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41)화 (142/227)

141화 투쟁기 (41)

“아재! 거기도 하나 붙었어!”

“나도 알아! 썅!”

전광석화처럼 전장을 헤집고 다니는 진가희 덕분에 상대적으로 근접전에서 취약한 팀원들의 위험 빈도는 크게 줄었지만, 그녀의 몸은 하나였기 때문에 갈수록 힘에 부치고 있었다.

한동석은 그녀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총열이 크게 달아오른 엽총의 개머리판을 크게 휘둘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살덩어리 좀비(영역 지배자)로부터 떨어져 나온 작은 살점이 좀비의 형태로 바뀌다 말고 다시 무너져 내렸다.

이 살덩어리를 완전히 죽이는 건 불가능하지만 일반 좀비와 내구도 자체는 비슷한 듯, 일단 한 번 무력화시키면 다시 재생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작은 살덩어리는 한 번 무력화시키면 다시 재생되기까지 시간이 걸려! 포위당하지 않도록 계속 움직이면서 적당히 쳐 내기만 해!”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다른 팀원들과 공유하면서, 한동석은 버려진 폐차량을 밟고 올라섰다. 붉게 달아올랐던 엽총의 총구가 조금은 식어 있었다.

‘핵심은 저 영역 지배자인가 뭔가 하는 놈이다. 저놈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이 살덩어리들은 끊임없이 우릴 덮치겠지.’

RPG 게임으로 치면 꽤나 고약한 패턴을 가진 보스 몬스터라고 할 수 있겠다.

한동석은 성난 고릴라처럼 거칠게 건물 사이를 오가며 이승권 사장을 쫓고 있는 영역 지배자를 가늠자 끝에 담았다.

이승권 사장은 놀라운 신체 능력과 신기한 스킬로 적절하게 도망 다니고 있었지만, 거인과 난쟁이의 추격전은 결국 거인이 이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의 말마따나 적절한 어그로 핑퐁이 되어야 팀원 전체가 무사히 놈을 쓰러뜨리고 복귀할 수 있다. 한 명이 일방적으로 희생해 봤자 개죽음일 뿐이다.

타앙!

이번에는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총구가 달아오르지는 않았다.

가늠자 끝에서 건물의 외벽을 단단히 틀어쥐고 오르려던 영역 지배자의 손가락 마디가 퍽 하고 터져 나갔다.

한 끗 차이로 건물을 오르지 못하고 아래로 추락한 영역 지배자는 요란한 소음을 자아내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졸지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놈은 특유의 괴성을 내지르며 잔해 속을 빠져나왔다.

놈의 무수한 얼굴 속에서 뿜어져 나온 흉흉한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한 것을 확인한 한동석은 미련 없이 움직였다. 어그로 핑퐁에 성공했다면 이제 다른 팀원을 믿고 움직여야 한다.

골목길 안쪽에서 한동석이 도망치는 것을 확인한 이형진은 자신의 보호를 받고 있는 박마춘에게 눈짓을 보냈다.

박마춘은 상점창에서 구입한 크로스보우의 볼트 끝에 자신이 준비한 독을 열심히 바르고 있었다. 그의 직업은 본래 산을 타며 각종 약초나 야생 벌꿀, 그리고 뱀을 잡는 ‘땅꾼’이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각성했던 것이다.

“그 독, 효과 있습니까?”

“그럼. 일반 좀비들 상대로는 너무 아까워서 사용하지 않았고, 변종 상대로는 볼트가 잘 안 박혀서 아껴 두고 있었는데 저런 물렁한 놈이 상대라면 얘기가 다르지.”

땅꾼 직업은 야생에서 획득한 각종 동식물로부터 특정 성분을 뽑아내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

지금 그가 볼트 끝에 바르고 있는 독은 일전에 일반 좀비를 상대로 실험해 봤을 때 신체 부위가 급속도로 괴사하는 막강한 신경독의 일종이라는 모양.

박마춘의 준비가 끝나자 이형진은 골목길 주변으로 모여드는 일반 좀비들을 소방 도끼로 퍽퍽 쳐 내서 시야를 확보해 주었다.

그 틈을 타 골목길에서 빠져나온 박마춘이 저 앞으로 달려 나가는 영역 지배자를 향해 크로스보우를 겨눴다.

피잉!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볼트는 너무나도 작아서 저 거대한 영역 지배자의 몸에 박히고도 티가 나지 않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대략 10초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영역 지배자가 자신의 등허리-등허리가 맞는지는 둘째 치고-부위가 시커멓게 죽어 가며 녹아내리는 것을 눈치챘다.

-■■■■■■■!

“그렇지! 내가 배합한 특제 신경독인데 그쯤은 돼야지!”

“좋아하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드디어 자신도 뭔가 해냈다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박마춘을 이형진이 냅다 잡아끌었다.

박마춘은 팀 내 최고령자였던 터라, 아무리 각성자라고 해도 남들보다는 느렸기 때문에 이형진이 직접 호위하면서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켰다.

어그로 핑퐁이 되는 찰나의 순간이 바로 다른 팀원에게는 또 다른 공격 기회이며, 동시에 어그로가 끌린 사람들이 가장 위험한 상황이다.

콰앙!

이형진과 박마춘이 골목길 안쪽으로 모습을 감춘 지 1초도 지나지 않아 그 자리에 찌그러진 폐차량이 던져졌다.

만약 조금만 더 늦게 움직였다면 두 사람을 덮쳤을 폐차량이 아슬아슬하게 목표물을 짓이기지 못하자, 영역 지배자는 또 한 번 괴성을 내지르며 쿵쿵 날뛰었다.

한동석과 이형진, 그리고 박마춘 다음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은 진가희였다.

그녀는 영역 지배자를 직접적으로 노리기보다는 시종일관 일반 좀비들만을 처리하면서 팀원들이 숨통을 틀 수 있도록 집중하고 있었지만, 공격 기회를 그냥 넘길 생각은 없었다.

빠른 몸놀림으로 도로 위를 휩쓸고 다니며 일반 좀비들이 눈치채기도 전에 놈들을 무력화시키고, 다시 사각지대로 숨어든 그녀는 흡사 숙련된 암살자 같았다.

그녀가 보유한 스킬은 주로 쾌(快)와 강(剛) 위주였다. 무협지에서나 나오는 변화무쌍한 칼이 아니라 강하면서도 빠르고 정형화되어 있는 교과서적인 칼.

그렇기 때문에 적을 단숨에 일도양단하는 것도, 암살하듯 빠르게 베어 버리고 이동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상대는 일반 좀비와는 격이 다른 크기와 강함을 가진 영역 지배자. 특히 저 쉴 새 없이 기분 나쁘게 꾸물거리는 살덩어리는 아버지 아래에서 오랫동안 검도를 배워 온 진가희조차 흠칫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사장 오빠가 말했어. 공격 기회는 깔끔하게 한 번으로 끝내라고.’

그 말인즉슨 누군가가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공격 기회를 허망하게 놓치면 그만큼 다른 팀원들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놓친 공격 기회가 다시 돌아오려면 얼마나 많은 팀원들이 더 고생해야 할지, 어떤 리스크에 노출되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으니까.

진가희는 폐차량 사이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며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10, 9, 8…….

또 다른 기습을 허용한 영역 지배자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 미친 듯이 날뛰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그 잔해를 도망치는 팀원들에게 마구 집어 던지고 있었다.

5, 4, 3…….

아직은 아니다. 조금 더 큰 틈이 필요했다.

2, 1, 0…….

‘지금!’

놈이 이번에는 조금 큰 공장 출근용 셔틀버스를 집어 들어 힘껏 던지기 위해 자세를 잡은 순간, 진가희는 번개처럼 폐차량을 밟고 도약했다.

놈의 목을 단숨에 잘라 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목과 몸통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통짜 몸매를 가지고 있는지라, 아쉬운 대로 팔 하나를 받아 가기로 했다.

폭발적인 기세로 튀어나온 그녀가 로켓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며 검광을 번뜩인 순간, 셔틀버스를 집어 들고 던지려던 영역 지배자의 오른쪽 팔이 어깨 아래로 매끄럽게 잘려 나갔다.

때문에 머리 위에 들고 있던 셔틀버스가 영역 지배자의 위로 떨어지면서 추가 타격을 입은 것은 덤. 진가희는 어그로 핑퐁과 기습까지 완벽하게 수행한 뒤 다시 모습을 감췄다.

-■■■■■■■■■■■■■!

이번에는 조금 더 고통스럽게, 그리고 처절하게 울부짖은 영역 지배자는 한번 잘려 나간 자신의 팔을 필사적으로 이어 붙이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흩뿌린 살덩어리를 도로 불러들여 융합시킬 때와는 달리, 외부의 자극으로 손상된 살덩어리는 다시 복구되지 않았다.

당황하고 있는 놈의 머리 위로 다시 한번 쏟아지는 탄환 세례.

어디선가 기습적으로 날아드는 화염병.

또 한 번 살덩어리를 괴사시키는 무시무시한 신경독이 발린 볼트.

영역 지배자는 자신의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생각’했다.

거대한 육체는 분명 뛰어난 내구도와 놀라운 파괴력을 가져다주지만, 그만큼 피탄 면적이 넓어 다수의 적들이 가하는 동시다발적인 공격에 쉽게 노출된다.

그렇다면 피탄 면적을 좁히고 반응 속도를 높여서 약삭빠르게 도망치는 쥐새끼들을 하나씩 하나씩 압도해 버리면 그만 아닌가? 아니, 불가능하다.

난쟁이가 거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듯, 거인 또한 난쟁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 관점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영역 지배자는 다시 한번 몸을 응축시켰다.

쓸모없는 살덩어리는 과감하게 쳐 내고, 이미 곳곳에 퍼뜨린 자신의 살덩어리에게 ‘신호’를 보낸다.

흐느적거리고 있던 살덩어리들 또한 신호를 받고 똑같이 몸을 응축시켰다. 아무렇게나 떼어 낸 살덩어리들은 자신과 똑같은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지만, 모두가 똑같은 형태로 변화한다면 얘기가 달라질 터.

* * *

“2라운드가 끝 아니었나?”

저 덩치만 큰 머저리가 계속 우리의 치고 빠지는 다굴빵 전략에 정신을 못 차리도록 얻어맞다가 뒈지길 바랐건만, 내 기대를 배신하듯 놈은 다시 한번 자신의 형태를 변형시키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좀비(변종)를 양산하거나 자신의 살점을 일반 좀비로 개조시키는 특수 개체인 만큼 숨겨진 수가 더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전투 도중에 갑자기 애벌레처럼 고치 속에 틀어박히니 나를 포함한 팀원 모두가 의아해하고 있었다.

심지어 고치 형태로 변한 것은 놈뿐만이 아니었다. 놈이 우리의 발목을 잡기 위해 마구잡이로 흩뿌린 살점(일반 좀비)들 또한 차례차례 고치 속으로 틀어박혔다.

마치 특정 신호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다시 융합하려는 목적은 아닐 테고, 본체부터 작은 살덩어리까지 빠짐없이 고치에 틀어박힌 이유가 뭐지?’

나는 시험 삼아 소총을 들어 본체가 숨어든 고치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관통 옵션이 붙은 수제작 탄약도 고치를 완전히 뚫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고치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다시 한번 SMAW로 열압력탄을 쏴 볼까 고민했지만, 저런 튼튼한 고치의 외피라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L마트 지하에서 봤던 변종을 양산해 내던 그 고치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저 고치에서 나오는 게 변종은 아니겠지.’

어쩌면 더 끔찍한 무언가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다른 팀원들도 각자 위치에서 숨죽인 채 고치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직후, 정적이 내려앉은 거리 한복판에서 뿌드득 하고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내가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췄을 때.

후우우우웅!

무언가가 내 머리 위를 한 끗 차이로 꿰뚫고 날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