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28)화 (129/227)

128화 투쟁기 (28)

“쓰읍, 하아……. 신선한 공기와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오늘 하루의 시작을 알려 주는군.”

캡슐 호텔의 문을 박차고 나온 나는 기지개를 켜며 뉴동대구역 1층으로 내려왔다.

상가를 비롯해 온갖 음식점이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이미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각성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선 무료 급식을 먹을 겸 일감을 찾으러 온 민간인들이 웅성거렸다.

오픈빨이 떨어질 법도 한데 뉴동대구역은 어제가 오늘처럼, 오늘이 어제처럼 장사가 잘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벌써 내 지갑에 쌓인 DNA 샘플만 해도 20만이 넘는다.

‘사실 나는 퇴역병이 아니라 자영업에 소질이 있었던 게 아닐까?’

세상이 이 지경이 되지 않았더라면 뒷골목식당에 출연해서 ‘사장님, 손맛이 괜찮은데유? 조아라 씨, 이리 내려와 봐유’ 같은 소리를 들으면서, 자영업 역사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사장님, 출근하셨습니까!”

“이런 시국에는 눈뜨면 출근이고 눈 감으면 퇴근이죠. 간밤에 잠자리는 편하던가요?”

“어우, 말도 마십시오. 근 한 달 만에 묵은 때 쫙 빼고, 든든하고 얼큰한 국밥 한 그릇 때리고 꿀잠 잤더니 컨디션 최고입니다! 게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카페인까지 섭취할 수 있는 이런 신의 직장이 대체 어디 있겠습니까?”

싹싹하게 인사하는 한편 아부에 금칠까지 더해 주는 각성자 노예, 아니 각성자 직원의 기특함에 내 어깨도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

뉴동대구역에, 정확히는 내게 직접 고용되어 취직한 모든 각성자는 카페 무제한 이용권이라는 소소한 혜택도 가지게 되었다.

덕분에 이 각성자처럼 이른 아침부터 콩 태운 물을 얼음 컵에 담아서 마시고 있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한겨울에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집하는 정신병자들 때문에 조금 뜨악했지만, 그래도 개인 취향이니 존중해 주기로 했다.

좀비가 세상을 뒤덮기 전까지만 해도 넷플러스에서 다양성의 존중이니 뭐니 하며 LGTV+ 뭐시기를 드라마에 마구 끼워 넣었는데, 나도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얼죽아 정도는 용납해야 하지 않겠나.

‘뉴동대구역으로 사람이 몰리고 있는 건 좋은 현상이다.’

언뜻 보기엔 빈곤한 민간인만 몰려들어 무료 배급소에서 음식을 축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들이 소비하는 음식보다 내가 벌어들이는 DNA 샘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게다가 내 밑에서 일하고자 하는 각성자 못지않게 민간인의 취직 수요도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이미 간밤에 선별한 민간인 수백 명을 ATX에 태워서 내려보내기도 했다.

1차로 김해에 내려보낸 인원들과 우리 거점 일원들이 현장에서 함께 일하고 부대끼면서 지내 본 뒤 괜찮다는 연락이 오면, 그때부턴 2차, 3차, N차까지 사람을 뽑아 쭉쭉 내려보낼 생각이다.

도시의 사람들이 조금씩 외부로 유출되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그들은 날 막을 명분이 없다.

내가 대구의 핵심 치안 인력이자 무력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군인과 각성자를 마구잡이로 빼내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대구에서 감당할 수 없어 반쯤 손 놓고 있던 민간인만 골라서 조금씩 빼내고 있다.

가족들과 함께 더 안전하고 안락한 곳으로 이주하고 싶어 하는 민간인들은 차고 넘칠 만큼 많았다. 그러니 당사자들의 의사를 확인한 뒤에 일사천리로 내려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원했고, 내가 원했고, 누구 하나 손해 보는 이가 없었기에 완성된 계약 관계다.

이제 와서 ‘너, 우리 영지민들을 빼갔구나, 영지 전쟁이다.’ 같은 선언을 할 미친놈은 없을 것이라 본다.

‘걸어오는 영지 전쟁을 피할 만큼 나 김해 군주 이승권이 겁쟁이인 것도 아니지만.’

싸워서 이겨야 할 좀비들이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세상이다. 가급적이면 범죄자와 배신자를 제외하고 인간을 좀비와 같은 선상에 두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인간은 충분할 만큼 많이 죽여 봤으니까.

어쨌든 오늘도 새로운 아침 해가 밝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뉴동대구역을 찾았으며, 각성자 손님과 일감을 찾는 민간인들 덕분에 어찌어찌 상거래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얘기 들었어? 간밤에 그 괴물들이 또 북부 외곽을 한번 휩쓸었다던데.”

“말도 말어. 어제 내 아들놈이 그쪽에서 일하면 배급을 2배로 준다는 소리 듣고 일하러 나가려던 걸 겨우 막았다니까. 사람이 먹고는 살아야 한다지만, 그래도 목숨보다 더 중한 게 어디 있겠나.”

“이러다 도시 방어선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끔찍하다, 끔찍해.”

그래, 여전히 대구를 노리는 위협은 그대로 남아 있다.

군대는 무기만 있다면 민간인을 징집해서 언제든지 예비군을 채워 넣을 수 있다. 민간인이 미어터지는 지금의 대구라면 군의 규모가 절대로 줄지는 않겠지.

하지만 각성자는? 그 변종들 상대로 간신히 대응할 수 있는 각성자가 늘어날 타이밍은 이미 지났다.

사태 초기에 각성하지 못한 민간인은 여전히 비각성자였고, 반대로 각성자들은 꾸준히 레벨을 올리며 강해지거나, 도중에 실패해서 목숨을 잃었다.

내가 모르는 또 다른 각성 트리거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만한 규모의 대도시에서 각성자의 수가 유의미하게 늘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새로운 각성 방법은 아직 없는 것 같다.

요컨대 위험은 그대로인데 대구가 스스로를 지킬 힘은 점점 줄어 가고 있는 상황.

각성자들이 더 강해지는 것보다, 인간 진영이 좀비들에 의해 꾸준히 피해를 입는 속도가 더 빠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저들 말마따나 대도시 규모의 방어선도 언젠가는 뚫리겠지.

‘그날 밤 확인했던 바에 의하면 변종 좀비가 감염시킨 인간은 변종 좀비가 되지 않았다.’

감염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는 특이점이 있었지만, 결국 그 짐승 같은 느낌의 변종에게 물린 인간들의 최후는 평범한 좀비였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매일 밤 군대와 각성자 집단에게 격퇴당하는 변종 좀비들이 꾸준하게 매일 밤 습격할 수 있는 것일까? 피해가 누적되는 것은 비단 인간만이 아닐 텐데.

놈들은 어떻게 동료를 수급하지? 어떻게 피해를 복구하지?

‘답은 구미에 있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반대로 정황 증거를 맞춰 보면 놈들의 발원지가 구미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놈들의 발원지가 구미가 아닌, 그냥 산속 깊숙한 곳이었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유야 어찌 됐든 한 번쯤은 대구 위로 올라가서 조사를 해 봐야 하니까.

나는 역무원 사무실로 향해 역내 방송으로 고용했던 각성자들을 집합시켰다.

다들 충분히 먹고 마시고 쉬었는지 얼굴에서 맑은 기운이 줄줄 흘러나왔다. 저들의 피부에서 흘러나오는 게 기름이었다면 벌써 미국이 침공했을지도 모르겠다.

“자, 다들 실컷 먹고 마시면서 그간의 스트레스와 피로를 싹 날려 버렸을 겁니다. 아닌 척해도 소용없어요. 각성자인 내가 잘 아는데, 우리 각성자들은 하루만 충분히 쉬어도 기름칠한 기계처럼 빠릿빠릿하게 잘 돌아가는 천상의 육체를 가지게 되니까.”

내가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막상 피로에 찌들어 힘든 하루를 보내지 않은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일단 각성자가 되면 일반인보다 육체적 능력이 크게 상승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체가 한계를 맞이하기까지 제법 오래 걸린다. 피로가 잘 쌓이지 않고, 쌓여도 금방 풀리는 몸이 된다는 거다.

채성아와 김진경 경장이 내가 부과한 막중한 업무에도 겉으로만 앓는 소리를 할 뿐, 크게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이미 면접에서 밝힌 대로, 또 사전에 공지한 대로 각성자인 우리는 일반인들이 하지 못하는 위험한 일을 하게 될 겁니다. 그건 단순히 약탈자 무리를 처단하는 작업일 수도 있고, 다른 각성자 집단으로부터 우리 집단을 지키기 위한 예방 전쟁일 수도 있으며, 당연히 좀비와 치고받는 일도 있을 겁니다. 아마 마지막이 가장 많겠죠.”

세상에 널린 게 좀비요, 지금 인간의 영역은 아주 먼 과거인 원시 시대와 맞먹을 만큼 확 좁아졌다.

‘인간의 영역을 되찾는 게 모든 각성자들의 의무다!’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세상에 그딴 의무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내 밑에서 일하는 각성자들이라면 마땅히 그런 의무를 짊어져야 한다. 내 노후를 위해서. 그러라고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보수도 주는 것이니까.

“긴말 않겠습니다. 해가 막 떠오른 지금, 우리는 북상해서 구미로 향할 겁니다.”

충격 발언을 터뜨리자 한 각성자가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이만한 대접을 받았으니 위험한 일을 하게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갑자기 구미로 향하는 이유는 짐작이 가질 않습니다. 피난민들의 말에 의하면 구미는 이미 한참 전에 좀비들에게 함락되어 버려진 도시 아닙니까?”

“여러분 같은 각성자들과 군대가 매일 밤 대구 북부 외곽에서 싸우고 있는 그 변종 좀비, 놈들의 발원지가 구미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설령 놈들의 발원지가 구미가 아니라고 해도 한 번쯤은 조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구미행을 결정했습니다. 또 다른 질문 있습니까?”

“조사 기간은 얼마나 됩니까?”

“아무리 짧아도 사흘, 길면 일주일 이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구와 구미 간의 정상적인 교통로가 완전히 끊어진 데다 고속도로에는 버려진 차량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쪽에서 차량과 ATX를 이용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작전 기간이 긴 이유는 행군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산역, 밀양역, 동대구역을 점거하면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는데, 주요 기차역을 거점으로 확보한다고 해도 전국에 이어진 모든 선로가 동시에 복구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망가지지 않은 선로는 그대로 유지되겠지만, 내가 확보한 거점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선로가 파괴되었을 경우, 그 선로는 복구되지 않는다.

김해와 창원이 이어지는 서쪽 끝자락 선로는 좀비 사태 때문에 여전히 망가져 있다는 걸 이미 확인한 바 있다.

덧붙여서 부산은 사람들이 워낙 빨리 전멸한 탓에 오히려 선로가 멀쩡했던 케이스다. 만약 부산 시민들이 피난 가기 위해 기차에 탑승하고, 좀비들이 그 기차에 달려들었다면 선로가 망가져도 수십 번은 더 망가졌겠지.

나는 더 할 말 없냐는 듯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내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던 엽사 한동석이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작전 중 사망자가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사망자의 유산은 유가족에게 우선적으로 돌아갈 것이며, 유가족이 없는 사망자의 유산은 제가 임시로 맡아 둔 뒤 작전이 끝나면 모든 인원에게 공동 분배할 겁니다. 만약 유산을 챙길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의 몫의 수당을 포함해서 모든 팀원에게 추가 위험 수당을 지급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만큼 남들보다 훨씬 많은 수당과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물론 보험을 들어두는 만큼 경고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경고해 두는데, 여러분은 저와 계약하면서 ‘거점 방위자’로 등록되었기 때문에 배신행위가 일어난다면 제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다른 각성자의 유산(DNA 샘플, 물자)을 노리고 배신한다면 제가 직접 그놈의 사지를 잘라서 좀비 떼에게 먹이로 던져 주겠습니다.”

서로 혈기 왕성한,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인 각성자들이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될 텐데 당연히 그런 부작용이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무리 거르고 걸러도 사람 속내는 알기 힘드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흑심을 품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당연히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 초장부터 확실하게 선을 그어 두었다.

일을 하기 싫다면, 내 방식에 불만이 있다면 조용히 떠나라. 떠나는 사람을 잡지는 않을 테니까. 다만 배신한다면 철저하게 응징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그 지하실의 밑바닥을 내가 직접 확인시켜 줄 생각이다.

“통수 치고 재빨리 도망치면 그만이지, 같은 안일한 생각으로 배신할 거라면 차라리 좋게 좋게 떠나라고 경고하겠습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쫓는 일에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집요하게 우리 부대에 저격을 가하던 북한군 저격수.

우리가 확보한 마을이나 거점에 부비 트랩을 설치하거나 북한 주민을 부추겨 테러를 유발하던 북한군 공작원.

온갖 기괴한 방식으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우리를 괴롭혔던 북한군 특수 작전군.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우리 부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그놈들을 모조리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놈들을 수용소로 보내는 대신, 우리만의 방식으로 고문하고 처형시켰다.

그렇기에 나는 고도의 훈련을 받은 공작원도, 수색대도, 특전사도 아니지만 인간 사냥에는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자부한다.

“질문은 이쯤 하면 된 것 같군요. 이제 30분 주겠습니다. 다들 행군 준비 끝마쳐서 모이십시오. 장기간 작전에 필요한 물자는 제가 챙겼으니 물자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개인적인 비상 물자는 챙겨 두시길.”

내 말에 따라 각성자들이 흩어지고, 다시 모였을 때, 우리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해가 빨리 지는 겨울 특성상 이곳에서 늑장을 부려 봐야 좋을 것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