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투쟁기 (30)
말이 좋아 행군이지, 우리가 하루 종일 한 건 거의 뜀박질에 가까웠다.
각성자라 중간중간 휴식을 취해 주기만 해도 금세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점, 일반인보다 육체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 때문에 본래라면 차로 오가야 할 도시 간의 거리를 인간의 다리로 주파한 것이다.
그나마 좀비들과의 전투가 없었기 때문에 행군 올인이 가능했던 것이지, 만약 중간중간 좀비 떼와 마주쳤다면 지금 이곳에 임시 베이스 캠프를 구축하는 것도 힘들었을 거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이냐면, 앞으로 이 세상은 점점 더 일반인이 살아남기 힘든 구조로 바뀔 것이라는 얘기다.
생각해 보라.
한반도의 주요 도시와 교통로 대부분은 버려진 차량과 온갖 장애물 때문에 기존의 차량을 활용한 이동이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중장비를 동원해서 도로를 정리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런 시국일수록 중장비의 부품 내구도와 연료, 예비 부품, 중장비를 움직일 수 있는 전문 기사를 확보하는 건 더욱 힘들 테니까.
또 좀비들이 그걸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으란 법은 어디 있나? 인간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큰 소음을 자아내면 어그로가 끌린 좀비들이 ‘어서 옵쇼!’ 하고 반겨 줄 텐데.
우리가 쌓아 올린 문명과 인프라는 더 이상 우리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
버려진 건물은 좀비가 숨어 있기 딱 좋은 장소이고, 정체된 도로는 움직임이 제한적인 인간들의 발목을 잡는다.
냉방과 난방을 기대할 수 없다면 더위와 추위에 대응하기도 쉽지 않고, 좁은 땅에서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르는 것만으로는 모두를 먹여 살리기도 힘들다.
마치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가 인간이라는 종 하나를 철저하게 멸종시키기 위해 동맹을 맺은 느낌이다.
“다들 하루 종일 움직여서 그런지 금방 곯아떨어졌습니다.”
화장실을 잠시 다녀오는 김에 팀원들의 상태를 확인한 한동석이 그리 말했다.
다들 각성자니까 이 무식한 강행군에 어울려 준 거지, 만약 저들이 일반인이었다면 지금쯤 끙끙 앓아누웠을 것이다.
나는 미리 내려 둔 커피 한 잔을 그에게 내밀고, 내 몫의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들이켰다.
사람들은 졸음을 쫓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카페인 섭취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뇌에 활력을 공급해 주는 건 당분이다.
시원 달달하면서 살짝 톡 쏘는 맛이 있는 레모네이드가 목구멍을 넘어가자, 갑갑하게 막혀 있던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이 밤중에 저길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였겠습니다.”
커피를 홀짝이며 다른 창문의 커튼을 슬쩍 들춰 본 한동석이 인상을 찡그렸다.
“구미가 놈들의 발원지일 것이라고 추측은 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저도 몰랐어요.”
“구미와 대구 간의 거리가 제법 있는 편인데, 아마 산과 강을 따라 움직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 놈들이 대구 북부 외곽만 집요하게 습격한 이유도 구미와 너무 멀리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본거지가 구미인 건 맞지만, 놈들의 지휘 체계도 구미에 있으니까 일정 거리 이상 벗어나지 못한다?”
“무리 생활을 하는 짐승 중에도 척후병과 사냥꾼 역할이 나뉘어 있습니다. 모든 무리가 한꺼번에 움직이면서 활동을 하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니, 체계적으로 역할을 나누는 겁니다.”
“그럼 대구에서 상대했던 놈들은 척후 내지는 사냥 담당이었겠군요.”
“이 광경을 확인한다면 누구나 다 동의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죽어라 맞서 싸웠던 놈들이 사실은 본대조차 아니었다는 거.”
그래,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어둠 속 도시의 풍경은 정말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변종들이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인간이나 짐승의 시체를 토막 낸 채, 아직 무너지지 않은 교각을 이용해 공단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런 변종들은 소수에 해당했으며, 다수에 소속된 변종들은 마치 지휘관이라도 되는 양 일반 좀비들을 이끌고 주변을 배회하면서 순찰을 돌거나,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거대한 군대, 아니 군집 그 자체.
해가 떨어지자마자 사납게 울려 퍼졌던 그 괴성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잠시 제쳐 두고, 놈들이 구미를 중심으로 무리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이마저도 대다수의 인간들이 사태 초기에 대구로 피난을 가서 놈들의 수가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어 보이는 것이지, 만약 민간인들이 제때 피난을 가지 못하고 놈들에게 당했다면, 아마 지금 보이는 것보다 최소 10배 이상은 더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변종은 제외하더라도 낮에 일반 좀비들이 보이지 않아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다들 밤에 변종이 활동을 시작할 때까지 숨어 있었던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을 많이 사냥한 좀비들에게는 어느 정도 지능이 생기고, 그런 놈들끼리 서로 협력한다는 사실은 이미 김해에서 입증한 바 있다.
하지만 단순히 지능과 협력 관계를 넘어서, 저놈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거대한 존재가 있을 거라는 불안감이 자꾸만 엄습해 왔다.
“인간 사회처럼 본격적인 커뮤니티가 존재한다고 보기에는 다소 수준이 낮지만, 놈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체계가 있는 건 명확합니다. 그 체계를 만든 건 놈들을 하나로 묶은 무언가일 겁니다.”
“그렇겠죠. 애초에 사태 초기에 좀비가 살아 있는 인간만 보면 무지성으로 달려들었던 이유는 본능에 따른 포식과 감염이 전부였는데, 지금 놈들이 인간을 습격하는 것에는 전혀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으니까요.”
포식과 감염이 주된 목적임은 분명하다.
다만 애초에 정상적인 생체 활동을 하지 않는 놈들이 어째서 고깃덩어리나 다름없는 사체를 긁어모으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긁어모은 사체는 왜 저들끼리 소비하는 게 아니라 공단으로 가져가는 것일까?
그 모습이 마치 여왕을 위해 죽어라 일만 하는 꿀벌과 개미를 보는 것 같아서 조금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음?”
투둑 투두둑.
무언가 작은 것들이 연달아 건물 외벽과 유리창을 두들기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자 우리는 거의 동시에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지금은 11월 끝자락. 사실상 겨울을 대표하는 12월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게다가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환경 오염이나 탄소 배출 증가로 인해 기후 변화가 극심해졌다는 얘기가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대충 11월 끝자락에서 12월 즈음에 첫눈이 내리는 게 당연했으나, 간혹 첫눈이 내리기 전에 이렇게 비가 오는 경우도 있었다.
투명한 오줌을 쏟아 낼지, 새하얀 똥을 쏟아 낼지는 전적으로 하늘의 뜻이었으니까.
문제는 하필 비가 내리는 시기였다.
“장마철도 아닌 가볍게 내리는 겨울비라 금방 그치겠습니다만…….”
“기상이 악화되고 하늘이 우중충해지면 놈들 입장에선 살판나겠죠.”
짧게 내리고 그치는 겨울비가 짜증 나는 이유는 비가 그치기까지 하늘을 어둡게 만든다는 점도 있지만, 기온을 빠르게 떨구고 길을 미끄럽게 한다는 것도 한몫했다.
이 상태로 보건대 머지않아 첫눈이 내릴 것은 자명하고, 좀비보다 더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 인간은 상대적으로 불리해진다.
내가 이래서 사태 초기부터 겨울을 경계했던 거다.
인간이 안전한 시간대(낮)는 더욱 짧아지고, 추위를 위시한 겨울의 혹독함이 준비되지 않은 인간들을 덮칠 테니까.
인간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좀비들에게는 더 크고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법. 빠르게 치고 올라가지는 못할망정 이 이상 빼앗기는 일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나마 비가 와서 다행인 점을 딱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빗소리 때문에 좀비들의 자랑인 청력도 어느 정도 무력화된다는 것.
놈들이 퉁퉁 불어 터진 물주머니가 되어 뒤뚱뒤뚱 걸어 다니길 바라는 것보다, 귀가 고장 나길 바라는 게 더 현실적으로 생각될 줄이야.
빈 컵을 내려놓은 나는 인벤토리에서 특수하게 개조한 새총과 날카로운 볼트를 꺼내 들었다.
한동석도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만일에 대비해 자신의 엽총을 손에 쥐었다.
“적입니까?”
“원래 아무렇게나 어지럽혀진 채 방치되어 있던 건물에, 갑자기 누군가가 입구를 막고 창문에 커튼까지 쳤으니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놈들이 있을 수밖에요.”
“허…….”
좀비에게 그걸 구분할 지능이 있다는 게 더 놀랍지만, 여기가 좀비들의 홈그라운드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부산역에서 거점 전쟁을 할 때도 그랬던 것처럼, 좀비들이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는 지역은 놈들의 신체 능력을 상승시켜 주는 특수 버프가 적용되고 있다.
자기들 앞마당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경계하는 놈이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뜻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커튼 아래로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차가운 비바람이 문틈으로 조금 새어 들어왔다. 이것이 머지않아 새하얀 똥으로 변해 우리를 괴롭힐 거라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기분이 더럽다.
“아시겠지만 지금 소란을 일으키면…….”
“그 정도는 알아요. 하지만 만일에 대비는 해야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어두운 밤거리를 노려보았다.
이곳에 대략 100m 조금 넘게 떨어진 곳에, 한밤중에 마주친 길고양이처럼 길게 찢어진 커다란 눈을 빛내고 있는 변종이 있었다.
좀비에겐 후각이 없다. 만약 있었다고 해도 지금은 비가 내리니까 냄새 같은 건 맡을 수 없겠지.
자랑하는 청각도 빗소리까지 뚫고 건물 안에서 인간 두 명이 속닥거리는 말소리를 듣는 건 불가능하다.
남은 건 청각과 사고 행동을 보조해 줄 약간의 지능, 그리고 인간을 사냥하는 특유의 감.
다행히 변종은 무턱대고 우리가 숨어 있는 건물로 돌진하지 않고, 다시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자취를 감췄다. 만약 이곳에 인간이 숨어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면 죽어라 뛰어들었을 것이다.
이 광경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던 한동석이 막혀 있던 댐을 개방하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저도 엽사 생활 오래 해 봤다고 자부하지만 이렇게 긴장되는 상황은 얼마 없었습니다. 섣불리 놈을 공격하지 않은 건 잘한 행동이셨습니다.”
내가 신중해서 쏘지 않았다기보단, 놈이 조금 덜 신중해서 이쪽으로 달려들지 않았던 거다.
볼트 따위로 변종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사격 스킬의 보정을 받아 치명상을 노린다고 해도 힘들겠지. 그럼 결국 총이나 칼로 제압해야 하는데, 아무리 비가 내리고 있다지만 그만한 소란을 이 도시의 좀비들이 듣지 못할 리가 없다.
나는 마지막까지 볼트를 당길 일이 생기지 않아서 살짝 안도했다.
할 수만 있다면 좀비들을 격살하고 놈들의 본거지까지 소탕하겠지만, 우리의 원정 제1 목적은 어디까지나 조사다. 책임자인 내가 그걸 망각해서야 쓰겠나.
새총을 거둬들이고 다시 창문을 닫은 나는 한동석의 다음 불침번을 깨우는 대신, 팀원들을 더 자게 하고 예정보다 살짝 이른 시간에 다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기후 변화가 점점 극심해지고 있는 만큼 더 빨리 움직여야 했다.
저기 강원도나 한반도 북부만큼 1m 단위로 눈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내리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발목이 푹푹 빠지게 하는 수준으로만 눈이 내려도 충분히 위협적이니까.
인간의 목숨을 노리는 것은 비단 좀비만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