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26)화 (127/227)

126화 투쟁기 (26)

첫 호구, 아니 손님들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거, 반갑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풋풋한 여검사, 그리고 주말만 되면 소파에 앉아 맥주 캔을 까고 있을 것 같은 40대의 노땅 엽사.

상당히 보기 드문 조합이 타인의 눈치도 보지 않고 먼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확실히 행동거지나 시선 처리를 보건대 남 눈치 보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민간인들의 여론을 등에 업고, 각성자들에게도 나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뉴동대구역의 주인이 되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나와 함께 일할 각성자는 아직 구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슴없이 찾아오는 손님?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다. 탕수육에 군만두 서비스까지 넣어 주고 싶을 만큼.

“반갑습니다. 이곳 뉴동대구역의 적법한 계승자이자 부동산 투기에 성공한 이승권입니다.”

“푸흡! 말투가 왜 그래요? 무슨 1년 내내 집구석에만 박혀서 이상한 인터넷 문화에 찌들어 있던 사람 같아요.”

“야, 이 눈치 없는 지지배야! 흠흠! 미안합니다. 원래 가정 교육 잘 받은 앤데, 요즘 일이 좀 힘들다 보니…….”

예의 바른 여검사가 잼민이로 돌변하고, 껄렁해 보이던 노땅이 갑자기 사회생활 잘하는 샐러리맨으로 진화하다니. 역시 세상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니까.

“괜찮습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거든요. 일단 여기 앉으시죠.”

나는 두 사람과 가볍게 악수를 나눈 다음, 모집소 뒤쪽에 있는 역무원 사무실로 안내했다.

어차피 역무원 따윈 존재하지도, 존재할 필요도 없는 동대구역이라 텅 빈 사무실은 이렇게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고, 탈취제의 향긋한 냄새까지 나는 이곳은 바깥에서 온갖 못 볼 꼴을 다 본 각성자들에게 별천지 같은 신세계였다.

“바깥에서부터 신기하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대체 그 동대구역이 어떻게 하루 아침에 이렇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능력입니다.”

“……이게 능력이라고요?”

깜짝 놀란 엽사가 그리 되묻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물론 손님으로 찾아온 두 사람을 위해 인벤토리에서 고급 우유와 쿠키 세트를 꺼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검 솜씨 하나로 변종 좀비를 반갈죽하던 그 듬직한 여검사가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냉큼 쿠키를 집어 들었다. 엽사가 또 한 번 눈치를 주긴 했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일반인도 아니고 각성자 손님들을 대접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죠. 마음껏 드셔도 상관없습니다.”

“허, 참……. 이런 시국에 이런 대접 받아 보기는 또 처음이네. 그보다 넌 사양이라는 걸 좀 알아라, 이 지지배야.”

“그러는 아재도 한 번에 2개씩 먹고 있구만, 뭘!”

“나는 연장자니까 한 번에 2개씩 먹어도 돼!”

굉장히 오랜만에 맛보는 고급 우유와 쿠키의 조합은 변종과 피 터지는 격전을 벌이던 각성자들의 기세도 누그러뜨렸다.

나는 은근슬쩍 두 사람을 떠보기 위해 모르는 척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두 분은 딱 봐도 실력이 있어 보이는 각성자 같은데, 대구에서는 두 분 같은 각성자들을 대접해 주지 않는 겁니까?”

“쩝쩝, 어후, 말도 마쇼. 사태 초기에 각성자 놈들이 민간인 상대로 범죄 좀 저질렀다고 우리 같은 사람들까지 죄다 싸잡아서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하는데 어찌나 서럽던지…….”

“우물우물…… 꿀꺽. 게다가 각성자들은 모두 의무적으로 자기 직업이랑 스킬, 레벨까지 군부랑 대구 시청에 보고해야 돼요. 상태창을 민간인에게 보여 줄 수는 없어서 마음만 먹으면 속일 수는 있지만, 다들 더러워서 그냥 알려 주고 만다니까요.”

“어디 그뿐인가? 우리가 민간인들보다 좀 더 튼튼하고 강하다며 밤이고 낮이고 여기저기서 불러 대는데, 휴일 같은 건 상상도 못 합디다!”

생각보다 쌓인 게 많았던 걸까.

두 사람은 허겁지겁 쿠키와 우유를 입에 밀어 넣으면서도 내가 심리 상담사라도 되는 양 자신들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하긴 나 같았어도 각성자 입장에서 잠재적 범죄자 취급당하며 일은 일대로 하고, 정작 대우는 제대로 받지 못하면 화가 날 것 같긴 하다.

‘물론 대구의 경우엔 정말로 민간인들에게 나눠 줄 물자도 턱없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각성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줄이고 있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좀 너무하는군.’

생각해 보면 뉴동대구역이 신장개업을 하자마자 소문을 듣고 찾아온 각성자들이 아낌없이 DNA 샘플을 소비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이 뉴동대구역에서 소비하고 있는 DNA 샘플은 차곡차곡 내 지갑에 쌓이고 있으니, 제대로 된 밥 한 끼나 잠자리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좀비들을 잡으면 DNA 샘플을 얻고, 그 DNA 샘플을 잘만 활용하면 더 괜찮은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DNA 샘플을 상점창에서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건 20일 전쯤이었는데, 생각보다 효율이 안 좋았지 뭡니까. 그나마 가장 효율이 좋은 건 각종 제작이나 건설에 쓰일 수 있는 기본적인 원자재나 연료였는데, 우리 같은 각성자들은 그렇게 구입한 품목을 군부나 대구 시청에 납품하는 것으로 약간의 편의를 보장받았습니다. 그마저도 가성비가 안 좋다고 판단한 각성자들이 많아서 다들 DNA 샘플을 꿍쳐 두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만한 규모의 대도시를 운영하려면 당연히 원자재와 연료가 많이 필요하다.

공장이나 특정 건물을 꾸준히 유지하기 위해 대량의 연료를 확보하고, 그렇게 기계를 돌려서 원자재를 가공하고, 가공한 것으로 완제품을 만들어야 사용할 수 있으니까.

‘지금껏 대구의 군부대가 어찌어찌 기능하고 있었던 이유는 각성자들에게 원자재를 공급받았기 때문이겠군.’

그렇게 공급받은 원자재로 공장을 돌려서 군수 물자를 제작했을 테니, 이 시국에도 군인들이 최소한의 구색은 갖추고 있었던 게 납득이 간다.

그러니 변종들이 끊임없이 대구 북부를 습격해도 그곳을 지킬 군인과 경찰들이 계속 나오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수백만 민간인들 중에서 또 징병하면 그만일 것 아닌가. 대한민국의 성인 남성 군필 비율은 90%가 넘으니까.

여러모로 씁쓸한 광경이다. 이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했고, 또 지금 이 순간에도 불편함과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지 감도 안 잡힌다.

이건 단순히 기득권층의 문제만이 아닌, 복합적인 요소가 얽힌 문제라 무작정 군부와 대구 시청을 비난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좀 거들어 줄 생각이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이왕 각성자 노릇 하는 거, 괜찮은 대우 받으면서 레벨 업도 팍팍하고, DNA 샘플도 왕창 벌어 보고 싶은 생각 없습니까?”

내가 계속 꺼내 주는 쿠키와 우유를 진공청소기처럼 흡입하고 있던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움직임을 덜컥 멈췄다.

그러고는 서로 말없이 눈빛을 교환하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일단 들어나 봅시다.”

좋아, 걸려들었다.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그냥 저와 계약해서 마법 소녀…… 아니지, 저와 계약해서 일종의 용병 같은 일을 해 주시면 됩니다. 일이 없을 때는 제 거점에서 자유롭게 지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일이 있을 때는 기본적으로 저와 함께하거나,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거점 일원과 함께하게 될 텐데, 그때는 반드시 일의 경중에 따라 큰 보수와 위험 수당을 지급할 겁니다.”

“일이라면 주로 어떤 일을 말하는 겁니까?”

“좀비에게 점령당한 위험 지역 조사 및 복구, 사회 재건 작업, 좀비와 약탈자 무리 처치 등등. 문자 그대로 각성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듣기만 해도 위험해 보인다는 건 알겠는데, 그럼 그만큼 대우도 잘해 주고 보수도 많이 줘야 수지 타산이 맞지 않겠습니까? 우린 이 바닥에서 나름 굴러먹은 베테랑들입니다. 얘도 좀 맹해 보이긴 하지만 사실 칼 하나로 좀비 수십 마리는 썰어 버릴 수 있는 실력자입니다. 내 말 맞지?”

“말 시키지 마요, 아재. 나 먹느라 바쁘니까.”

“……예, 뭐. 이런 애지만 아무튼 실력은 내가 보증합니다.”

이미 두 사람이 변종을 상대하는 모습을 본 적 있으니 실력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날 상대로 흥정 같은 걸 하려고 하다니. 어리석은 선택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원하는 게 있습니까?”

“보통은 우릴 고용하려는 쪽에서 먼저 제시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그 반대죠. 전 실력과 인성이 확실한 인재를 영입하려는 입장입니다. 당연히 두 분이 원하는 조건에 맞춰 드려야죠.”

선제시 안 받는다고.

“갑자기 우리더러 원하는 조건을 말해 보라니, 좀 난감한데…… 일단 안전하고 안락한 거처를 마련해 주는 건 기본 사항이라고 보면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필요하다면 옷 가게에서 원하는 의복도 맞춰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그건 좋구만. 그럼 다음은…… 삼시 세끼 보장.”

“삼시 세끼에 간식이랑 야식까지 얹어 드리죠. 물론 배부를 때까지 양껏 먹어도 좋습니다, 공짜로.”

“통이 크시네, 사장님. 벌써 이 전설의 엽사 한동석을 반쯤 넘어오게 만들었어. 그럼 보수나 위험 수당 같은 건…… 이 시국에 돈은 의미 없으니까 물자로 받아야겠지. 원하는 물자 비율을 그때그때 맞춰 준다는 조건은 어떻습니까?”

“문제없습니다. 보수를 10이라고 정했을 때 식량 비율을 10으로 맞추든 5로 맞추든 원하는 요구 조건에 맞춰 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세세하게 이런 품목, 저런 품목을 원한다고 해도?”

“세세하게 이런 품목, 저런 품목을 원한다고 해도.”

내가 딱 잘라서 전부 허용하자 한동석은 오히려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가 대한민국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면, 어지간한 건 다 맞춰 줄 능력이 있었다.

“지금 당장 원하는 걸 아무거나 말해 보시죠.”

“발렌타인 21년.”

나는 즉시 김해 공항 면세점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발렌타인 21년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놓았다.

내가 떡하니 발렌타인 21년을 꺼내 놓자 그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나와 발렌타인을 번갈아 보았다.

좀비 아포칼립스가 터진 이래 소주나 맥주도 통제 물자에 들어간 지금, 위스키를 비롯한 각종 양주는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고가치 기호품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내가 유일했다.

“아니,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왜 되는 거지?”

“왜 안 됩니까?”

나는 면세점 창고에 처박혀 있던 각종 선물용 술을 하나하나 꺼내 놓기 시작했다. 내가 술 한 병을 꺼낼 때마다 한동석의 입은 1cm씩 더 벌어졌다. 각성자라 그런지 입도 잘 찢어진다.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제가 통제하고 있는 거점은 이곳 뉴동대구역만이 아닙니다. 밀양, 김해, 부산에도 제가 통제하고 있는 거점들이 제법 있죠. 거기에 쌓여 있는 물자가 얼마나 많고 다양할 것 같습니까?”

극단적으로 대구의 수백만 시민을 먹여 살릴 정도는 아니지만, 내 사람 십수만 명 정도는 넉넉하게 먹여 살릴 수 있다. 물론 앞으로 내가 통제하는 거점과 지역이 더 늘어난다면 먹여 살릴 수 있는 인원의 규모도 더 늘어날 것이고.

“술? 담배? 명품 옷과 가방? 말만 하세요. 일한 만큼 그 값어치를 확실하게 매겨서 보상해 드릴 테니까. 나 그렇게 인색한 사람 아닙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아 넣자 한동석이 벌떡 일어나 내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우리 오늘부터 1일 차인 겁니다, 사장님! 너도 그만 먹고 얼른 사장님한테 인사드려! 아, 얘 이름은 진가희라고 하는데, 그냥 편하게 돼지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우으으읍! 읍읍!”

이렇게 여검사 진가희와 엽사 한동석을 손에 넣었다.

당연하지만 두 사람으로 만족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나는 오갈 곳 없고 박한 대우에 지친 각성자를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나만의 드림 팀이 조금씩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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