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투쟁기 (31)
시간이 됐다.
“예상대로 비는 금방 그쳤습니다. 하지만 날은 여전히 어둡고, 무엇보다 길이 미끄러워졌습니다.”
잠깐 내린 비가 뭐 그리 대수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평소에 익숙해진 환경과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적잖은 영향을 받는 동물이다.
이족 보행의 슬픈 점이라고 할까, 길이 조금 미끄러워지기만 해도 몸의 균형을 잡는 데 많은 심력과 체력을 소모하게 된다. 날이 어두워지면 시계도 나빠지는 건 덤이다.
본래 쉬기로 했던 시간보다 조금 일찍 팀원들을 깨워서 현재 기상 상황에 대해 알렸고,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할지도 경고했다.
나를 포함해서 10명, 이 위험한 도시에서 한 번에 움직이기엔 결코 적은 인원이 아니다.
“단거리 통신이 되는 무전기는 모두 지참하고 있으니 차라리 인원을 분산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누군가 그런 의견을 냈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내에서 작전을 벌일 때는 효율적인 업무 분담과 원활한 움직임을 위해 인원 분산을 해야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시가지에서 움직일 때는 오히려 인원 분산이 독이 될 수도 있어요.”
기본적으로 단거리 통신이 가능한 무전기를 전 팀원에게 지급했기에 의사소통 자체는 문제없겠으나, 분산된 팀이 위기에 처하면 다른 팀이 커버를 해 줘야 한다.
거기까지 들어가는 체력과 시간적 비용의 낭비, 위기에 위기를 더할 수도 있다는 잠재적 리스크, 전력 손실의 압박감이 우리를 짓뭉개 버릴 가능성이 있다.
나는 북한의 좁고 어두운 지하 땅굴에서나 분대 단위로 움직였을 뿐, 그 외에는 반드시 소대와 함께 움직였다. 인원이 줄어든다는 건 화력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좀비를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각성자 한 명이 감당할 수 있는 좀비는 분명 일반인보다 월등히 많지만, 그래도 각성자 5명과 각성자 10명이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좀비의 수에는 압도적인 차이가 있지 않겠나.
내가 그런 이유로 인원을 분산하는 것에 거부 의사를 밝히자 같은 의견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대신 10명이 같은 공간에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도 좀비들의 어그로를 끌 가능성이 높으니, 척후(정찰)와 후방 경계를 따로 뽑았다.
이쪽 방면에서 경험이 있는 한동석과 내가 척후를, 후방 경계에는 갑작스러운 적의 기습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진가희와 이형진이, 나머지 6명의 각성자들이 측면 경계 겸 대열의 중심을 잡아 주기로 했다.
서버가 내려간 탓에 스마트폰을 이용한 지도 어플은 실시간 지도 갱신이 안 되는 대신, 이전까지 등록된 지도 자료는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각자의 스마트폰 지도 어플에 우리가 조사해야 할 위치를 포인트로 찍어 주었다. 모든 팀원이 조사 목적과 계획을 알아야 나중에 허둥대지 않을 테니까.
“먼저 남구미로를 향해 곧바로 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하니까 조금 위로 북상해서 구미 대교를 통해 구미 공단 북부 구역(낙동강변로)으로 진입합니다.”
남구미로는 상대적으로 길이가 짧아 금방 공단 내부에 진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하필 남쪽에 위치한지라 그 주변을 배회하는 좀비들의 수가 많았다. 어슴푸레한 새벽인 지금까지 변종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도 확인했다.
교각의 길이가 조금 긴 대신, 버려진 차량과 부서진 잔해가 많아 상대적으로 몸을 숨기고 이동하기 쉬운 구미 대교를 이용한다면 좀비들에게 들킬 위험을 줄일 수 있다.
“구미 대교를 통과해 공단에 진입한다면 조금 더 위로 우회해서 폴리텍 대학 구미캠 방면으로 이동, 시내로 이동해서 주변을 조사할 겁니다. 시내에서 우리가 조사하게 될 것은 좀비들의 ‘생태’.”
뜬금없이 좀비의 생태에 대해 언급한 게 이상했을까? 몇몇 이들이 내게 의구심을 품은 시선을 보내왔다.
하지만 나는 모든 좀비가 똑같은 생태를 가지고 활동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놈들도 주변 환경에 따라 각자의 방법으로 적응하는 것이다.
“일반 좀비들이야 그렇다 쳐도, 변종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달라요. 당장 대구와 구미에선 볼 수 없는 변종이 김해에 둘이나 있고, 부산에서도 한 번 목격된 적 있어요.”
어깨에서 날카로운 가시를 쏘아 내는 원거리 공격형 좀비, 독가스를 내뿜고 자폭까지 하는 폭발형 좀비, 그리고 거점 전쟁의 보스로 추정되지만 일단 변종은 확실했던 거대 좀비 등등.
놈들은 명백하게 일반 좀비와 다른 생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좀비들이 남부 지방에 있단 말입니까? 세상 말세네.”
“좀비가 원거리 공격까지 하면 우리 같은 근거리 공격군은 쪽도 못 쓰겠네.”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잡담은 그쯤하고, 좀비의 생태를 조사해야 하는 이유는 결국 놈들의 공략에 필요한 정보를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대구 북부 외곽에서 수많은 변종들과 싸웠을 텐데, 이렇다 할 만한 약점이라든가 공략 정보 같은 걸 알아냈나요?”
내 질문에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껏해야 진형을 갖추고 원거리 공격군이 일반 좀비를 처리, 근거리 공격군이 접근하는 변종을 처리하는 주먹구구식 대응이 전부였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본 광경 역시 그랬고.
“변종의 털가죽은 매우 질긴 데다 두껍고, 근골격의 내구도가 상당해요. 어지간한 총탄 몇 발로는 치명상을 입히기 힘들 지경이죠. 하지만 그런 놈들에게도 급소는 있습니다. 어쩌면 급소만이 아니라 태생적인 한계도 있겠죠.”
나는 팀원들에게 변종의 털가죽과 근육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부위에 대해 설명하는 한편, 아직은 가설 단계에 지나지 않는 ‘과도한 에너지 소모’에 대해서도 일러두었다.
“좀비는 에너지 소모 없이 무한대의 체력을 가진 놈들 아니었습니까?”
“지금껏 싸운 좀비들 중에 딱히 지친 기색을 보인 놈들은 없었는데요.”
“변종 좀비와 싸운 시간은 극도로 짧으니까 그렇게 느꼈을 겁니다.”
잘 생각해 보면 대구 북부 외곽에서 변종 좀비가 각성자와 맞붙는 건 정말 찰나의 순간들뿐이었다.
놈들의 특기는 어둠 속에서 불시에 기습하거나, 일반 좀비들을 고기 방패로 내세우며 물량 공세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인간의 허점을 노리는 암살자 타입이었다.
실제로 지친 기색 없이 무지성으로 달려드는 건 일반 좀비들뿐이었고, 과도한 소모전을 걸지 않는 건 주로 변종이었다. 놈들은 빠르게 치고 빠지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듣고 보니 맞는 말입니다. 놈들은 한 번도 우리와 격렬하게 맞붙은 적이 없어요.”
“기습적으로 달려들어서 공격에 실패하면 즉시 물러나거나, 포위망을 뚫고 어떻게든 도시 안쪽으로 진입하려는 놈들뿐이었죠. 놈들에겐 소모전으로 각성자 한 명을 확실하게 죽이는 것보다, 더 많은 인간들을 감염시키거나 먹어 치우는 게 이득이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각성자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신체 능력과 엄청난 내구도를 자랑하는 근골격을 유지하는 모든 행위에 에너지가 소모되니까.
쉽게 설명하자면 구미와 대구 사이에서 포착되는 이 변종들은 핵 펀치를 보유한 하루살이 같은 놈들이다.
일반 좀비와 생태가 다른 건 확실하고, 놈들이 꾸준히 도시를 습격해서 인간을 사냥하고 에너지원을 확보하는 것도 그 때문일 터.
나는 구미 시내에서 다시 공단 방향으로 포인트를 돌렸다.
“변종의 주 서식처(활동지)는 아마도 시내겠지만, 놈들의 머릿수를 늘리는 변종 생산지는 공단일 겁니다.”
“좀비는 감염으로만 머릿수가 늘어나는 것 아니었습니까?”
한동석이 날카롭게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변종이 일반인을 습격해서 감염시키면 어떻게 됐죠? 또 다른 변종이 탄생하던가요?”
“그건…… 아니었습니다.”
“분명 여러분이 지금까지 꾸준히 변종들을 처리해 오는 동안 놈들이 인간을 감염시키더라도 딱히 그 자리에서 새로운 변종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럼 놈들의 숫자는 계속 줄기만 해야 정상인데, 지난 한 달 내내 대구가 받아 왔던 습격 빈도가 줄어들었던가요?”
이번에도 팀원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들 내게 고용되기 전에는 대구 북부 외곽에서 자경단 활동을 하며 좀비들의 습격을 막아 냈을 텐데, 한 달 내내 그 고생을 했다면 모를 리가 없겠지.
변종의 머릿수가 이상하리만치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반 좀비는 감염이 1차 목적, 그런데 변종은 포식을 위한 사냥이 1차 목적. 구린 냄새가 나지 않나요?”
“감염시키면 그만인데 굳이 인간을 사냥해서 포식할 이유도, 그렇게 사냥한 인간의 살점을 어디론가 옮기는 일도 없을 테니…… 예, 사장님 말이 맞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변종은 확실히 일반 좀비와 뭔가 다르다는 걸 다들 이해한 눈치였다.
한술 더 떠서 이곳의 변종은 감염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닌, 별도의 생산지가 있을 것이라는 내 추측도 어느 정도 탄력을 받았다.
“시내와 공단 내부 조사가 끝나면 남쪽으로 빠르게 빠져나와 대구로 복귀합니다. 계획 자체는 심플해 보이겠지만 구미에 도사리고 있는 좀비들의 규모를 생각해 보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유념해 두세요.”
진입, 조사, 탈출 루트까지 확실하게 정리해 준 뒤에야 브리핑이 끝났다. 슬슬 동이 틀 시간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하늘이 우중충해서 어두운 하루가 계속되겠지만.
‘지형지물이 빗물 때문에 미끄러워졌다면 매우 격렬하게 움직이는 변종들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보도블록으로 가득한 현대 도시에 미끄러움이라는 요소가 더해지면, 무조건 우리만 불리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채비를 갖춘 나는 마지막으로 팀원들에게 장비와 컨디션 점검을 지시하면서 먼저 건물 입구로 나섰다.
나와 함께 척후를 맡기로 한 한동석이 따라 나왔는데, 그는 브리핑 내내 하지 못했던 질문을 어렵사리 던졌다.
“만약 이 도시에 대한 조사가 무사히 끝나면, 그 뒤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긴요, 싹 쓸어버려야죠.”
지금 우리만으로는 힘드니까 대구에 지원 요청을 할 거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구미를 확실하게 정리하지 않는 한, 대구는 영원히 고통받을 테니까.
“만약 제가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구미를 쓸어버리자고 하면 과연 신해룡 총장을 비롯한 군부와 대구 시청 측이 옳다구나 하고 지원해 줄까요? 그럴 리가요. 전 윗대가리들에 대해서 잘 알아요. 막상 작전이 시작되면 아랫것들을 희생시키는 걸 주저하지도 않으면서 지원이 필요한 일에는 과할 정도로 몸을 사리죠. 그러니까 지원을 요청하려면 그런 양반들에게 확신을 심어 줄 정보를 일일이 수집해서 떠먹여 주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그야…… 지금은 어려운 시국이잖습니까. 무턱대고 위험한 일에 과한 인력을 투입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한 달 내내 습격을 받으면서 그 인력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 형국이기도 하죠. 제 계산대로라면 대구는 앞으로 잘 버텨도 반년을 버티면 다행일걸요.”
좀비들의 습격에 의해 일할 사람과 지켜야 할 사람들이 꾸준히 줄어드는 반면, 좀비들은 그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인간에 대한 사냥 경험도 쌓아 간다.
그럼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 때 결국 패배하는 건 어느 쪽일까? 원흉을 제거하지 않고 계속 도시에 움츠러든 채 피해가 누적된 인간 측일 거다.
이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 다녀올 필요도 없을 만큼 뻔한 사실이다.
‘안 되지 안 돼. 날 위해 일해 주고, 사회를 재건해야 할 사람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전멸해 버리면 기껏 내가 세운 계획이 물거품이 되잖아.’
이승권 대한민국 부흥 계획에 인구 수백만 도시 대구는 무조건 있어야 한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이미 좀비에게 대부분의 영역을 내주고 구석까지 몰린 인간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 역시 중요하다.
맨땅에 헤딩하는 이승권과 패배주의에 젖은 이승권, 어느 쪽과 같은 편이 되고 싶은가? 나는 당연히 상남자답게 맨땅 헤딩 이승권이 좋다.
“그러니까 대구가 멸망하기 전에 대구를 멸망시킬 원흉을 먼저 제거하려는 거예요. ‘답답해서 내가 뛴다.’ 같은 느낌이죠.”
“…….”
정확히는 ‘곧 나 대신 너희들이 뛰어야 하니까 지금은 참아 준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채비를 끝마친 팀원들이 건물을 빠져나오자 우리는 빠르게 동락 공원을 가로질러 북상했다.
수풀과 가로수가 적절한 엄폐물이 되어 준 덕분에, 아직 거리를 배회하는 좀비들이 제법 있었음에도 스무스하게 구미 대교까지 향할 수 있었다.
일단 한번 진입하면 조사를 끝마치거나, 팀이 전멸의 위기에 처하기 전까지는 되돌아 나올 수 없는 구미 공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시다.”
나와 한동석이 총을 들고 먼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