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투쟁기 (23)
채성아는 자기 개발에 상당히 부지런한 인물이었다.
이는 전적으로 적지 않은 연세임에도 가정 부양과 취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있었던 그녀의 아버지 덕분이었다.
사람은 부지런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즐기면서도 먹고살 수 있을 만큼 돈도 벌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에 감화되었던 것이다.
의사만큼은 아니지만 간호사 또한 엄청난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기에, 그녀는 언젠가 두 마리 토끼를 잡지 못하게 될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간호사가 되었다.
때문에 의사에게 치이고, 선배 간호사에게 치이고, 환자에게 치이고, 엄청난 근무 시간과 노동 강도에 시달리면서도 그녀는 자기 개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자신을 숙련된 간호사로 만들어 주는 필수 요소이기에 거부하지도, 회피하지도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복잡한 인간관계에 대응하는 법도, 결국 많은 사람들과 만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터득할 것이라고 믿었다.
지식 없이 함부로 입을 열 수 없고, 경험 없이 함부로 손을 쓸 수 없으며, 감정 없이 타인과 교류할 수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채성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 설계의 방향성이 살짝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간호사님, 농업과 관련된 전문 지식이나 농사 경험을 가진 분들을 소집했습니다.”
“간호사님, 이쪽의 물자는 어디로 옮기면 되겠습니까?”
“간호사님, 건물 내부 청소가 끝났습니다.”
“간호사님, 공사 인원 차출했습니다.”
“간호사님…….”
간호사님, 간호사님. 사람들에게 자신의 직책으로 불리는 건 그녀에게 매우 익숙한 일이었다.
다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필요로 할 거라곤 예상치 못했을 뿐.
“지금은 겨울인 데다 이곳은 바다와 상당히 가까우니까 대부분의 농작물은 외풍(해풍)과 추위를 이겨 낼 수 없겠죠. 일단 사용하지 않는 건물들을 임시 수경 재배 시설로 바꾸는 작업부터 진행하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수경 재배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전문적인 수경 재배 시설과 그걸 관리할 수 있는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 본격적인 시스템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식물의 생장에 필요한 양액, 그리고 양액의 농도와 수위를 일관되게 유지시켜 주는 전문 설비 없이도 간단하게 시도할 수 있는 ‘물꽂이’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물꽂이 방식으로 키워 낼 수 있는 식물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현시점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으면서도 관리와 배급이 편리하고, 식용 효율도 좋은 몇몇 식물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한국인의 식탁 위에 자주 오르는 양파와 고구마. 무순이 있으며, 그외에도 향신료에 해당하는 민트나 허브도 생산이 가능하다.
사람도, 장비도 모두 부족하고 계절마저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지금, 무턱대고 사람들을 끌어모아 토경 재배(논밭 경작)에 뛰어들어 봤자 의미가 없다.
따라서 이승권이 거점으로 삼지 않은 일반 건물들을 깨끗이 청소한 다음, 내부에 간단한 수경 재배 시스템을 만드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행히 물이라면 거점에서 무한정 공급해 줄 수 있었고, 물꽂이 방식 재배에 필요한 기본적인 종자도 김해에선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완벽한 시스템 설계를 필요로 하는 수경 재배에 비하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채성아는 진땀을 뺐다.
비교적 멀쩡한 건물들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시도하는 실험적인 자급자족 시스템이라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품이 결코 적지 않았던 것이다.
“후, 지금까지 거점에서 나온 물자만 편하게 까먹다 보니 우리 손으로 직접 물자를 생산하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잠시 잊고 있었어요.”
“아무렴. 농사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간호사 아가씨.”
전형적인 농부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껄껄 웃으며 건물 내부의 잔해를 치워 냈다.
손재주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을 따로 모아 물 공급용 라인을 새롭게 만들고, 중간중간 협의를 거치면서 보완하거나 수정할 점도 찾고, 수경 재배 규모는 어느 정도로 설정하고 작물을 재배해야 하는지 농업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 논의하고.
본래 직책에 맞지 않는 일을 하다 보니 손발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꿋꿋하게 현장에 남아 함께 일을 거들고, 작업자들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이유는 ‘책임’을 넘겨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승권이 김해 공항을 떠나기 전에 모두가 일하는 동안 자신은 좀 놀아야겠다고 떠들었지만, 사실 거점 내에서 그가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퇴역 군인이면서 엄청난 능력을 지닌 각성자였기에, 일신의 능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혼자 움직이는 타입이었다.
그 증거로 홈마트를 확보했을 때, 인제대에서 사람들을 구출해 냈을 때, 또 활천초를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약탈자 무리를 기어이 괴멸시켰을 때, 그는 언제나 혼자 움직였다.
‘그건 아마도 과한 폭력과 비정한 결단을 내리는 모습을 거점 일원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일 거야.’
그와 함께 움직이며 거점 전쟁을 치르거나, 거점에서 생활해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능숙한 일처리와 공평함에 대해 논한다.
어딘가 굉장히 날카롭고 쉽게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인 건 맞지만, 최소한 등을 맡길 수 있는 믿음직한 동료이자 생존자 그룹의 이끌 자격이 있는 리더라고.
의도적으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 같으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배척하지는 않고, 자칫 누군가만 편애할 수 있다는 착각이 들지 않게끔 공과 사의 구분이 확실하다.
게다가 상벌의 기준도 철저하기 때문에 ‘의무’를 망각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그의 거점 내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믿고 맡긴 일인데, 조금 힘들다고 내팽개치거나 설렁설렁할 리가 없잖은가.
모르면 아는 사람에게 꼬치꼬치 캐물어서라도 배우고, 힘들면 잠시 쉴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할 작정이다.
생각했던 것만큼 완벽하게 일 처리를 못 하는 것보다, 생각했던 것만큼 열심히 하지 않은 자신에게 더 큰 실망을 할 것 같으니까.
“이 정도면 당장 올겨울 정도는 무난하게 물꽂이를 진행할 수 있겠구만.”
하우스 농사 경험이 있다던 농부가 물꽂이용으로 만든 통과 임시로 연결된 물 공급 라인을 보면서 말했다.
거점에서 생산된 깨끗한 물을 대형 물탱크에 보급해서 물을 공급할 수 있으며, 먼지와 해충, 외풍을 막기 위해 창문을 빈틈없이 막고 단열재도 설치했다.
이제 공급된 물이 물꽂이용 통을 가득 채우면, 종자가 준비된 양파나 고구마 종류부터 키워 낼 수 있으리라.
본격적인 토경 재배는 겨울이 지나고 날이 좀 풀려야 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에, 채성아는 이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당연히 물꽂이를 활용한 수경 재배 하나에만 만족할 수는 없으니, 최근 농가를 탈출해 야생에서 노닐고 있다는 닭이나 오리 같은 소형 가축을 잡아서 길러 볼 계획도 세웠다.
소나 돼지 같은 대형 가축은 좀비들의 습격을 피할 수 없었지만, 바깥으로 나돌고 있는 물자 수색 팀이 간혹 산이나 논밭, 강 인근에서 닭과 오리 등을 본 적 있다고 보고해 왔던 것이다.
거점 일원이나 노동자 계급 중에서도 소일거리 삼아 가축을 키워 본 사람이 제법 있다고 하니 썩 괜찮은 계획이었다.
아무래도 바다나 강에서 생선이라도 잡지 않는 한, 생산과 유통이 모두 박살 난 이 시국에 단백질 공급원은 무척이나 귀중한 법이니까.
* * *
채성아가 사람들을 모아 빈 건물을 정리하고 자급자족 시스템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이, 김진경 경장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찌 보면 물자 확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무력 집단 양성은 결코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었다.
“먼저 이것 하나만큼은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거점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희생을 강요받는 입장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저와 교관들을 통해 무기를 다루는 법, 좀비들과 전투하는 법, 약탈자들을 상대하는 법을 배우고 또 실전에 투입될 테니 말입니다.”
김진경 경장과 그가 신중하게 뽑은 교관들은 오와 열을 맞춰 선 수백 명의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들 모두 건장한 체격과 적당한 연령대의 남성들이었다. 달리 말하면 대한민국 병무청이 환장하다 못해 탐내는 이 시대 최고의 인재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상당수가 2차 남북 전쟁 당시 예비군으로 소집되었던 군필자들이며, 극히 일부는 최전방에 투입된 것까지는 아니지만 북한 땅에서 치안 임무를 수행한 사람도 있었다.
민간인 생활이 길었던 탓에 조금 녹슬어 있을 뿐,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전술과 교리로 훈련받는다면 다시금 날카로운 칼이 될 수 있는 이들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단순히 전투력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거점과 가족, 동료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적과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심어 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서로 배신하지 않고 끈끈한 사이가 될 수 있다.
준비되지 않고 적응하지 못한 자들을 훈련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의무를 확립시키고 전우애를 키운다, 이것이 김진경 경장이 생각한 단기 심화 훈련 과정이었다.
“대부분이 군필자인 만큼 제식 소총을 다루는 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군에서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자들의 적이 더 이상 인간만이 아니게 된 지금, 여러분이 알고 있는 기존의 상식이나 전투 교리를 한번 리셋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점의 리더인 이승권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2인자이자, 가장 많은 전투 경험을 보유한 건 바로 김진경 경장이었다.
그 못지않게 좀비들과 맞서 싸우며 힘들게 물자를 구하러 다녔던 박지찬 병장도 있지만, 그는 군인 각성자로서 김해 공항에서 합류한 군인들을 따로 통솔하는 임무를 맡았다.
따라서 지금 이들을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에 맞게 개조시킬 수 있는 인물은 김진경 경장 한 명뿐.
그는 꽤나 무식하지만 동시에 단순명료한 방법부터 동원했다.
우선 현대의 나태한 생활로 녹슬어 있던 예비군들의 육체를 다시 전성기 시절로 되돌리고, 잠들어 있던 감각을 일깨울 겸 체력 단련부터 시작했다.
대좀비전의 스페셜리스트이자 강력한 각성자가 교관들과 함께 눈을 부라리며 명령하는 것을 거부할 용자는 없었다.
영내 연병장은 아니지만, 김해 공항의 활주로는 땀내 나는 사내들이 우르르 뛰어다니기엔 충분히 넓고 긴 트랙이었다.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뛰어서 유산소를 조지고, 인근 실내 체육관으로 이동해서 근력 트레이닝으로 또 조지고, 잠시 쉬었다 싶으면 또 조지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하루 종일 녹초가 될 때까지 시달린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영양가 높은 식단과 넉넉한 배급.
분명 유산소와 무산소로 넝마가 될 때까지 조져지면서 쌍소리가 절로 나왔는데, 푸짐한 식사와 전투원 후보들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배급은 그들을 세뇌하기에 충분한 뇌물이었다.
정식으로 전투원이 된 것도 아니고, 그 예비로 훈련받고 있을 뿐인데도 벌써부터 대우가 상당히 괜찮았으니, 그들은 무심코 ‘어? 사실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언젠가는 총과 칼을 들고 직접 나서서 외부의 적과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는 걱정이 있지만, 대신 그만큼 대우도 잘해 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세계 유일 휴전 국가이자 분단 국가의 군인으로 2년을 희생했지만 정작 나라와 국민에게 인정받은 적 없던 그들이, 지금은 좀비와 약탈자로부터 거점을 지켜 줄 인재 취급을 받고 있으니 그 괴리감이 크게 작용했다.
-식판에 본인이 원하는 만큼 밥과 반찬을 퍼 담을 수 있다고? 내가 알던 K-군대의 배식은 대체……?
-전투원 후보는 원하는 물자를 따로 배급 신청할 수 있다고? 왜? 왜 그게 가능한데?
-우리보다 직책도 높고 힘도 센 사람들이 인격 모독을 안 한다고? 차별도 안 한다고?
훈련, 뇌물, 세뇌, 훈련, 뇌물, 세뇌.
햄스터 쳇바퀴 굴리듯 사람을 냉탕(지옥)과 온탕(천국)에서 미친 듯이 꺼냈다 뺐다 무한 사이클을 돌리니, 결국 비관적이고 냉소적이던 그들의 가치관도 크게 바뀌었다.
-내가 이렇게나 대접받고 인정도 받는데, 당연히 총 들고 싸워서 우리 거점과 일원들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어? 훈련 힘드네? 근데 안 빡치네? 아! 사실 훈련은 힘든 게 아니구나!
-일 잘하면 더 좋은 대우를 받겠지? 올해의 MVP 전투원은 나다!
이승권이 잠시 김해에서 눈을 뗀 사이, 채성아와 김진경 경장의 주도하에 ‘거점 급성장 계획’은 착실하게 결실을 맺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