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투쟁기 (25)
내가 대구에서의 자유 활동을 보장받자마자 냉큼 동대구역을 집어삼킨 이유는 실로 단순했다.
커뮤니티를 복구한다느니, 끊어진 물류 유통을 되살리고 상거래를 다시 활발하게 키워야 한다느니 같은 표면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인재 확보에 힘쓰려면 이런 임팩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재 영입의 시작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내 행동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바로 옆에 있는 구세계 백화점 복합 환승 센터보다 덩치가 거대해진 뉴동대구역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애초에 동대구역은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규모의 최신식 대형 기차역이었는데, 그걸 거점 지정(B-) 스킬로 한 번 더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의 우울함에 젖어 있던 사람들도 뉴동대구역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자, 여기서 내가 대량 조리 좀 해 봤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만족시킬 자신 있다! 조리 기능사 자격은 기본으로 가지고 있다 하는 사람 손!!”
신장개업한 뉴동대구역에 사람이 꾸역꾸역 몰려들자, 나는 즉석에서 요리가 가능한 사람들을 뽑았다. 과연 수백만 피난민과 대구 시민 중에 요리사가 한 명도 없을까?
홍대 거리 한복판에서 ‘여기서 전차 몰 줄 아시는 분!’ 하고 소리친 것과 비슷하게 무수히 많은 지원자들이 나타났다.
“거기 아주머니! 주 전공이 뭡니까!”
“내가 뼈다귀 하나로 해장국에 곰탕만 30년은 끓였지!”
“통과! 거기 맨들맨들 민머리 아저씨는?!”
“중식집 25년, 짜장 대량 조리 실력파. 군만두 서비스 가능.”
“통과!!”
뉴동대구역을 확보하자마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귀중한 구호물자 팩을 나눠 주는 건 즉시 그만뒀다. 나도 여유만 있다면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는 싶지만 그건 낭비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미지 관리를 위해 짧게 계획한 이벤트성 지원이기도 했고.
내가 아무리 가진 물자가 많아도 그런 식으로 한 사람당 구호물자 팩 하나씩을 나눠 준다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내 거점 창고도 텅텅 비게 될 것 아닌가.
대신 나는 구호물자를 나눠 준다는 소문을 듣고 힘들게 찾아온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그리고 갑자기 물자 나눠 주는 걸 중단하겠다는 내게 분노하는 일이 없도록 방향성을 조금 바꿨다.
한 사람당 구호물자 팩 하나씩을 나눠 주는 것보다, 요리 잘하는 민간인들을 영입해서 식재료를 나눠 주고, 대량 조리를 시켰다.
이렇게 대량 조리된 재난용 배급식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면 주먹구구식 물자 낭비를 크게 줄일 수 있으면서도, 뉴동대구역으로 발걸음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다.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런 무료 배급소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물자가 소모되겠지만, 난 그걸 버틸 유지력이 있다.’
뉴동대구역을 확보하면서 새롭게 얻은 물자의 양만 해도 산을 쌓을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했지만, 아직 창고형 마트로 리뉴얼된 홈마트의 물자는 반의 반도 쓰지 못했다.
내가 물자를 무지성으로 낭비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다른 거점을 확보하고 리뉴얼하는 과정에서 꾸준히 새롭게 생산된 물자가 거점 창고에 지속적으로 쌓인 덕분이다.
이미 규모로만 따지면 역대급인 동대구역, 부산역, 그리고 밀양역.
순수한 물자 저장고로 활용할 수 있는 홈마트, 의료인과 의약품, 의료기기 모두 만전의 태세로 준비된 경희대 중앙 병원, 자급자족 시스템이 조금씩 도입되어 이제는 내 지원 없이도 먹고살 수 있는 활천초.
마지막으로 동대구역이나 부산역에 비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는, 비행기 빼고 다 가진 김해 공항까지.
이 알짜배기 거점들을 가진 내가 유일하게 부족한 것이 바로 사람인데, 대구는 그런 내게 부족한 사람을 파밍할 수 있게 해 주는 천연 인재 집합소였다.
“이승권은 더 많은 인재들이 필요해요!”
일감이 없어 대구 거리를 전전하고만 있나요?
이 퇴역병은 순간의 빠른 지원으로 인재 영입을 원합니다.
-지금 지원하기(Y/N)
“기사 식당 경력 12년!”
“기사 식당 경력 12년! 더 없습니까?!”
“함바집 9년!!”
“함바집 9년! 함바집 9년 나왔습니다!”
“호텔 뷔페 수셰프!!”
“동대구역 냉장고를 부탁해요, 수셰프!”
“뷰티 숍 매니저!”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에도 수요가 있는 우윳빛깔 피부 지킴이! 통과!”
여기가 무슨 도깨비 보따리만 모아 놓은 보물 창고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인재를 외치기만 했는데 귀신같이 자신의 경력을 들이밀며 지원하는 사람들이 한 트럭이었다.
그렇게 뽑은 요리사, 혹은 요리사들을 도울 조리 보조들을 무료 배급소와 역내 식당이나 카페, 기타 서비스 제공이 가능한 가게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이 뛰어난 인재들을 일당 구호물자 팩 하나로 고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절대다수의 민간인은 DNA 샘플은커녕 물물 거래에 필요한 물건도 없을 텐데 어째서 무료 배급소 외의 유료 서비스 가게까지 운영하는 것이냐고? 답은 간단하다.
민간인들은 인재 영입과 호감 여론 조성, 활발한 상거래 분위기 메이커에 불과했지만, 사실 각성자들이야말로 진짜 ‘손님’이다.
‘그동안 아까운 DNA 샘플을 가성비 구린 상점창에서만 소비하거나, 아니면 존버하는 느낌으로 모아 둔 각성자들이 제법 많을 거다.’
나는 손을 싹싹 비비며 이 꽃향기(분위기)에 이끌려 온 손님들을 기다렸다.
예상대로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소문을 듣고 찾아온 손님들이 뉴동대구역의 휘황찬란한 모습에 촌놈처럼 두리번거렸다.
“그…… 밖에서 플래카드를 보고 왔는데, 각성자 전용 DNA 샘플 거래소라는 게 뭡니까?”
“문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상점창에서 구입할 수 없는 각종 물자나 서비스, 혹은 구입할 수 있더라도 더럽게 비쌌던 상품들을 이곳에서는 저렴한 가격으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전기, 수도, 가스도 들어오지 않는 건물에서, 더럽고 추운 잠자리 위에서 지내는 건 이제 질렸다구요?
목욕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간단한 샤워조차 강에서 물을 길어와 팔팔 끓인 다음 써야 하는 게 귀찮다구요?
DNA 샘플만 조금 지불하면 캡슐 호텔에서 꿀잠 자고, 수셰프가 만든 호텔 조식 뷔페를 먹고, 온수와 냉수를 원하는 만큼 사용할 수 있는 목욕 시설에서 피로와 묵은 때를 조질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서비스는 별도 요금 지불이지만.
“정말…… 대단하군요. 그게 가능합니까?”
“곧 기호 1번으로 출마하는 이 이승권은 그걸 해냈습니다.”
내 일장연설을 들은 각성자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 DNA 샘플을 지급했다.
그간 추위, 굶주림, 더러움, 불편함에 시달리고 있던 현대 문명인들은 써먹기도 힘든 DNA 샘플을 이런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컬처 쇼크를 받은 듯했다.
상점창은 생존, 투쟁에 필요한 상품들만 파는 데다 그 효율이 굉장히 좋지 않아서 어중간한 각성자들에겐 애물단지나 다름없었다.
고작 식수 한 병 구입하는 데 DNA 샘플 3개, 배부르게 먹기 위한 한 끼 식사용 밀키트는 DNA 샘플을 최소 5개에서 10개까지는 사용해야 한다.
그마저도 사람에 따라 배부르지 않거나, 기대치에 비해 맛이 없는 불만족한 식사로 끝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군부나 대구 시청에 협력하며, 상점창에서 DNA 샘플로 구입한 연료나 원자재 등을 거래하면서 편의를 제공받고 있던 게 대구의 각성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편의성과 세련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이승권표 DNA 샘플 거래소가 등장하면서 물물 거래의 판도가 뒤집혔다.
“호텔 가면 최소 수십 만원은 주고 먹어야 하는데…… 이 코스 요리가 고작 DNA 샘플 20개로 맛볼 수 있는 서비스라고? 좀비 20마리만 잡으면 되잖아?”
“야, 캡슐 호텔 가 봤냐? 침대가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야…… 그 시몬, 에이 뭐시기 침대보다 더 좋아.”
“이 더러운 놈들아 좀 씻고 다녀라. DNA 샘플 5개만 내면 목욕탕에서 몸 뜨끈하게 조지고, DNA 샘플 3개로 얼음 식혜랑 컵라면도 사 먹을 수 있다.”
“저기 뷰티 숍 가 봤어요, 언니? 피부 망가진 거 어떻게 복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완전 혜자라니까요?”
“듣기로는 피부랑 근육 마사지도 해 준다면서? 난 화장품은 이제 안 발라도 되니까 마사지는 꼭 받아 보고 싶더라.”
보이는 대로, 뉴동대구역은 신장개업 하루 만에 초대박이 났다.
일감이 없어 대구 거리를 전전하고 있던 인재들이 몰려들고, 배가 고파서 하루하루를 넘기기 힘든 사람들이 무료 급식소를 찾아서 다시 살아 갈 힘을 얻고, DNA 샘플을 쓸 곳이 없어 스트레스가 쌓여 가던 각성자들의 천국이 되었다.
저 사람들이 오늘만 방문하고 내일은 방문하지 않을까? 그럴 리가.
여기서 받은 서비스, 무료 배급, 그리고 일을 구할 수 있다는 소식이 사람들을 통해 대구 전역으로 퍼질 것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 자연히 사람이 몰려들기 마련이듯, 거래와 커뮤니티가 활발해지면 그곳이 바로 상업의 중심지가 되는 거다.
뉴동대구역이 대구의 중심지가 되기까지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면 그건 그냥 자신의 능력으로 땅따먹기나 하려는 흔하디흔한 소설 속 치트 먼치킨 주인공일 뿐이야.’
내가 누구인가? 이승권이다.
그냥 이승권도 아니고 존나 이승권이다.
내 안의 지친 영혼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감촉이 예사롭지 않은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하루 종일 간식을 까먹으면서 넷플러스만 감상하고 싶은 황혼기였다.
더 많은 인재, 더 많은 지지, 더 많은 사회 재건의 토대.
그것들이 서로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상호 작용을 일으켜서 무너진 사회를 다시 한번 일으켜 세우는 순간, 마침내 내가 이 모든 정신 나간 짓거리에서 손을 떼고 안락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
그러니까 땅 따먹는 재미 따위에 한눈 팔려선 안 된다는 뜻이다.
해서, 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동대구역의 대합실 한복판에 새로운 입간판을 내걸었다.
-위험한 여정, 후한 임금, 몇 달간 지속되는 겨울의 혹한과 짧은 낮, 끊임없는 좀비와의 사투, 안전하고 안락한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음, 단 성공 시 영광과 명예, 그리고 나 이승권이 적법하게 소유한 토지에서 작위를 부여받을 수 있음.
-(능력과 레벨, 경험에 따라 연봉 협상 가능)
-(경력 있는 신입 우대)
구미에서 발원된 것으로 추정되는 변종 좀비에 대한 조사 및 격살, 그와 더불어 내가 운영하는 거점에 고용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할 의사가 있는 각성자를 모집하고자 공개 모집소를 세웠다.
과거에는 우리의 주적이 인간이었지만, 현재는 우리의 주적이 좀비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봐요, 아재. 역시 여기 있잖아요.”
“그래그래. 네 똥 굵다.”
그때, 공개 모집소를 차린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두 남녀가 있었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아빠와 딸뻘의 나이 차이가 나는 특이한 조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