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29)화 (130/227)

129화 투쟁기 (29)

“마치 야생 동물의 영역 같군.”

나는 대구 북부에서 도시 바깥으로 쭉 이어지는 황폐한 고속 도로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지금껏 수많은 고속 도로를 지나쳐 왔지만, 이렇게까지 극심하게 파괴와 오염이 진행된 고속 도로는 보지 못했다. 이게 인간들이 고작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방치했다고 나올 수 있는 결과인가 싶을 만큼.

“눈썰미가 제법 있으십니다?”

그때 내 곁으로 다가온 엽사 한동석이 같이 쭈그려 앉아서 주변 흔적을 살폈다.

“여기, 자세히 보시면 발자국의 크기가 다릅니다. 한 놈이 남긴 흔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냐면, 놈들이 철저하게 무리 생활을 하는 집단이라는 겁니다.”

“자신만의 영역을 중요시하는 놈들은 자신의 영역에 다른 놈들이 흔적 남기는 걸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맞습니다. 혼자 돌아다니는 호랑이나 곰 같은 놈들은 특히 자기 영역에 매우 민감합니다. 인간이 국경선에 군대를 배치하면 전쟁하자는 의도로 보일 수 있듯이, 야생 동물에게도 영역 침범이 곧 선전 포고인 겁니다.”

“그런데 이놈들은 딱히 다른 놈들과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많은 흔적을 남긴 거죠?”

내가 그리 묻자 한동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일반적인 동물이라면 모를까, 좀비의 생각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놈들의 경쟁 상대는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남긴 기술과 문명의 집약체나 다름없는 고속 도로와 버려진 차량에 대놓고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잖습니까. 너희의 영역은 우리가 접수했다, 여길 침범하면 용서치 않겠다, 대충 이런 의미 아니겠습니까?”

“일리 있네요.”

무려 15년간 엽사 생활을 해 왔다는 그의 말이니, 짐승의 사고방식에 가까운 변종의 의도도 약간이지만 이해가 되는 것 같다.

나는 파괴된 고속 도로 한복판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차량들에서 이내 시선을 거둬들였다.

차량 곳곳에 묻어 있는 피나 변종 특유의 기괴한 발자국, 짐승의 역한 노린내 같은 것이 여봐란듯이 남아 있다는 건 이곳이 놈들의 영역이라는 것.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행군 속도를 조금 올리죠. 고속 도로 주변이 온통 산이라 놈들에게 우리의 행적을 감시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대구 북부 외곽에서 구미로 이어지는 중앙 고속 도로는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놈들이 햇빛을 끔찍이도 싫어한다면 지금쯤 저 산속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을 터.

극심한 에너지 소모를 막기 위해 휴면 상태에 들어갔다고 해도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놈들의 무시무시한 야간 활동 능력으로 미루어 보건대, 일반 좀비보다 청력이 훨씬 더 높을 테니까.

야행성 동물들은 시력도 시력이지만 특히 청력도 어마어마하게 좋다는 걸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짐승의 특징을 보이는 그 기괴한 변종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론이다.

“이미 한 달 전쯤 대구로 피난 오면서 이 근처에 있는 주유소의 기름은 전부 징발했습니다. 그러니 따로 이 주변을 더 조사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래 보이네요. 애초에 고속 도로 주변에 뭐가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쓸 만한 물자가 남아 있는 휴게소, 주유소, 차량 정비소는 이미 오래전에 털린 듯 멀리서 봐도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도로 위에 버려진 차량들도 대부분 중요 부품(배터리, 엔진)과 기름을 뽑아낸 흔적이 있었다. 대구로 피난민을 이끌었을 신해룡이 얼마나 철두철미한 인간이었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문제는 인간들이 두 번 다시 이곳을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철저하게 버리고 간 덕분에, 좀비들만의 테마파크가 완성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한동석이 일부러 빙 돌려 말한 고속 도로 주변 건물들 안에 뭐가 숨어 있을지 짐작이 되는 만큼, 우리는 말없이 행군 속도를 올렸다.

각성자는 일반인과 달리 쉽게 지치지 않는 데다 기본적인 육체 능력이 높아, 차량을 이용하지 않아도 고속 도로를 빠르게 주파할 수 있었다.

자신이 사용할 장비를 제외하면 모두 인벤토리 안에 넣어 두기 때문에 무거운 군장을 짊어질 필요도 없고, 특정 직업의 스킬 보정까지 받으면 무협지 속 무림인들처럼 펄펄 날아다닌다.

저것이 천마의 무영신보! 저것이 사천당가의 백팔나한진! 저것이 불 화(火)자를 쓴다는 매화검법! 대충 이런 느낌으로.

덕분에 길을 가로막고 있는 폐차량을 훌쩍 뛰어넘고, 마라톤 선수처럼 수십 분 이상 쉬지 않고 뜀박질을 해도 행군 대열이 흐트러지는 일은 없었다.

물론 아무리 탈 인간급 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근본적으로 인간이 차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결국 해가 우리 머리 위를 넘어갈 때까지도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는 못했으니까. 그래도 늦지 않게 칠곡에 도달하는 건 가능했다.

조금 돌아가게 되겠지만 다부리에서 그대로 북상해 구미의 시가지를 먼저 살필지, 아니면 칠곡의 중심부로 들어가서 곧장 구미 공단동(공업 단지)을 살필지 정해야 했다.

구미에서 조사를 진행하자고 계획을 세운 건 나였지만, 이곳 토박이가 아닌 이상 섣불리 길잡이를 자처할 수는 없었다. 나 혼자 전부 처리할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혼자 왔을 테니까.

그래서 팀원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개중에는 나보다 이쪽 지역 지리에 밝은 사람도 있었다.

“칠곡을 통해서 구미 공단으로 진입하는 게 좋겠습니다. 구미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질 게 아니라면 굳이 빙 돌아서 구미 시가지부터 들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랬다간 시간도 많이 잡아먹게 될 테고, 무엇보다 주변에 산이 많습니다.”

가장 먼저 의견을 꺼낸 건 한동석이었다. 그는 우리가 어찌어찌 시간에 맞춰 산 주변 도로를 빠르게 통과한다고 해도, 야간에 시가지를 조사할 수 있을 만한 여력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 한편 합리적으로 반대 의견을 내놓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을 이형진이라고 소개한 전직 소방관은 군대가 피난민들을 이끌고 대구로 내려갈 때, 구미와 칠곡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교각을 죄다 끊어 버렸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좀비들이 피난민 행렬을 추격해 오는 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구미와 칠곡을 둘러싸고 있는 강을 건너지 않는 한, 당장 내부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강이 통째로 얼었다면 또 모를까, 아직 그 정도로 심각한 한파가 불어닥치지는 않았다.

‘구미시 중심부까지 올라가서 끊어지지 않은 교각으로 진입한다면 그만큼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어쩌면 안전 지대를 찾기 전에 해가 질 가능성도 있어.’

반대로 각성자니까 무리해서 강을 건너라면 건너지 못할 것도 없다. 대신 한겨울에 지독한 저체온증에 시달리겠지. 잘못하면 심장 마비가 올 수도 있다.

전직 소방관인 이형진이 빙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강을 건너는 방법을 추천하지 않은 이유가 신체의 안전 때문이리라.

“이렇게 하죠. 우선 칠곡 방면으로 들어간 다음 강을 따라 북상하다가, 파괴되지 않은 교각을 찾아서 구미로 들어가는 겁니다. 어느 쪽이든 조사 지역까지 들어가려면 시간이 제법 걸리겠지만, 좀비들과 싸우기도 전에 겨울철 강을 건너서 괜히 체력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낫겠죠.”

창원과 함께 내륙 최대 공업 단지라 불리는 구미 공단에 곧바로 진입할 수 없는 건 조금 아쉽지만, 어차피 조사 기간도 널널하게 잡고 출발했다.

비각성자도 포함된 조사단이라면 모를까, 전원이 좀비들과 사투를 벌인 경험이 있는 베테랑 각성자들인 만큼 고난의 행군이 조금 더 길어진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을 터.

대략적인 방향이 정해지자 우리는 짧은 휴식을 끝마치고 다시 움직였다.

진입 방향은 북쪽이 아닌 서쪽이었지만, 교각이 대부분 끊어졌다고 하니 강을 따라 북상하려면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한다. 도시 밖보단 안에서 밤을 대비하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나.

“후우, 정말로 교각이란 교각은 다 끊어져 있구만.”

곧 강 인근에 도착한 우리는 이형진의 말대로 군대에 의해 파괴된 교각과 겨울철 특유의 음침한 강을 마주했다.

한동석이 한숨을 내뱉고 있을 무렵, 진가희가 날카롭게 눈을 뜨며 강 너머 칠곡과 구미 내부를 바라보았다.

“아재, 뭔가 이상하지 않아?”

“뭐가?”

“분명 사람이 없어야 할 공단 방향에서 ‘소음’이 들려.”

진가희가 지나가는 어조로 툭 내뱉은 한마디에 우리는 거의 동시에 경계를 끌어 올렸다.

모두가 숨죽이고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여 보니 정말로 공단 방향에서 희미하지만 북적거리는 소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장의 기계적인 소음이 아닌, 무엇인지 짐작하기 힘든 소음이었다.

좀비는 시스템의 의해서인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느끼는 것인지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인원이 많은 거점은 주기적인 좀비들의 습격(웨이브)을 받았다. 내 거점들이 그랬고, 대구가 현재 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문제다.

부산의 경우엔 좀비들이 해당 지역에 고여 있긴 했지만, 대신 그곳에 인간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당연히 온기도, 소음도 없었고.

그럼 모든 피난민이 이미 빠져나온 저 죽음의 도시에서 소음이 흘러나올 건덕지가 있나?

“혹시 뒤늦게 구미에 도착한 생존자 집단이 저곳에 자리 잡았을 가능성은 있나요?”

내 질문에 이형진이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위쪽 지역에서부터 내려온 피난 행렬이 구미에 남아 있는 물자란 물자는 싹 쓸어서 대구로 내려왔는데, 좀비들뿐인 저 고립된 지역에 어떤 정신 나간 생존자 집단이 자리 잡는단 말입니까? 설령 자리 잡았다고 해도 지난 한 달간 버틸 수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당장 대구도 좀비들 때문에 피해가 누적되고 있는 형국인데…….”

물자도,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은 최대 위험 지역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 잡고, 지금 이 순간에도 소음을 흘리고 있을 생존자 집단? 그의 말대로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는 건 저 소음이 인간이 만들어 낸 소음은 아니라는 건데…….

나를 포함해서 조사단은 총 10명으로 구성된 각성자 팀이었지만, 모두 저 미스테리한 현상에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텅 빈 도시에 남아 있을 거라곤 좀비밖에 없으니까.

“……우선 이동합시다. 괜히 여기 오래 머물러 봐야 좋을 거 없습니다.

강을 따라 북상할수록, 공단과 가까워질수록 소음의 진원지와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남구미로를 이어 주는 교각도 마찬가지로 끊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기에,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인근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하기로 했다.

다행히 3공단로 아래에 소시가지(칠곡 중리)가 있어 잠시 머무를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우리가 시내의 한 상가 건물에 자리를 잡았을 때, 겨울의 해는 무심하게도 짧은 노을을 연출하며 이윽고 모습을 감췄다.

아직 구미 내부에 완전히 들어가지 못했음에도 도시 외부에서의 첫날밤을 맞이한 우리는 한가하게 캠핑 분위기나 낼 수는 없었다.

“조금 이르지만 불침번을 정해야겠습니다.”

나는 창가의 커튼을 치면서 팀원들에게 말했다. 낯선 지역에서 불침번을 서지 않는다는 건 죽여 달라고 광고하는 꼴이었으니까.

어차피 나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데다 이 조사단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교대 없는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불침번에 익숙한 엽사 한동석이 나와 함께 첫 불침번을 서겠다고 나섰다.

사실 우리가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각성자임에도 이렇게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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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리의 등골을 매섭게 휩쓸고 지나가는 엄청난 괴성이 공단 방향에서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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