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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39)화 (140/227)

139화 투쟁기 (39)

“누가 내 욕을 하나?”

잡음만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꺼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창밖으로 희미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불침번을 서고 있던 진가희와 이형진이 창가 근처에 기대어 커피를 마시다 말고 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커피 한 잔 드려요?”

“고맙긴 한데 마음만 받을게요. 불면증 있어서 커피 마시면 안 되거든요.”

“그런 것치곤 잘 자던데요? 끙끙대면서 몸을 엄청 비틀긴 했지만.”

진가희가 키득키득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혼자 사는 사람은 자기 잠버릇이 어떤지 모른다던데, 나는 죽은 듯이 조용히 자는 타입은 아니었구나. 아니, 어쩌면 간밤에 꾼 꿈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만 꿈이라는 건 휘발성이 매우 높은 기억이라 잠에서 깬 지 몇 분 만에 금세 잊어버렸다. 끙끙대면서 몸도 비틀었다면 어떤 꿈을 꿨는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아침에 자고 일어난 인간에게는 크게 세 가지가 부족하다.

수분, 당분, 그리고 카페인.

나는 카페인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분에 당분, 그리고 당분을 한 스푼 더 얹은 완전식품인 레모네이드를 꺼내 들었다.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레모네이드 한 병을 쭈욱 들이켜고, 곧바로 개인 정비에 들어갔다.

불침번이 여유롭게 모닝커피를 즐기고 있다는 건 은신처 주변에서 별다른 일이 없었다는 증거였으나, 은신처 주변이 멀쩡하다고 다른 지역이 멀쩡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어제 그 짓거리를 저질렀으니 구미 내에 자리 잡고 있는 좀비들은 필연적으로 신경이 곤두섰을 거다.’

지금처럼 햇빛이 쨍쨍한 낮에 활동하지 못하는 변종의 수는 크게 줄여 놨지만, 반대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움직이는 일반 좀비는 여전히 개미 떼처럼 많을 것이다.

변종의 통제를 받지 않는 놈들은 지금쯤 구미 전역으로 고르게 퍼져 나갔을 텐데, 그 말인즉슨 우리가 마음 놓고 움직일 수 있는 루트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팀원들 깨워 주세요. 30분 내로 정비하고 움직여야겠어요.”

“상당히 급하신 것 같은데, 이유를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어제는 우리가 변종을 소탕하고 좀비 놈들의 어그로를 다른 곳에 집중시켜 뒀기 때문에 별일이 없었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지금이라면 사정이 다를 테니까요. 변종보다 더한 상위 개체가 이곳 구미에 있다고 추측되는 이상, 이곳에 오래 남아 있어 봤자 좋을 게 없어요. 그놈이 우리를 노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것도 그렇군요. 지금 당장 팀원들을 깨우겠습니다.”

빠르게 공단 내부를 조사하고 대구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조사도 포기하고 냅다 도망쳐야 할 수도 있다. 공단 내부는 불확실성투성이였으니까.

어제는 해가 떨어져서 움직이지 못했지만 해가 뜬 지금이라면 아직 여유가 조금 있다.

이형진이 안쪽에서 자고 있는 팀원들을 깨우러 간 사이, 나는 오늘 하루도 에너지를 팍팍 써 줘야 하는 진가희에게 먹음직스럽게 포장된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내가 거점으로 보유하고 있는 마트, 기차역, 병원, 공항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편의점이나 빵집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거다.

덕분에 거점이 없는 타지에서도 이렇게 영양가 있는 한 끼 식사를 챙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와…… 진짜 이 시국에 이런 귀한 걸 챙겨 주는 사람은 사장 오빠뿐일 거예요.”

“고작 샌드위치 정도로 뭘요. 부족하면 말해요.”

전장 한복판에서 개처럼 구르며 미지근한 물로 불려 먹어야 했던 보급 쌀국수나 싸구려 전투 식량의 맛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분명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건 우리였는데, 정작 식사 추진이랍시고 병사들에게 먹인 건 짜요 밥이었다. 편하게 후방에서 지휘나 하던 놈들은 뜨끈한 국밥이나 푸짐한 백반을 먹었겠지.

그렇기에 더더욱 최전방에서 활약하는 전투원에게 지급하는 식사는 완벽해야 한다. 영양가 있고, 맛있고, 푸짐하게.

이 나라는 나 같은 놈들에게 그런 기본적인 것도 지켜 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걸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고 보니 자기가 마장동 정육점 아들이라고, 전역하면 꼭 한번 A++ 한우 풀코스로 대접하겠다던 동기가 있었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본 게 우리 부모님의 이름 석 자가 새겨진 추모비 하나뿐이었는지라 동기들과 해후를 나눌 여유는 없었다.

반쯤 영혼이 나간 채로 집과 가재도구를 다 팔아 버리고 유산과 보험금을 챙겨서 도망치듯 김해로 내려왔으니까.

“쯧.”

아침부터 칙칙한 생각을 하면 하루 종일 입맛이 좋지 않으니 이쯤 하자.

하나둘씩 일어난 팀원들에게 식사를 나눠 준 나는 마지막 조사 지역인 공단에 대해 설명했다.

공단에 뭔가 있는 건 확실하다. 그건 이미 팀원들도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공단 내부까지 굳이 조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팀원도 있었다.

어제 그런 광경을 봤으니 두려움보다는 생리적인 거부감이 든 것이겠지. 이해한다.

하지만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건 나다. 내가 보수를 지불하고 책임을 고수하는 이상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내 말을 들어줘야겠다.

“마지막으로 조사할 곳은 어제 그냥 지나쳐야 했던 1공단로의 최중심부입니다. 좀비들이 1공단로 주변을 에워싸듯 경계하고 있었던 점, 외부에서 복귀한 변종들이 1공단로 내부를 거쳐 움직였다는 점 등을 근거로 그곳에 뭔가 있다는 게 제 추측입니다.”

“어차피 변종의 상당수를 처리한 지금이라면 그냥 대구로 복귀해서 군대와 각성자들을 대거 동원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한동석이 눈가에 붙은 눈곱을 떼며, 배를 북북 긁으면서 질문했다. 이미 예상했던 질문이라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다.

“구미에 자리 잡고 있는 좀비를 모조리 소탕하기 위해 대구의 군대와 각성자들이 얼마나 화력을 투사할 수 있을까요. 안 그래도 부족한 화력을 제대로 된 정보 없이 투사해서 성공적으로 좀비를 모조리 소탕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되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이군요. 이해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군대라는 게 참 보수적인 집단이에요. 확실한 정보가 없으면 절대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죠. 사실 병력을 운용함에 있어서 그게 맞기는 하지만, 중요한 건 ‘구미 좀 박살 내 주십쇼’ 하고 부탁한들 우리 말을 들어줄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하다못해 원점 타격을 유도할 만한 근거가 필요하다 이 말입니까.”

“그렇죠. 이대로 돌아가 봤자 반쪽짜리 조사로 끝날 뿐이니까요.”

나는 스마트폰 지도 어플을 이용해 1공단로 최중심부에 위치한 특정 공장들을 찍었다. 모두 다른 공장들보다 평균적으로 규모가 큰 공장들이었다.

“어제처럼 어렵게 생각할 건 없어요. 조사해서, 기록을 확보하고, 대구로 복귀하면 끝이니까요.”

물론 조사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초래되면 즉시 미리 짜 둔 도주 루트를 이용해 도망친다는 말도 덧붙였다.

간단한 식사도, 개인 정비도, 브리핑도 끝내자 우리는 곧바로 은신처를 정리하고 거리로 나섰다.

넓은 거리에는 변종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대신이라고 할까, 통제받지 않고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는 일반 좀비들이 상당히 많았다.

김해나 부산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익숙한 좀비 아포칼립스틱한 광경을 구미에서 마주하자 새삼 반갑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넷플러스를 너무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 내 뇌가 이 상황을 좀비 아포칼립스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들키는 것이 위험했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경보를 울릴 변종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포지션이고 뭐고 모든 팀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반 좀비를 처리했다.

촤아아아악!

검 한 자루로 일반 좀비 서너 마리를 일격에 베어 버리는 진가희는 흡사 검귀와 같았는데, 역시 어제는 움직임을 상당히 제약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변종에게 들키면 도시 전체가 우리를 집어삼키려 달려들 것이라는 압박감에 짓눌려 있던 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는지, 다른 팀원들도 찌뿌둥한 몸을 푸는 느낌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퍼억!

오함마 아재가 골프 치는 자세로 좀비의 복부를 후려갈기자 반으로 접힌 좀비의 시체가 투포환처럼 날아가서 다른 좀비를 덮쳤다. 투포환으로 볼링핀을 무너뜨리는 광경이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그래, 이거지. 각성자가 어디 동네북도 아니고 고작 일반 좀비 상대로 쩔쩔매는 게…….

“……음?”

나는 새총으로 볼트를 쏴서 좀비의 머리통을 터뜨리다 말고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이상하다.

이 느낌은 뭐지?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무엇이 내 감각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거지?

나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전장을 훑었다.

변종 없음, 오케이.

아직 다른 구역에서 소음을 듣고 몰려오는 다른 좀비 떼 없음, 오케이.

부상당하거나 위태로워 보이는 팀원 없음, 오케이.

남은 건 걸리적거릴 만큼 지면에 한 가득 쌓여 있는 좀비 시체들뿐.

“!”

나는 저 멀리서 어기적대는 좀비까지 마저 처리하기 위해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진가희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녀가 내게 의문 섞인 시선을 보내왔지만, 나는 그녀를 기어코 뒤로 돌려보냈다.

좀비 시체가 왜 아직까지 남아 있지?

“……다들 시체에서 떨어져요.”

“예? 그게 무슨…….”

“좀비 시체에서 떨어지라고요!”

지금껏 수만 마리에 달하는 좀비를 처리해 온 나는 일반 좀비와 변종 좀비의 시체가 정확히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사라지는지 숙지하고 있었다.

일반 좀비는 처리하고 나면 대략 30초 안에 시스템에 의해 사라진다. 우리가 부산역에서 ATX를 동원해 엄청난 좀비 떼를 학살하고도 ‘시야’가 가로막히지 않았던 건 죽인 만큼 시체가 빠르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변종 좀비는 일반 좀비보다 시체가 조금 더 늦게 소멸한다. 그래도 대략 1~2분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전투를 시작한 지 얼마나 흘렀지? 최소 3분은 넘었다.

다들 어제 변종들을 상대하느라 받았던 스트레스를 일반 좀비 상대로 해소하느라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픽픽 쓰러지는 일반 좀비의 시체는 그만큼 빨리 소멸해야 한다는 사실을.

“좆됐네.”

변종이 없는 지금, 조사 자체는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안이한 생각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우리가 슬금슬금 물러나자 지면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좀비 시체들이 흐물흐물한 살덩어리로 녹아내리더니, 곧 한 지점으로 뭉쳐서 거대한 살덩어리로 거듭났다. 어제 L마트 지하에서 본 배양 기관과 흡사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느샌가 다른 구역에서 흘러 들어온 일반 좀비들도 우리를 무시하고 저 거대한 살덩어리에 다가가 융합하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다는 듯이.

생각해 보면 좀 우습긴 하다.

우리가 이미 한바탕 난리를 피웠는데, 대체 어째서 상위 개체가 가만히 자신의 거처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지?

이건 용사 일행이 마왕성까지 찾아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려 주는 마왕의 스토리를 다루는 왕도적인 판타지 소설이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냉혹한 현실이다.

-■■■■■■!

집채만 한 크기까지 부풀어 오른 거대한 살덩어리에서 튀어나온 무수한 인간의 얼굴들에서 형용할 수 없는 괴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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