그 여파로 인해 주변에 있던 폐차량의 유리창이 깨지거나 끼기긱 소리를 내며 흔들릴 지경이었다.
다행히 두껍고 거대한 방탄 유리 벽은 돌파당하지 않았고, 영역 지배자는 자신이 일으킨 충돌의 여파를 고스란히 뒤집어써 비틀거리고 있었다.
너덜너덜해져서 당장이라도 박살 날 것 같은 방탄 유리 벽을 인벤토리에 수납하고, 가시덩쿨처럼 얼기설기 엮인 놈의 뼈 갑옷 사이로 수류탄을 재빨리 까 넣었다.
지금 SMAW 같은 걸 쏴 봤자 뼈 갑옷의 외부에 탄두가 충돌해서 화력이 크게 감소하겠지만, 저 틈새로 수류탄을 까 넣는다면 얘기가 다르다.
“폭죽도 대놓고 사람에게 쏘는 것보다, 손에 쥐고 터뜨리는 게 훨씬 위험한 법이지.”
폭죽 하나를 손에 꽉 쥐고 터뜨리면 문자 그대로 손이 날아가 버린다. ‘고작’ 폭죽에 손이 날아가 버린다고 하는 건 너무 억지 아니냐고? 의외로 그런 사고 사례가 제법 있다.
특히 나 같은 놈들은 폭발로 인한 충격파가 외부와 내부라는 환경 차이 하나만으로도 그 위력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모를 수가 없다. 다 몸소 겪어 봤기 때문이다.
퍼어엉! 콰가가가가가!
놈의 은밀한 구멍(?) 속으로 또르르 굴러 들어간 수류탄들이 곧 폭발을 일으켰다.
수많은 두개골들을 보호하고 있던 튼튼한 뼈 갑옷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충격에는 매우 강했지만,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의 충격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퍼버버버벅!
재빨리 방탄 방패를 꺼내 몸을 숨기지 않았더라면 충격파를 타고 사방팔방으로 비산하는 뼛조각 탄환에 고슴도치 신세가 될 뻔했다.
당연하지만 고작 이것 한 방으로 끝일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고작 수류탄 몇 개에 나자빠질 놈이었다면 숙련된 각성자 팀을 이렇게까지 압박하지는 못했겠지.
‘지금 달려들지 않으면 놈은 또다시 태세를 정비하고 약점인 두개골을 감출 거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방탄 유리 벽과 마찬가지로 너덜너덜해진 방탄 방패를 옆으로 내던지고, 나는 매캐한 화약연과 흙먼지 한복판으로 달려들었다.
저 날카롭고 거대한 뼈에 찔리면 최소 중상, 최대 사망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지금 이 기회를 살리지 않으면 영악한 놈이 금세 ‘학습’해 버릴 테니까.
다행히 뼈와 거죽만 남은 놈의 기괴한 신체는 발 디딜 곳이 많았다.
설마 내가 좀비인 자신의 품속으로 파고들 거라곤 예상치 못했는지 영역 지배자가 보유한 모든 두개골이 눈을 부릅떴다.
내부 폭발로 박살 난 뼈를 재조립하고, 품속에 파고든 나를 배제하기까지 최대한 버틸 속셈인 걸까. 놈이 회전초처럼 둥근 몸체를 이용해 다시 구르기 시작했다.
졸지에 쳇바퀴 속 햄스터 신세가 된 나는 정신없이 구르는 뼛조각 사이를 미친 듯이 달렸다. 달리면서도 소총을 난사해 두개골을 하나하나 박살 냈다.
놈이 직접 분열시킨 일반 좀비들처럼 하나하나가 독립된 개체가 아니고서야 이 거대한 몸체 속에 자리 잡은 뇌는 단 하나다. 실제로 저 독립된 개체를 쓰러뜨려도 영역 지배자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았으니까.
‘어디냐, 어디에 숨긴 거지?!’
데굴 데굴 데굴!
폐차량을 찍어 누르고, 건물 외벽을 들이박고, 하늘로 튕겨 올랐다가, 다시 지면으로 쿵 떨어지면서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좀비 쳇바퀴 속에서 나는 미친 듯이 눈동자를 굴렸다.
한 박자만 잘못 때려도 감점당하는 리듬 게임처럼, 나는 감염 내지 죽음이라는 최악의 리스크를 짊어지고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타타타타타타타!
탄환 세례가 한 번 긁고 지나갈 때마다 똑같이 생긴 두개골이 수십 개씩 터져 나갔다. 그래도 여전히 수백 개나 남아 있다.
드드드드득, 우득! 빠지직!
열심히 구르면서 시간을 벌고 있는 영역 지배자도 조금씩이지만 파괴된 뼈를 재조립하고 있었다.
쓸모없는 파편은 모두 외부로 방출시키고, 남아 있는 내부의 뼈를 살덩어리처럼 조작해서 무기로 바꿔 나가는 것이다.
내가 먼저 놈의 뇌가 숨겨져 있는 두개골을 박살 내느냐, 놈이 먼저 뼈를 재생시켜 나를 배제하느냐가 걸린 일생일대의 도박.
하지만 이대로라면 내가 밀릴 것은 자명했기에, 나는 아껴 두었던 비장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전투 자극제!”
부산역 전투 보상으로 획득한 특전 스킬 전투 자극제(C+).
스킬을 시전하자마자 허공에서 나타난 군용 주사기 같은 것이 내 목덜미를 푹 파고들었다.
조금 두꺼운 볼펜처럼 생긴 군용 주사기가 내 경동맥에 바늘을 찔러 넣고 어떤 약물을 주입하는 순간, 내 삐그덕거리던 육체에 신세계가 도래했다.
-이로운 효과 : 5분간 모든 신체 능력 +200%.
-이로운 효과 : 5분간 모든 적의 ‘약점’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스킬 등급에 따라 이로운 효과 수치 및 지속 시간 증가)
-해로운 효과 : 5분간 터널 시야, 고통 100% 증가, 부상 확률 100% 증가.
-해로운 효과 : 5분 후 12시간 동안 모든 신체 능력 -200% (스킬 등급에 따라 해로운 효과 수치 및 지속 시간 감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