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투쟁기 (35)
이런 일에 익숙한 사람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익숙해져야 할 때가 있다.
어린이는 결국 어른이 되어야 하고, 어른은 사회를 위해 희생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미성년자에서 어른이 된 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은 진가희는 조사 팀의 선두에 서서 언제든지 발도(拔刀)할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그녀는 ‘준비’되었다고 하기엔 아직 많은 것이 부족했다. 세상은 그녀가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일만 겪으며, 좋은 사람들만 만나면서 차근차근 사회 경험을 쌓아도 모자랄 판에 세상이 쫄딱 망해 버린 것이다.
그녀를 지도해 주던 엄하면서도 자상한 아버지는 다른 이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희생하였고, 이제는 그녀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지금 이곳에 섰다.
대구에 있는 그 누구도 지금껏 방어만 할 게 아니라 역으로 공격하자느니, 적을 알고 승리하기 위해선 조사부터 해야 한다느니 같은 주장을 하지 않았다.
당장 그녀만 해도 엽사 한동석과 함께 다니며 자경단 역할을 하는 게 전부였다. 대구라는 안전지대를 벗어나 타 지역까지 진출할 자신도, 능력도 없었다.
그런데 빠르게 동대구역을 자신의 소유로 삼은 한 남자가 당당하게 도시 밖 조사를 계획하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에겐 충분한 능력과 여건이 있었고, 의지도 매우 강력했다.
자신은 이 좋은 칼과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람을 모아서 치고 나갈 생각 따위는 하지도 못했는데, 기껏해야 대여섯 살 정도 차이 나는 청년은 훨씬 더 먼 곳을 내다보았던 것이다.
대단하다는 수준을 넘어서 경이롭기까지 한 그 자신감과 포부는 같은 각성자로서 존경하고 싶을 정도였다.
어디서 굴러들어 왔는지도 모를 어중이떠중이 각성자가 계획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자신을 이승권이라고 밝힌 남자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믿을 수 있었다.
‘기껏해야 방어선 안쪽에서 몰려오는 좀비를 처리했을 뿐인 우리를 이렇게 잘 이끌어 주고 있어. 역시 계약하기를 잘했던 거야.’
그는 적재적소에 사람을 활용할 줄 알았고, 개개인의 능력을 면밀하게 따져 가며 포지션을 수시로 변경했다.
당장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최후방에서 기습을 대비하고 있던 이형진과 그녀가 이번에는 선두에 서게 되지 않았나.
무식하게 군인들을 방어선으로 밀어 넣기만 하는 대구의 군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해야 할까, 확실히 눈썰미와 계획 능력이 남달랐다.
진가희는 그녀의 아버지처럼, 남들을 이끌어 줄 수 있는 강한 구심점(리더)이 집단에 있으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고 있었다.
강한 구심점은 많은 인재를 모으고, 그렇게 모인 인재는 뛰어난 리더에 의해 매우 효율적인 집단으로 거듭난다.
지금 자신이 소속된 조사 팀이 효율적인 집단으로 거듭나고 있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면, 이 원망스러운 세상에서 좀 더 오랫동안 살아남아, 저주스러운 괴물들을 더욱 많이 베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세상이라도 부모와 마지막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짧은 잡념이 스쳐 지나갔다.
검사로 각성한 그녀는 ‘명상’ 스킬로 하루를 시작하면 모든 감각이 하루 종일 + 보정 수치를 얻게 되는데, 때마침 매우 예민해진 그녀의 청각을 파고드는 소음이 있었다.
뒤따라오는 일행이 낸 소음은 아니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숱한 위험과 맞서 싸우면서 피를 본 그녀는 그 정도 소음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미숙하지 않았다.
미리 사전에 팀원들과 얘기해 둔 대로 그녀가 검집을 톡톡 두들기자 일행이 움직임을 멈췄다.
주변에 수상쩍은 움직임이 감지되면 예민한 감각을 가진 그녀가 특정 신호를 보내고, 추적 스킬이 있는 엽사 한동석이 주변을 파악하기로 했다.
한동석의 추적 스킬을 사용하자 추적 범위에 포착된 변종의 위치가 드러났다. 놈은 박쥐처럼 전방의 천장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일행이 아무것도 모른 채 전진했다면 난데없이 허공에서 떨어지는 변종에게 기습을 당했을 것은 자명한 일. 그녀 덕분에 대참사를 피했으니, 이제 다른 팀원이 원흉을 제거할 차례였다.
한동석이 엽총을 들고 어둠 속으로 총구를 겨눴다. 손전등 불빛은 일부러 비추지 않았다. 빛에 매우 민감한 변종은 손전등 불빛으로 비추는 순간 격하게 반응하며 움직일 테니까.
“원 샷 원 킬.”
일반인이었을 시절에 엽총 한 발로 고라니나 멧돼지 같은 커다란 짐승을 능숙하게 사냥해 왔던 한동석이 각성하면서 얻게 된 공격 스킬.
상대의 약점을 정확히 조준하고, 상대와의 거리가 30m 이내일 때 100% 치명타를 입히는 이 무지막지한 스킬은 변종이 상대일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타아앙!
노린 것은 어둠 속에서도 왕방울만 하게 뜨고 있던 변종의 눈.
놈이 박쥐처럼 거꾸로 메달려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노리기도 쉬웠다.
쿠우우웅!
그 무시무시한 변종이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허무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알을 터뜨리며 파고든 탄환이 그대로 뇌를 헤집어 버린 것이다.
동시에 이제부터 진짜 치고받는 싸움이 시작될 거라는 신호탄이 터졌다.
묵직한 총성은 외부까지 크게 새어 나가지는 않겠지만, 내부에서는 소리가 벽과 천장에 부딪혀 반향되면서 변종들의 청각을 미친 듯이 자극했다.
바깥으로 달려 나가지 않고 마트 내부에 남아 있던 변종들이 인간의 침입을 눈치채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들 조심하세요. 저라고 해서 한꺼번에 몰려드는 변종들을 전부 막아 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
진가희는 각성자가 된 덕분에 꽤나 무식한 방법으로 검을 휘둘러도 변종을 일도양단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한계는 있었다.
그녀의 체력이나 능력 이전에 검이 오래 버텨 주질 못한다.
검의 날이 상하거나 아예 부러지면 미리 상점 창에서 DNA 샘플로 구매한 수리 키트로 빠르게 수리할 수 있을지언정, 찰나의 틈은 존재한다.
그리고 변종의 뛰어난 신체 능력은 그 찰나의 틈을 파고들기에 충분했으니 다른 팀원들에게 미리 주의를 준 것이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걸 커버해 주려고 우리가 있는 거니까 걱정 말고 싸우세요.”
그랬었지.
진가희는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어 캡을 착용했다. 선두에 서게 되면 마구 연사하는 소총의 총성이 귀를 먹먹하게 할 테니 미리 받아 둔 것이었다.
그리고 저 앞에서 하나둘씩 흉물스러운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이형진과 진가희를 선두에 세운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전직 소방관이었던 이형진은 뒤에서 보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근육을 꿈틀대며 소방 도끼를 휘둘렀는데, 그 위력은 진가희의 참격에도 절대 뒤지지 않았다.
진가희가 깔끔하게 변종을 베어 버렸다면, 그는 압도적인 힘을 이용해 문자 그대로 변종을 분쇄해 버렸다.
괜히 각성자들이 변종을 상대할 때 원거리 공격군과 근거리 공격군을 나눠서 대열을 짠 게 아니구나 싶었다. 저런 초인들이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해 준다면 나라도 원거리 무기를 들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 들고 있지만.
타타타타타타타타타!
이 영롱한 K-2C를 봐~
추가 관통력 옵션이 달린 5.56mm 고속 철갑탄(E+)을 뿌려 댄다고~
그래, 이승권. 너는 칼보다 총이 어울려.
“재장전.”
한동석이 엽총에 일일이 탄을 채워 넣고 있을 때, 나는 인벤토리에서 빈 총과 꽉 찬 탄창을 즉시 결합해서 다시 꺼내 들었다.
총알이 떨어지면 도구 제작 스킬을 이용해서 거점 창고에 존재하는 원자재를 즉시 조립, 탄약을 한가득 제작한 다음 빈 탄창과 결합했다.
인벤토리 내에서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이 일련의 작업은 사실상 나를 무한 탄창 거너로 만들어 주었는데, 유일한 단점은 이런 뛰어난 능력으로도 달아오른 총구를 냉각시킬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돌파구가 없으면 샛길을 만들어서라도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하는 남자.
하드 용량이 꽉 차서 더 이상 직박구리 폴더를 만들 수 없다면 외장 하드까지 끌어와서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 남자.
순식간에 수백 발을 넘게 쏴서 총구가 달아오르다 못해 녹아 버릴 것 같다?
“응, 달아올라 봐~ 수리 키트 쓰면 그만이야~”
상점창에서 DNA 샘플 주고 구입한 수리 키트로 내구도가 팍팍 깎여 나간 총을 원상 복구 시켰다.
전투 중에 냉각? 그딴 건 수리 키트로 해결하면 그만이다.
DNA 샘플을 이런 식으로 낭비해도 내 지갑에는 10만 DNA 샘플이 넘게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뉴동대구역에서 수익이 발생하고 있다.
무한 탄창, 무한 잔고, 무한 장비가 함께라면 무한 성장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위, 아래, 측면 할 것 없이 미친 듯이 몰려드는 변종들을 내가 무식한 화망으로 움직임을 더디게 만들면, 근거리 공격군이 적절하게 나서서 놈들의 팔다리를 자르거나 아예 목숨을 끊었다.
반면 한동석과 같은 원거리 공격군은 내 화망이 닿지 않는 곳, 혹은 화망이 부족한 곳에 화력 지원을 하며 변종들이 얼씬도 못 하게 했다.
“선두부터 움직입니다!”
나와 한동석이 이형진과 진가희의 어깨를 탁탁 치자 두 사람이 먼저 길을 뚫어 내며 앞으로 움직였다.
변종이 긴 팔의 리치와 갈고리 같은 발톱의 흉악함으로 맞섰으나, 각성자의 힘과 스킬이 담긴 금속 무기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뻗어 오는 팔을 소시지처럼 토막 내 버리고, 갈고리발톱은 잘 만들어진 유리공예품을 바닥에 떨구듯이 박살 내 버렸다.
선두가 이동하자 그 뒤를 받쳐 주는 우리도 꾸준히 이동해야 했는데, 단체로 움직이는 이 순간이 사실 가장 위험하다. 제자리에 서서 방어하는 것과 움직이면서 주변을 살피고, 적절하게 방어하는 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으니까.
우려했던 대로 후방에서 뒤따라오던 전직 노가다판 에이스 각성자 아재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그가 넘어진 상태로 오함마를 휘두르는 것보다 변종들이 달려들어 그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는 게 더 빠를 터.
나는 뒤쪽에 있던 전직 경찰을 잡아끌어서 내 자리를 맡긴 뒤, 단숨에 슬라이딩으로 아재 근처에 도달했다.
“히이이이익!”
“옮기기 힘드니까 버둥거리지 말고 놈들을 저지하는 데만 집중하세요!”
한쪽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질질 끌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총을 들고 미친 듯이 갈겼다. 바닥을 긁으며 매섭게 기어 오던 놈은 운 좋게 아재가 휘두른 오함마에 머리통을 맞아 저 멀리 튕겨 나갔다.
무사히 팀원들이 있는 곳까지 아재를 끌고 온 나는 그를 일으켜 세워 준 뒤 주변을 살폈다.
바깥으로 뛰쳐나간 놈들이 아직 복귀하지 않았음에도 이런 맹공을 받고 있다는 건, 그만큼 이곳이 놈들에게 중요한 장소라는 뜻.
‘놈들이 인간에게 과도한 적대감을 가지는 이유가 있다.’
적대감의 원인은 바로 뇌!
“파괴한다!”
또 한 놈의 머리에 든 마구니를 총으로 쏴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