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24)화 (125/227)

124화 투쟁기 (24)

신해룡과 대략적인 방향성만 논한 독대가 끝나고, 나는 어쩐지 한결 홀가분해진 것 같은 기분으로 제2 작사를 나왔다.

지금 이 기분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3단 변신 전동카를 타고 다니는 내공 열 갑자 요구르트 아주머니가 무심하게 툭 던져 준 요구르트를 마시고 십 년 묵은 변비가 해결된 느낌이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내 혼란스러운 정신 상태에 대해 좀 더 주의했더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겠으나, 원래 사람은 스스로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힘들다고 하지 않나.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하려 했으니 부작용이 나왔다고 할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신해룡 덕분에 일이 잘 마무리되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선 더 이상 걱정되지 않는다.

이로써 내가 여느 먼치킨 소설의 회귀, 빙의 환생 주인공들처럼 100% 완전무결하고 고결한 인간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 나는 실로 인간적인 인간임을 증명한 셈이다.

애초에 할 줄 아는 거라곤 상태창을 외치는 것뿐인데 그런 주인공들과 나를 비교하는 건 조금 미안하지.

“마치 안개로 가득한 숲속을 걷다가 빠져나온 느낌이군.”

밀양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는 것과는 별개로, 신해룡은 나와 가급적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며 대구에서의 자유로운 활동권을 보장해 주었다.

대구 시청 측에서 반발이 있을 거라는 말을 했지만, 그 정도는 자신이 찍어 누를 수 있으니 부담 없이 활동해도 좋다고 한다.

사실 그가 내게 바라는 ‘활동’이란, 지금까지 그래 왔듯 호구처럼 물자를 뿌리고 다녀 달라는 뜻일 터.

아쉽지만 대구의 실세인 군부와 접촉해서 밀양 건에 대해 논하고, 서로의 관계를 확인한 지금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피난민들을 상대로 좋은 이미지를 형성하는 작업은 충분히 진행되었으니까.

‘밀양 건을 논한 뒤에 나눈 짧은 대화로는, 현재 대구에서 피난민 통제와 지원을 굉장히 어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 그래서 더욱 내 도움을 바라고 있는 눈치였고.’

난 호구가 아니니까 대구의 모두를 먹여 살리기 위해 물자를 쏟아붓지 않을 것이다.

대신 현재 대구에서 생활하기 힘들어하는 피난민들 위주로 ‘이주’ 여부를 물을 생각이다.

내 덕분에 남부 지방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된 피난민들이라면 ‘그래도 여기보단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ATX에 탑승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백 명, 천 명, 만 명씩 꾸준히 대구에서 빼낸 뒤 김해와 부산으로 분산 이주시키고, 자연스럽게 거점의 일원으로 녹아들 수 있도록 교육과 훈련을 병행하면 된다.

아랫사람들을 관리하는 중간 관리직(주로 채성아와 김진경)들이 고생깨나 하겠지만, 원래 사회생활이 다 그런 것 아니겠나. 내가 윗대가리인 이상 딱히 그 기조가 바뀌진 않을 거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권력이니까. 너희 [서민]들은 가질 수 없는 것이지.

“그래도 자유 활동을 보장받았으니 그 값은 치러야겠지.”

우선은 동대구역을 거점으로 지정해서 대구의 전초 기지로 삼을 예정이다. 그다음 ATX를 비롯해 각종 거점에서 제공할 수 있는 각종 서비스를 선보이면서 상거래와 지역 이동(이주)를 유도할 것이다.

당초 내 목적은 경상도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여 지역 커뮤니티를 활성화하는 것이었으니, 대구와 밀양, 부산, 김해를 기찻길로 연결할 수만 있다면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리라.

현재 대구는 너무나도 많은 피난민들의 안전과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기 어려운 입장이며, 피난민들 역시 충분치 않은 물자와 치안 공백으로 나날이 불안에 떨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대구 북부 외곽에서 야음을 틈타 인간을 습격한다는 그 변종 무리는 이미 대구 전체에 트라우마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였다.

내가 그 불안을 덜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각성자이면서 외부인의 신분으로도 충분히 여론을 등에 업는 것이 가능하겠지. 그럼 눈에 띄게 대구 인구를 유출시켜도 큰 걸림돌은 없을 거다.

그러니까 저 동대구역은 이제 내 거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다.

“거점 지정.”

-경고 : 해당 거점은 다수의 중립체(외부인)에 의해 임시 통제되고 있는 거점입니다. (대구 전역)

-경고 : 임시 통제 구역 내 거점을 허가 없이 지정할 경우, 구역을 통제 중인 대표자에게 자동으로 경고 메시지가 발신됩니다.

-지역 임시 대표자 : 신해룡 육군 참모 총장(허가), 허판석 대구 시장(비허가)

신해룡과는 이미 얘기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허가’ 상태로 되어 있었지만, 아직 만나 본 적 없는 대구 시장은 당연하게도 ‘비허가’ 상태였다.

만약 이대로 무시하고 거점 지정을 해서 동대구역을 강제 탈취한다면 당연히 대구 시장에게 ‘느그 거점 맛있더라’ 같은 도발 섞인 경고 메시지가 날아갈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일개 대구 시장이 나 김해의 적법한 군주이자 부산의 시장 후보, 경상남도지사(진), 서울의 아들, 국내 최고 섹시남 기타 등등 이승권의 행보를 막을 수는 없지.

-거점을 강제 탈취하시겠습니까? (거점 지정 스킬 B- 등급 이상 요구)

설마 부산역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대형 기차역을 하나 더 손에 넣게 될 줄이야.

“운이 좋군.”

* * *

부족한 군인과 경찰을 대신해 자경단 비스름한 역할로 치안 공백을 메우고 있는 각성자들에게 중요한 공지 사항이 전달되었다.

그것은 바로 대구 내에서 첫 외부인이자 각성자인 이승권이라는 인물의 활동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외부인이면 외부인이고 각성자면 각성자일 뿐인데, 굳이 군부에서 따로 공지 사항으로 전파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중요한 인물일 것이라는 추측이 오갔다.

각성자에 대한 취급이나 시선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군부에서 특정 인물을 비호할 정도라면, 그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군부가 홀라당 넘어갈 정도의 메리트를 보유했다는 뜻이니까.

“시기가 참 미묘하지 않냐?”

“아재도 혹시 음모론자예요? 정치인들이 자기 잘못 덮으려고 연예인 열애설 막 터뜨린다고 믿고?”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냐?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는데 갑자기 외부에서 들어온 각성자의 활동을 군부가 직접 보증하겠다고 나섰잖아. 이게 무슨 의미겠냐?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우리가 먼저 숟가락 얹었다 이거 아니겠어?”

딱히 정치와 관련이 없음에도 왠지 40대 아재가 그런 식으로 떠들면 정치 얘기처럼 들렸기에, 진가희는 쯧쯧 혀를 찼다.

엽사로서의 경험과 능력, 그리고 각성자로서 자랑하는 스킬의 효용성은 분명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한 번씩 아재 티를 낼 때마다 진가희는 세대 차이를 격하게 느껴야 했다.

술집에 앉아서 소주나 막걸리 까 마시면서 경제가 어떻니, 정치가 어떻니 밤새도록 떠들어 댈 것 같은 이미지였으니까. 실제로 술만 있었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사태 초기에 몇몇 각성자들 중에서 능력이 굉장히 좋은 사람들은 대구 시청이나 군부에서 따로 스카웃하기도 했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케이스겠죠.”

“그거랑은 느낌부터가 다르지 않냐? 이렇게 대놓고 떠들었던 적은 없잖아. 그냥 조용히 데려가서 자기들 편으로 삼았지.”

“외부인이라서 그런 거겠죠. 아, 혹시 그건가?”

“뭔데?”

한동석의 물음에 진가희는 자신의 검을 손질하다 말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때는 일하러 나가 있던 상태라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소문이 제법 돌고 있더라고요. 갑자기 동대구역으로 치고 들어왔다는 이상한 기차.”

“아, 그거. 나도 들은 적 있는 것 같다. 동대구역 근처에 자리 잡은 구세계 백화점을 대구 시청 소속 각성자들이 통제하고 있잖냐. 그 양반들이 근무지에서 하루 종일 그 얘기만 하더라고.”

“외부인에 각성자, 군부가 대놓고 활동을 보증할 정도의 인물, 역시 그 사람 아닐까요?”

“기차 끌고 온 사람? 정황상 맞겠지.”

“아니, 기차를 끌고 온 건 끌고 온 거고, 지난번에 현장에서 우리가 놓쳤던 변종을 처리한 각성자 말하는 거예요.”

진가희의 말에 한동석은 갑자기 왜 얘기가 삼천포로 빠지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 역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군부가 일개 개인을 위해서 공식 입장을 표명했다는 건, 적어도 그 사람이 가진 힘과 권위가 군부도 무시 못 할 만큼 대단하다는 것 아니겠나.

게다가 동대구역에 대놓고 기차를 끌고 들어와서 불쌍한 피난민들에게 아낌없이 공짜로 물자를 뿌렸다고 한다면, 그만한 양의 물자를 제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을 만큼 능력도 출중하다는 뜻이다.

각성자는 레벨이 오를수록 인벤토리의 무게 제한이 늘어나니까, 수천 명에게 물자를 꺼내서 펑펑 뿌릴 정도라면 레벨도 어마어마하게 높을 터.

자신이 그날 밤 추측했던 상황과 절묘하게 딱 맞아떨어진다.

“설마 그게 동일 인물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끼워 맞춘 느낌인데…….”

“솔직히 아재도 반쯤은 확신하고 있잖아요. 그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쯤은 돼야 혼자서 기차도 끌고 다니고, 사람들에게 물자도 펑펑 뿌리고, 군부의 지지도 받을 수 있다는 거.”

“그건…… 그렇지.”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딱 맞아떨어지는 요소밖에 없다. 만약 이게 추리 소설 속에 등장한 단서였다면 딱 봐도 누군가가 교묘하게 파 둔 함정이라고 의심했을 것이다.

오히려 이것저것 떠들기 좋아하는 한동석과 달리, 진가희는 이미 마음속에서 결론을 내린 듯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직접 만나러 가 보는 건 어때요?”

“만나서 뭐 하게? 단독으로 외부 지역에서 활동할 정도면 엄청난 각성자일 텐데, 우리 같은 어중이떠중이를 상대해 주겠냐?”

“만나러 갈 이유야 적당히 만들면 그만이고, 외부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면 아직 대구 내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도 얼마 없지 않겠어요?”

“이미 군부랑 알고 지내는 사람일 텐데 우리가 명함이나 내밀 수 있겠냐? 거들떠보지도 않을걸.”

“사회생활의 기본은 ‘끈’이라고 아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했으면서 왜 갑자기 빼고 그래요? 아 혹시…… 쫄?”

“쪼, 쫄?! 누가? 내가? 하 참! 야! 강원도 산천초목이 벌벌 떠는 세체엽이 바로 나 한동석이야!!”

“뉘예뉘예~”

20대의 매콤한 언어폭력에 40대 아재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결국 옥신각신하면서도 그 사람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대구역으로 발을 옮긴 지 대략 30분쯤 지났을까.

두 사람은 어째서인지 자신들이 알고 있던 동대구역과는 많이 다른, 구체적으로는 ‘더럽게 큰’ 건물 하나가 기존의 동대구역을 집어삼킨 광경을 목격했다.

분명 환승 센터를 포함하고 있는 구세계 백화점에 비해 동대구역의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오히려 동대구역이 복합 환승 센터를 씹어 먹을 만큼 벌크업을 한 상태였다.

“이게 무슨…….”

“와, 찢었다.”

벌크업을 끝마친 동대구역 ver.2는 이미 소식을 듣고 몰려든 수많은 민간인과 각성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름대로 빨리 움직였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도 다른 이들에 비하면 한참이나 늦었던 것이다.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두 사람의 눈은 동대구역 건물 외벽에서 펄럭이고 있는 대형 플래카드였다.

-뉴동대구역 신장개업! (마침내!)

-각성자 전용 DNA 샘플 거래소 운영 중! (효율적인!)

-어디 가서 이 가격에 못 즐기는 다양한 서비스 제공!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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