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투쟁기 (38)
“적당히 해, 미친 새끼야. 하루 종일 라디오만 붙들고 뭐 하는 거야?”
이기열은 태산 같은 손뼉으로 자신의 역미간(뒤통수)를 노리는 초법적 기습을 호기롭게 피해 냈다. 의자 위에서 과하게 몸을 비트느라 쿠당탕하고 넘어지는 것까지 피할 수 없었지만.
“으윽! 묵호 아쎄이! 본 교관은 배후 기습을 용납한 적이 없다!”
“지랄 그만하고 내려와서 밥 처먹어라.”
“……또 고랭지 배추로 만든 싱거운 배추무침과 된장 풍미만 첨가된 된장국인가?”
배추겉절이는 그 유명한 씨름 장사 출신 국민 MC도 인정한 ‘고기보다 맛있는 풀떼기’였지만 지금은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들이 관리하고 있는 북진성채의 수많은 민간인들에게 겉절이를 먹이려면 조미료가 굉장히 많이 필요하다. 정작 그 조미료를 구할 방법이 없어 다들 가볍게 물에 데치거나 소금만 친 배추를 맨밥에 먹고 있는 실정이었다.
흡사 북한군처럼.
“아니, 정찰 나간 호연이가 산에서 멧돼지 잡아 왔다.”
“브라보, 브라보, 김호연!”
박수를 치며 벌떡 일어난 이기열이 재빨리 초소를 빠져나가려던 순간, 최묵호가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할 거냐? 북진군 출신 대부분은 이미 죽거나 좀비가 됐을 텐데. 막말로 너도 나 아니었으면 그 정신 병원에 계속 갇혀 있다가 죽었을 거 아냐.”
“두려운가, 아쎄이?”
“야이씨…… 두려운 게 아니라 현실을 보자는 거지. 우리 같은 북진군 출신이 전쟁 끝나자마자 어떻게 됐는지는 네가 가장 잘 알 거 아냐. 북진군 출신의 절대다수가 정신 병원이나 요양원에 들어가고, 가족들 품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한 줌밖에 안 돼. 그런데 이제 와서 공개 채널로 방송 내보내면 북진군 출신이 알아서 찾아올 거라고? 괜히 이 근방의 약탈자나 미치광이 새끼들한테 빌미만 주는 꼴이잖아. 내 말 틀려?”
이기열은 최묵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요컨대 그는 지금 이렇게 대책 없이 방송을 내보냈다간 하늘에서 똥 폭격을 퍼붓는 사악한 참새와 시체를 탐하는 지상의 까마귀들이 습격해 올 것이라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최묵호의 다리가 후덜덜 떨리고 그의 각개 빤스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앙증맞은 찐빠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기열은 자신을 새하얀 공간에 가둬 두었던 사악한 종자들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뇌 내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미래에 대비해 왔다.
그 대비란 대부분 자신이 머지않은 미래에 이세계에서 전쟁하고 나면 어떤 짐승 귀 노예를 살지, 또 어떤 명언을 툭툭 내뱉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대단해, 기열쿤!’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미래에 대한 대비를 했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나.
“나는 북진 용사들을 믿는다, 아쎄이.”
“지랄. 우리 동기들이 삶에 대한 미련과 집착보다 죽음과 휴식에 대한 갈망이 더 깊고 크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최묵호는 스포츠 스타일로 깔끔하게 깎은 자신의 머리에서 유일하게 모발이 자라지 않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더듬었다. 부비 트랩이 터지면서 그 파편이 두피를 스치면서 찢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 보면 맹수의 무시무시한 발톱에 당한 것이라고 착각할 만큼 선명한 상흔이었다.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 봐라. 종전 이후에 우리 같은 북진군 출신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의료 시스템이 잘된 지역이 어디냐? 수도권이잖아. 그리고 그 수도권에서 못해도 수백만 단위의 좀비 새끼들이 터져 나왔다고.”
정신 병원, 요양원의 공통점은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굉장히 많은 품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보호사(도우미)부터 간호조무사, 간호사, 의사, 거기에 청소부까지. 여기까지만 해도 기본적인 인원에 불과하며 더 나아가서는 상시 근무 경비원과 사설 경비업체의 도움, 그리고 종전 이후 그들의 복리 후생을 위해 바쁘게 뛰어다녀야 하는 공무원들까지.
단 한 명의 퇴역 군인을 돌보기 위해 동원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그 단위가 최소 수만에서 10만 이상이라면?
대한민국에서 인프라와 시스템을 따라올 지역이 없는 수도권만이 북진군 출신 대부분을 품어 줄 수 있었다.
오히려 세금이 아깝다느니, 관리하기 귀찮다느니 같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세간에 막 풀어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판명된 사람들이니 당연한 조치였다.
그렇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살아남은 북진군 출신은 적을 수밖에 없다.
최묵호의 말마따나 멀쩡하게 사회로 복귀한 사람들은 한 줌에 불과하며, 꼭 입원하지 않더라도 전문 의료 시스템을 이용한 통원 치료를 위해 수도권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리 동기는 거의 다 죽었어. 살아 있는 놈들을 다 모아 봤자 향우회도 못 만들걸.”
씁쓸하게 비관적인 말을 늘어놓은 최묵호에게 이기열은 딱히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지 않았다.
이런 놈들은 위로와 격려로 컨디션을 회복시킬 수 없다. 전장에서 울고불고 부모님을 찾는 놈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발악하는 놈들에게 그런 말은 아무짝에도 소용없었으니까.
효과적인 것은 오직 오도짜세기합 정신을 주입하는 것뿐이었다.
이기열은 말없이 자신이 직접 만든 임시 초소를 내려갔다가, 다시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 올라와 축 처진 최묵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그리고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최묵호의 멱살을 잡고 끌어 올렸다.
“네가 선택한 북진멸공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내가 선택을 안 했는데 왜 버텨, 미친놈아!”
“네가 선택한 거다!”
“선택 안 했다고!”
인생은 삶(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이라는 그럴듯한 명언을 궤변처럼 늘어놓으며 최묵호를 세뇌하려던 이기열이었지만, 결국 똑같이 가슴팍을 얻어맞고 초소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병원도 갈 수 없는 이 혹독한 시대에 몸을 함부로 굴리면 어떡하냐고 쓴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두 사람은 이미 각성자였기 때문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몸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면서 식당으로 향한 두 사람이 마주한 것은 테이블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멧돼지 고기와 앞치마를 차려입은 김호연이었다.
과묵한 성격에 사나운 인상, 굵직하면서도 낮은 목소리를 가진 그는 마장동 정육점 주인장 아들다운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단체 생활에서 식사 시간만큼은 꼭 준수하라고 했을 텐데.”
“이 새끼가 또 라디오 붙들고 있길래 끌고 오느라 늦었다. 됐냐?”
“묵호 아쎄이가 북진 용사들의 얼과 정신을 무시해서 기합을 주느라 늦었다.”
김호연은 한숨을 푹 쉬더니, 목이 빠져라 고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큼지막한 고기를 썰어서 나눠 주기 시작했다.
이기열이 북진 성채라 부르고, 실제로는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에 위치한 어느 산장이었다.
과거 2차 남북 전쟁이 벌어지기 전, 한국에서 평창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거금을 투자해 이것저것 개발한 평창군에는 그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관광객들을 위한 각종 숙박 시설이나 편의 시설, 올림픽에 쓰이는 스타디움과 훈련 시설 등등. 강원도는 낙후된 깡촌 산골 지역이라는 고정 관념을 탈피시켜 준 고마운 존재들이다.
덕분에 무사히 타 지역에서 흘러 들어온 피난민들과 현지 주민들을 규합해서 숨어들 수는 있었으나, 문제는 강원도라는 지역이 가지고 있는 환경적 요인이었다.
“이번 겨울을 무사히 넘기려면 더 많은 장작과 식량, 그리고 식수가 필요하겠어. 역시 타 지역까지 건너가서라도 구해 와야 하나…….”
최묵호가 멧돼지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같은 북진군 동기이며 각성자인 세 사람이 보호하고 있는 일반인은 200명이 넘었다. 그리고 개중에 싸우거나 일할 수 있는 청년 비율은 30%가 채 안 되었다.
나머지를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먹여 살리려면 결국 더 많은 물자를 손에 넣어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강원도에서 필요한 물자를 충분히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통일 대한민국 이전에는 가장 낙후된 지역이 강원도였고, 그만큼 지역 주민들이 먹고사는 걱정만큼은 없도록 농업, 축산업, 임업, 수산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좀비가 전 세계를 뒤덮고 모든 물류 유통이 끊어진 지금, 예상대로 강원도에선 모든 물자에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오죽하면 양말 한 켤레도 구하기 힘들 정도였다.
“야 기열, 너 통신병으로 각성했잖아. 네 무전 탐지 범위에 뭐 잡히는 거 없었냐?”
“빨갱이 스-껌, 약탈자 무리, 이상한 정신병자 집단을 제외하면 이 지역 근방에서 생존자 집단은 확인되지 않는다, 아쎄이.”
“아, 이 쓸모없는 새끼. 그래도 통신 범위는 존나 넓어서 네 방송이 제법 먼 곳까지 닿았을 텐데? 네 방송을 접한 존재가 있다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위치를 특정 지을 수 있다며?”
이미 정부가 붕괴하고 군대가 제 역할을 못 하는 이 시국에 누가 한가하게 라디오 방송 따위를 듣고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최묵호는 이 덜떨어진 씹덕이 뭐 하나 건져 낸 게 있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최묵호의 질문에 멧돼지 고기를 몇 번 씹고 꿀꺽 삼킨 이기열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오늘 내 방송을 접한 사람이 하나 있기는 했다.”
“오, 어디에서?”
“구미에서.”
“!”
“…….”
구미라는 말에 최묵호와 김호연이 동시에 이기열을 바라보았다.
구미는 지금 사람이 살지 못하는 장소다. 이 시국에 사람이 발붙이고 살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적은 건 당연하지만, 구미는 특히 위험했다.
그곳에서 도망쳐 온 피난민들의 증언, 그리고 이기열에게도 ‘이상한 정신병자 집단’ 취급을 받는 놈들의 대대적인 선전 방송 내용을 조합해 보면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구미에는 ‘괴물’이 산다.
보통 괴물이라고 하면 당연히 좀비가 떠오르는 게 일반적이나, 구미에는 진짜 괴물이라 불릴 만한 놈이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았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수도권에서부터 도망쳐 내려온 군대와 피난민이 대구로 떠나자마자 바로 구미에 자리 잡은 정체불명의 괴물.
멀리서 구미의 괴물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것을 ‘육지의 쓰나미’, 혹은 ‘인세의 지옥’이라고 불렀다.
‘대구와 포항에 자리 잡은 놈들은 진즉에 구미를 포기했다고 들었는데?”
“나도 모른다, 아쎄이. 하지만 누가 내 심야 방송을 구미에서 접한 건 확실하다.”
최묵호는 이 머리 아픈 동기가 가끔 헛소리를 할지언정 자신과 김호연에게 거짓말만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총탄이 빗발치고 폭탄이 터져 나가는 전장에서 실수는 용납될지언정 허위 보고 같은 거짓말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았으니까. 북진군 출신이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유명했다.
“구미…… 구미라…… 떠돌이 생존자가 거기서 라디오 방송을 들었나?”
“그럴 리가. 아무리 떠돌이라도 그런 곳에 숨어드는 건 불가능해.”
단호하게 최묵호의 추측을 잘라 낸 김호연이 어느새 뼈만 남은 멧돼지의 잔해를 정리했다. 저렇게 먹고 남은 짐승의 뼈는 골수까지 푹 우려내서 사골국을 끓여 먹을 것이다.
“잠깐, 서울에서 치료고 뭐고 다 팽개치고 벽에 똥칠할 때까지 푹 쉬고 싶다면서 경상도로 내려간 동기가 한 명 있지 않았던가?”
곧 세 사람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확실히 동기들 중에 자신은 이 나라, 국민에게 질렸으니 평생 놀고먹겠다며 큰소리 떵떵 치고 경상도로 내려간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지방으로 내려간 동기가 그 혼자였던 것은 아니지만, 북진군 내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기에 아직도 그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댄 결과 간신히 유명인의 이름을 꺼낼 수 있었다.
“““개또라이 이승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