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투쟁기 (40)
두근두근.
오랫동안 고요하게 뛰고 있었던 심장이 강렬한 전기 자극을 받은 양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요 근래 최대한 흥분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제하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 정체 모를 위협이 도래하자 전신의 감각이 내 통제를 벗어나서 마구 날뛰는 느낌이었다.
우리 앞에서 떡하니 넓은 대로를 틀어막고 있는 저것은 그야말로 인세의 지옥이라고 불려도 손색없는 외형을 갖추고 있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환 공포증을 유발할 만큼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얼굴들, 지네의 다리를 떠올리게 할 만큼 무수히 돋아난 팔과 다리, 그런 괴반죽 살덩어리에서 흘러내리는 기분 나쁜 점액질까지.
호감을 가질 만한 요소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는 저것이 괴성을 내지른 순간, 우리의 몸은 잠시나마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영역 지배자가 영역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직업 숙련 레벨이 25 이상입니다.(Lv. 36) 영역 지배자의 ‘위협’을 저항해 냈습니다.
-해당 영역 내에 존재하는 모든 적성체(생존자)는 전쟁이 종료되기 전까지 해당 영역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퇴역병’은 영역 지배자의 영역 내에서 거점 지정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상위 스킬 존재 여부 : 영역 지정)
-영역 지배자는 해당 영역 내의 모든 하위 개체에 대한 통제권을 소유합니다. (상위 스킬 존재 여부 : 영역 통제)
-전투 승리 조건 : 영역 지배자 사살
-전투 패배 조건 : 적성체(생존자) 사망
-전투 승리 보상 : 전투에 참가한 모든 적성체(생존자)의 숙련 포인트 +15, 결정타를 달성한 적성체(생존자)는 특수 DNA 샘플(1)과 +10 숙련 포인트, 영역 지배자가 보유한 스킬 중 하나를 확률로 획득.
순간 각성자인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시스템의 메시지.
이건 내가 숱하게 거점들을 접수하면서 겪어 왔던 ‘거점 전쟁’과 상당히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설마 각성자뿐만 아니라 좀비도 스킬을 보유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솔직히 각성자조차 위협하는 변종들이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원거리 공격형 좀비가 집중포화를 퍼부으면 어지간한 각성자도 버티지 못하고 사망하거나 감염될 수 있다.
폭발형 좀비는 또 어떤가? 근거리 폭발을 스킬로 방어하거나 피하지 못하면 시체의 흔적도 찾을 수 없게 산화해 버릴 거다.
게다가 어젯밤 우리가 거의 아작 내 버렸던 야행성 변종도 순수한 신체 능력으로는 각성자와 비등비등한 수준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인류에게 위협적인데, 스킬을 보유한 좀비까지 나왔으니 벌써부터 앞길이 막막해지는 기분이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강한 좀비가 나타나 봤자 스킬은 각성자 고유의 특성일 거라고만 생각해서 무의식적으로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이야.
“어구구구…….”
“사, 사장님……!”
현장에서 다져진 근육질이 인상적인 오함마 아재와 이현성조차 파들파들 떨면서 자신들의 무기를 손에 놓치기에 이르렀다.
나보다 직업 숙련 레벨이 한참이나 낮기 때문에 영역 지배자의 ‘위협’ 스킬에 저항하지 못한 것이 원인인 듯했다. 당연히 다른 팀원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내게 어깨가 붙들려서 끌려 왔던 진가희 정도가 눈을 질끈 감고 검도 특유의 자세를 취한 채 버티고 있었다. 명경지수, 뭐 그런 건가?
불행 중 다행이라면 영역 지배자가 우리를 상대로 영역 전쟁을 선포하자마자 곧바로 달려들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만약 팀원들이 이렇게 힘을 못 쓰고 있는 상황에서 냅다 달려들었다면 적잖은 피해가 발생했을 터.
나는 인벤토리에서 차갑게 식은 물병을 꺼내 팀원들에게 물을 휙휙 뿌렸다.
이 겨울에 찬물을 끼얹어 주니 하나둘씩 정신을 차렸다.
“다들 정신 차려요. 세상이 이 지경이 됐는데 백 날 천 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당장은 운 좋게 도망쳐서 피난처에 몸을 숨긴다고 해도 안전한 건 잠깐뿐이에요. 대구가 하루가 멀다 하고 좀비들의 습격을 받았던 건 놈들이 본능적으로 인간을 찾아 나서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어디 외딴섬에 기어들어 가서 평생을 원시인처럼 살아갈 게 아니라면, 차라리 싸워서 원흉을 제거하세요. 그게 진정 여러분이 안전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물론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나도 당연히 도망치자고 했을 거다.
하지만 도망친 후에는 반드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또 다른 계획을 세우고, 더 많은 전투원을 확보했겠지.
이미 좀비들에게 많은 영역을 빼앗긴 인간은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고, 도망쳐서도 안 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역을 되찾기 위해 이를 악물고 싸워서 승리해야만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더욱이 지금처럼 퇴로가 막힌 상황이라면 지레 겁먹기보다는, 궁지에 몰린 쥐도 고양이를 물어뜯을 수 있다는 각오를 본받아야 한다.
“……그렇지, 젊은 사장 말이 맞아. 내 한평생 힘들고 더러운 공사판만 전전했지만, 몸이 아프다느니 귀찮다느니 같은 핑계를 대면서 피한 적은 없었어.”
먹여 살릴 가족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오함마 아재가 묵직한 오함마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저 터질 듯한 노동 근육과 햇빛에 탄 짙은 피부는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나타내 주는 훈장과도 같았다.
그에 동조하듯 다른 팀원들도 하나둘씩 자세를 바로잡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영역 전쟁이 선포되면서 전투가 종료되기 전까지는 도망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싸워서 이겨야 한다.
그 어떤 보상보다도 달콤한 ‘또 한 번 내일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보상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팀원들의 기백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나는 즉시 임시 포지션을 지정해 주었다.
다수 대 다수의 싸움이 아닌, 다수 같은 힘을 가진 일 대 다수의 싸움인 이상 기존의 포지션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원거리 공격과 근거리 공격군을 막론하고 발이 빠르고 몸놀림이 날랜 사람이 놈을 ‘교란’하죠. 방어보다는 회피를 중요시하고, 이왕이면 회피 스킬을 가진 사람들이 선행하는 게 좋아요. 그리고 강력한 화력이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스킬을 보유한 사람은 ‘교란’에 성공해서 놈의 빈틈이 생길 때까지 기회를 보며 좋은 위치에서 대기하세요. 공격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개인에게 주어진 공격 기회는 한 번뿐이라고 생각하고 움직이세요. 팀원과의 연계, 연격, 집중포화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나는 눈으로 영역 지배자가 가진 흉포한 무기들을 훑으면서 팀원들에게 주의 사항을 전달했다.
놈이 가진 가장 흉포한 무기는 크게 셋이다.
압도적인 크기, 무수한 얼굴들이 가지고 있는 귀와 눈(감시 체계), 그리고 일단 사정권 내에 들어오면 그 어떤 생물이든 붙잡을 수 있는 빼곡한 팔과 다리.
저런 놈에게 무작정 다구리를 놓겠다며 우르르 달려들어 봤자 사이좋게 팀원 모두가 놈의 한 끼 식사로 전락할 미래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 번의 공격 기회에 한 번의 공격, 이건 바꿔 말하면 자신에게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는 섣부른 행동이 금지된다는 얘기예요. 설령 다른 팀원이 위험하더라도 방침은 바뀌지 않으니 꼭 지키세요. 다 같이 죽기 싫다면 더더욱.”
긴장한 팀원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지금까지는 서로 밀어 주고 당겨 주면서 적극적으로 팀원을 도왔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철저하게 개인 단위로 움직여서 팀이 가진 효율을 최대한 끌어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운 것이리라.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누군가가 자신의 포지션과 임무를 망각한다면 팀 전체가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고, 작은 피해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을 더 큰 피해로 만들 위험이 있다.
5년 동안 숱하게 겪어 봤으니까 안다.
“그럼 이제 움직여요!”
그 말과 동시에 나는 회피 스킬 중에서도 꽤나 괜찮은 스킬 중 하나인 짚라인의 후크를 건물 외벽으로 쏘아 냈다.
후크가 걸린 짚라인을 급속하게 감으니 내 몸이 자석에 달라붙는 철 조각처럼 빠르게 이끌려 갔다.
자신의 시야에서 내가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인 탓일까, 지금껏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던 영역 지배자가 마침내 거구를 움직여 내게 ‘손’을 뻗었다.
그것은 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기괴하고 거대했다. 확실한 건 저 손에 붙들리면 아무리 나라도 절대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거다.
건물 외벽을 박차고 단숨에 옥상으로 올라간 나는 재빨리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콰아아아앙! 하고 후방에서 건물 외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희뿌연 돌가루와 콘크리트 파편들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영역 지배자는 대수롭지 않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제법 높은 건물 옥상에서 놈과 시선이 마주치는 느낌은…… 그다지 설명하고 싶지 않다.
‘크기는 못해도 10m 이상, 필요하다면 저 기괴한 살덩어리를 조작해 몸집을 더 키우거나, 더 유연해질 수도 있다는 건가.’
상당히 성가신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가까운 건물의 옥상으로 내달렸다.
콰르르르르르르르!
내 움직임에 맞추듯 놈의 손이 건물 외벽을 파도처럼 휩쓸어 버리면서 따라붙었다. 저놈은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상식을 굴삭기처럼 싹 다 뒤엎는 것 같다.
‘하지만 시선을 끄는 게 나 혼자인 건 아니지.’
여차하면 짚라인을 써서 다른 위치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단순한 교란은 교란이 아니다.
마치 한여름 밤에 잠들지 못하는 내 머리 위에서 윙윙 날아다니는 모기들처럼 끊임없는 기출 변형과 변화구가 필요하다.
꽈앙!
저 멀리서 터져 나온 대포 같은 포성에 힐끔 고개를 돌리니, 엽사 한동석이 붉게 달아오른 엽총을 들고 냅다 도망치고 있었다. 묵직한 한 방을 쏴서 영역 지배자의 주의를 돌리자마자 도망치는 것이다.
놈의 주의가 잠깐이지만 내게서 벗어났을 때, 나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SMAW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다른 건물로 짚라인을 이용해 날아가면서 열 압력 탄두 로켓을 발사했다.
허공에서 발사된 로켓이 정확히 놈의 뒤통수-앞인지 뒤인지 모르겠지만-에 꽂히자 막대한 폭발과 화염이 작렬했다.
시선을 돌리고, 다시 시선을 분산시키고, 툭툭 건드리고, 도망치고, 그렇게 어지간한 성인군자도 이마의 혈관이 튀어나올 것 같은 상황을 연출하자 놈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놈은 직접 움직여서 우리 모두를 잡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자신의 거구를 한껏 응축시켰다가 다시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그 반동으로 놈의 살덩어리에 파묻혀 있던 크고 작은 살점들이 주변에 마구 흩뿌려졌다.
저 살덩어리에 닿으면 감염이라도 되는 건가 싶어 슬쩍 피했는데, 자세히 보니 지면에 떨어진 살점이 꿈틀대면서 인간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어어어어어어……!”
좀비다.
신체 능력이 고만고만해서 각성자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일반 좀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만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면, 놈들은 목을 자르거나 박살 낸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는 거다.
“염병.”
찌르고, 베고, 부수고, 태워도 무력화되는 것에서 그치는 무수한 좀비 군단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자 우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일반 좀비 놈들에게 발목을 잡혀도 죽고, 영역 지배자에게 잡혀도 죽는다.
크기가 반쯤 줄어든 영역 지배자는 2라운드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냐고 묻는 것 같은 얼굴로, 거대한 고릴라처럼 건물 외벽을 기어올라서 우리를 뒤쫓기 시작했다.
게임 좆같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