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34)화 (135/227)

134화 투쟁기 (34)

이세호는 지금 자신이 대통령인지, 아니면 망국의 허울뿐인 감투를 뒤집어쓰고 있는 민간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주변인들은 여전히 자신을 대통령으로 대우해 준다. 나라가 망하고, 세상이 망하고, 어쩌면 인류가 멸망하기 일보 직전인 상황임에도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이세호 입장에선 사실 주변인들이 자신을 여전히 대통령이라고 생각해 주는 게 이득이긴 했다. 대통령이라는 지위가 없으면 그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민간인에 불과했으니까.

독도함의 함장인 박명식 대령처럼 군인들을 직접 이끌 수 있는 대단한 지휘력이나 전문 지식을 갖춘 것도 아니고, 자신의 보좌관이나 장, 차관들처럼 특정 업무에 능숙한 것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란 그저 남들보다 정치 감각이 좀 더 뛰어난 조율자에 불과하다.

대통령은 계획하고 조정하고 총괄하는 책임자의 입장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도맡아서 처리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럴 거면 대통령이 아니라 일 잘하는 공무원을 더 뽑고 말지.

문제는 바다 위 독도함에서 시간을 오래 보낼수록 대통령의 ‘조율자’ 입지가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세호가 계획하고 조정하고 책임질 일은 무엇 하나 없었다. 그저 병풍처럼,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상석에 앉아서 보고를 받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는 정도였다.

독도함 내부의 식수와 식량, 연료 문제가 어떻다느니, 합류한 미군과 어떻게 연계하여 작전을 수행할지 등등, 매 회의마다 정치인 이세호가 잘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애초에 그는 전쟁 경험조차 없다.

그 유명한 전쟁 대통령은 바로 전대의 대통령이었고, 이세호는 그저 다 된 밥에 숟가락 얹으면서 화려한 종전 선언으로 통일 대한민국의 부활을 선언한 초짜 대통령에 불과했다.

까놓고 말해서 그는 정기적으로 자신에게 보고하러 오는 아랫사람들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분명 청와대에 있을 때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자신이 알아야겠다며 열정적으로 보고를 받으며 일했던 것 같은데, 독도함에서 오래 지낼수록 그런 열정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문득 그는 옛 시대의 왕이나 황제들이 어째서 암군으로 타락하는지 알 것 같았다. 동시에 희대의 명군들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자신처럼 평범한 인간은 절대로 이런 자리를 감당할 수 없다.

그 사실을 대통령 취임 후 1년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으니 후회가 막심하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사람들에게는 구심점(지도자)이라는 게 필요하니까. 특히 이런 시국이라면 더더욱.

“후우, 담배만 있었다면 하루에 열 갑도 넘게 태웠겠군.”

마지막 담배가 떨어진 게 얼마 전이었더라. 배 위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탓에 이세호는 날짜 감각마저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대한민국의 주력군이 대부분 집결한 한반도 북부로 피난을 갈 걸 그랬다.

북쪽에서 도망쳐 내려온 미군은 그쪽도 만만찮은 지옥도가 펼쳐졌다고 했지만, 그래도 바다보단 육지가 낫지 않겠나.

“각하, 곧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

비서실장이 조용히 노크를 하고 들어와 중요 사안을 보고했다.

그 중요 사안이란 다름 아닌 제주도 상륙. 언제까지고 바다 위에 둥둥 떠 있기만 할 수는 없으니 독도함은 미군과 합류하자마자 지금까지 쭉 남하했었다.

중간 경유지로 부산, 혹은 쓰시마 섬에 들러 임시 보급을 받는 게 어떻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빠르게 묵살되었다.

먼 곳에서 확인한 부산은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는데, 특히 부산항에는 반파된 거대 크루즈선이 흉물스럽게 처박혀 있었다.

일본 쓰시마 섬도 부산과 사정이 비슷했는데, 해안가 곳곳에 보이는 크고 작은 배들이 무려 수백 척에 달했다. 그곳을 뛰어다니는 인간들? 인간이 아니라 좀비였다.

저 작은 섬조차 지옥도로 변했을진대, 군대가 주둔하지 않는 다른 섬들의 상태가 어떨지는 안 봐도 뻔했다.

결국 한국과 일본 내륙을 모두 지나친 독도함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은 처음 목표로 삼았던 제주도였다.

대한민국이 북한 괴뢰 정권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영토 수복을 하는 것과 동시에 중국의 기습적인 태평양 진출과 군사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제주도에도 군을 추가 배치했었다.

기존에도 제주도에는 해군 기지와 주둔군이 존재했고, 종전 선언 이후에도 규모가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다.

미국에서 북한이라는 방파제를 잃어버린 러시아와 중국이 아시아-태평양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며 제주도에 추가 군사 배치를 제안했던 것이다.

사실 말이 좋아 제안이었지 강요에 가까웠다. 물론 통일 대통령이라는 달콤한 과실을 거머쥔 이세호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그때는 미 해군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태평양에서 쓸데없는 국방력 낭비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이런 결과로 다가올 줄이야.’

비서실장과 함께 함교로 올라온 이세호는 박명식 함장의 옆에 섰다.

일단 군함 위에서는 제아무리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라고 해도 함장의 지위와 권위를 존중해 주어야 했다.

저 멀리 제주도가 보이자 수병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는지라 이세호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흠흠! 함장, 이제 곧 제주도에 도착한다고 들었는데, 특이 사항은 있습니까?”

“아, 각하. 오셨습니까. 일단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미 해군과 지리 정보를 공유했으며, 우선은 우도 인근에 정박하여 제주도 내부의 상황을 살피기로 했습니다.”

“우도라면 제주도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섬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제주도라는 거대한 섬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우도라면 아무래도 그 괴물들의 영향을 덜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부에서 도망쳐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제주도가 목적일 테니 말입니다.”

“일리가 있군요. 하지만 제주도에 먼저 상륙하지 않고 조사부터 한다는 것은 역시…….”

“……저희 측에서 계속 교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만, 현재까지 제주 해군 기지 측에서는 그 어떤 답신도 오지 않는 상황입니다.”

제주 해군 기지는 현재 제7 기동 전단 소속 제주 기지 전대가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최신예 이지스함으로 구성된 7기동 전대는 대한민국 해군력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해군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바다 위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기지 하나 지켜 내지 못할 정도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일반인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해군에도 엄연히 함내 및 육상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대비한 별도의 전투원들이 존재한다.

당연히 그들 역시 사격 및 전투 훈련을 받으니 기지 방위 정도는 무난하게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쯤이면 자신들과 교신하여 현재 제주도 내의 상황을 알려 줘야 할 해군 기지가 침묵 상태라니. 이세호는 다시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함장, 만약 제주 해군 기지는 물론이고 제주도 전체가 그 괴물들에게 점령당한 상황이라면…….”

“자세한 건 조사 팀을 파견해 봐야 알겠습니다만, 만약 제주도 전체가 위험에 노출된 상황이라면 최대한 빨리 항로를 변경하는 게 맞습니다.”

이세호는 차마 ‘제주도가 아니면 어디로?’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국과 가장 가까운 옆나라 일본도 안 돼, 중국은 더더욱 안 돼, 그렇다면 부족한 연료로 갈 수 있는 건 결국 한국 본토뿐이다.

치명적인 문제를 하나 꼽자면, 한국 본토 상황은 타국과 비슷하거나 더 심했으면 심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당장 이세호 본인만 해도 서울시를 기점으로 터져 나온 엄청난 수의 좀비 떼를 피해 간신히 독도함으로 도망쳐 오지 않았던가.

사태가 발발한 지 몇 주가 지난 지금이라면 국토 대부분을 상실했을 것이다.

노숙자도 아니고, 일국의 대통령이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두 사람의 무거운 대화로 함교 내 분위기도 덩달아 가라앉았을 무렵, 결국 독도함을 비롯한 미 군함이 함께 우도 근처에 정박했다.

무턱대고 육지에 상륙할 수는 없었으므로 박명식 함장은 우선 고속 보트 몇 척을 내보냈다.

조사 팀으로 선발된 군인들이 고속 보트를 타고 제주도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착잡한 기분을 들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말의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제발 아무 일 없길, 설령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군대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길.

이세호는 그렇게 속으로 빌면서 긴장으로 가득 찬 몇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제주도에 상륙한 조사 팀으로부터 무전이 들어왔다.

무전 내용은 모두가 원치 않는 내용이었지만.

-치직, 치지직…… 당소, 치지직, 신원 불명의 군대가…… 치지직, 탕! 타앙!

엄청난 노이즈와 총성, 비명이 가득 섞인 무전은 아주 잠깐 연결되었다가 뚝 끊어졌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일이 터졌음을 직감한 박명식 함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일단은 동급 함이자 2번 함인 마라도함보다 스펙이 살짝 후달리긴 하지만, 독도함은 엄연히 상륙함이자 지휘 통제함이기도 했다.

전시 상황에선 대한민국 바다의 움직이는 컨트롤 타워나 다름없는 독도함이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무전 하나 제대로 받지 못할 리가 없다.

무엇보다 신원 불명의 군대를 언급한 점, 총성이 간간이 울려 퍼졌던 점을 고려해 보면 적이 괴물이 아니라 인간임이 확실했다.

“지금 당장 제주도 내에서 전파 방해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인근에 정박 중인 미 함정에도 정보 공유한다. 현 시간부로 제주도 내에 국군이 아닌 국적 불명의 군대가 침투한 상황으로 간주하겠다. 총원 전투 배치!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함 내 스피커를 통해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수병들이 한층 더 바쁘게 움직였다.

우도에서 출발한 조사 팀이 제주도에 상륙한 지 몇 시간 만에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은 적이 이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물며 적성체가 좀비 같은 괴물도 아니고,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총화기와 미사일, 포탄을 사용하는 군대라면 위험도가 수직 상승한다.

순식간에 진짜 전시 상황과 마주한 이세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신은 종전 선언과 함께 통일과 평화를 기념한 대통령인데, 지금 이 상황은 마치 6년 전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하, 함장…… 지금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각하, 전 세계 각지에서 그 괴물들이 들끓게 되면서 안전한 땅을 찾아 떠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을 겁니다. 그리고 개중에는 당연히 강력한 군대를 앞세운 고위 권력자들이 있을 겁니다.”

‘마치 우리처럼 말입니다’, 그 말을 집어삼킨 박명식 함장은 제주도가 타국 군대에게 점령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함장 말은 지금, 강력한 해군을 동원할 수 있는 특정 국가가 우리보다 제주도에 먼저 도착해서 강제 점거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주변 국가는 중국과 일본뿐인데, 아마도 중국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근거는?”

“일본 해자대는 이렇게 능숙하지도 않고 특유의 복색 때문에 국적을 구분하기도 매우 쉽습니다. 하지만 중국군은…….”

미군에 대항해 꾸준히 비대칭 전력을 늘리고, 온갖 치졸한 방식과 기만전술로 무장한 중국군이라면 자신들의 정체를 숨긴 채 아군을 기습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무엇보다 동아시아 국가들 중 복색이 가장 튀는 군대이기도 했다.

애초에 미 해군과 한국 해군을 상대로 대놓고 전파 교란을 시도할 만큼 간이 큰 건 중국군이나 러시아군일 수밖에 없다. 일본 해자대는 한국군과 사이가 좋지 않긴 해도 표면적으로는 한미일 군사 동맹에 묶여 있었으니까.

“이런 시국에도 같은 인간들끼리 총질이나 하다니…….”

“각하, 중국과 러시아는 오랜 세월 동안 북한의 뒤를 봐주던 잠재 적성 국가였습니다. 북한이라는 방파제가 사라진 지금, 저 괴물들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아시아-태평양의 안보를 위협했을 겁니다. 단지 그 시기가 미묘하게 뒤틀렸을 뿐입니다. 그러니 각오를 다지셔야 합니다.”

“…….”

이세호는 자신의 대에서는 더 이상 총칼이 오가고 폭탄이 터지는 비극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다 꺼진 줄 알았던 전쟁의 불씨는 어느샌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여전히 더 많은 인간들이 피를 흘리길 원하는 걸까.

이세호는 어쩔 수 없이 미 해군 측 지휘부와 긴급 회동을 잡았다.

미국으로부터 전작권을 회수한 지는 꽤 됐지만, 미군과 함께하고 있는 이상 그들의 조언과 도움은 절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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