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투쟁기 (21)
현재 대구라는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 이 도시에서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부류인지는 얼추 파악했다.
이 거대한 도시가 닭장처럼 빡빡하게 운영되고 있으니 삶이 궁핍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블록버스터급 재난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으니 어쩔 수 없다.
인간은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도 결국 이겨 내고 적응하는 동물이기에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으나,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
갓난아기가 제 몫을 다할 수 있는 성인이 되기까지의 시간, 겁쟁이가 용감한 병사로 단련되기까지의 시간, 너무나도 당연하게 삶을 얘기하던 사람들이 마침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까지의 시간.
결코 씻을 수 없는 상흔이 남는다고 해도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먼저 쓰러진 사람들은 의도치 않았지만 후대가 대비하기까지의 영양분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성장한 후대가 다시 전성기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인류가 자랑하는 짧은 역사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반복되어 왔다.
“감사합니다! 이걸로 우리 애들을 먹일 수 있겠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을 믿지 않았다면 희대의 사이코패스로 성장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성장기를 보내 왔다.
그저 내 경우에는 고작 몇 년 동안 보고, 듣고, 겪었던 인간의 추악함 농도가 너무나도 짙었을 뿐이다. 그들과 내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돋을 만큼 깊은 혐오가 자리 잡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내 정신과 몸은 5년이라는 전쟁의 참사에 여과 없이 그대로 노출된 탓에 크게 망가졌지만, 그럼에도 나는 마지막 하나만큼은 지키기로 했다.
바로 ‘선’이다.
상대가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호의 정도는 베풀어 줄 수 있다. 내가 그 정도 여유도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하지만 상대가 선을 넘는다면 법과 도덕이라는 족쇄도 나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고작 그 선 하나를 지키지 못해서, 애초에 지킬 생각이 없어서 기어이 내 심기를 건드리는 상대라면 굳이 봐줄 필요가 없으니까.
그게 내게 남은 마지막 인간성을 지키는 최후의 수단이었고, 더 이상 순수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내가 흑과 백을 구분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소문을 듣고 늦게나마 찾아온 마지막 피난민에게 원하는 구호물자를 나눠 준 나는 손을 탁탁 털었다.
반나절 가까이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뭘 원하는지 묻고, 그에 해당하는 물자가 있으면 즉시 꺼내서 나눠 주는 작업만 반복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던 이 작업도 내가 끈덕지게 붙들고 있으니 결국 끝이 찾아오긴 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도 내 구호물자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바깥에 제법 많이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군인과 경찰, 그리고 각성자들이 피난민 통제에 나선 모양이었다.
물론 그들이 피난민들에게 부조리한 폭력을 휘두를 만큼 개막장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놈들이 통제하는 도시였다면 지금쯤 한참 전에 망하고도 남았겠지.
뭐, 이 정도면 피난민들에게 충분히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는 한편, 대구를 통제하고 있는 세력에겐 내가 가진 잠재력을 필요한 만큼 보여 줬다고 생각한다.
ATX에서 내린 나는 반나절이 넘도록 이쪽을 지켜보고 있기만 했던 자들에게 다가갔다.
재수 없게 총이라도 맞으면 어쩌자고 맨몸으로 저들 앞에 섰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또 그렇게 아주 대책 없지는 않다.
‘처음부터 나를 적대할 생각이었다면 아예 피난민들을 싹 다 치워 내고 나부터 조졌겠지. 아니면 반대로 피난민들을 내 발목을 묶는 용도로 사용해서 철저하게 움직임을 봉쇄한 다음 조졌든가.’
저쪽에서 고작 나 한 명 데려가려고 다수의 군인과 각성자들까지 동원한 이유는 순전히 기선 제압을 하기 위함이다.
때론 높으신 분들의 체면이 어떤 요소보다도 중요히 여겨지는 것이 군대라는 집단이기 때문에, 초장부터 내 기세를 꺾어 둘 의도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런 의도가 뻔히 보이는 허세에 움츠러들 만큼 내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대구로 이전한 임시 육군 본부에서 나온 장호연 대위입니다. 본래는 허가 없이 대구에 침투한 것도 모자라, 처음 조사 요구에 응하지 않은 당신을 체포하는 게 맞습니다만, 상부에 당신과 만남을 갖길 원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니 잠시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어렵지 않죠. 고작 사람 한 명 데려가자고 이렇게 우르르 찾아온 게 황당하기는 한데…….”
“이곳 대구에선 모든 각성자들의 명단과 직업명, 능력에 대한 정보가 상시 공유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사태 초기에 각성자 범죄가 판을 쳐서 말입니다. 그래서 각성자들에 대한 경계가 어느 정도 있는 편이니, 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노골적으로 나를 포함한 다른 각성자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인 걸까.
장호연 대위는 주변 각성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든 말든, 정작 본인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협조만 잘해 주시면 별문제 없을 겁니다.”
“그런 말은 예전에도 질리도록 들어 봤는데 보통은 지켜지는 법이 없더군요. 뭐, 좋습니다.”
“……우선 간단한 몸수색 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몸수색이 진행되기 전, 내가 보험처럼 품속에 지니고 다니는 군용 대검이나 권총, 수류탄은 즉시 인벤토리에 수납해 버렸다.
인벤토리를 보유한 각성자에게 몸수색을 하는 의미가 없다는 건 그도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형식적으로나마 내 몸수색을 진행한 뒤 군인과 각성자들을 내 옆에 밀착시켰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즉각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는 인원을 내게 밀착시키는 것으로 돌발 상황에 대처하겠다는 의도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조금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였다면 총을 든 군인들을 내게서 최소 5m 이상은 떨어뜨려 놨을 거다. 총신이 긴 소총을 든 군인은 역설적이게도 근접전에서 굉장히 취약한 모습을 보이니까.
특히 상대가 나 같은 각성자라면 더더욱 비각성자는 가까이 두면 안 된다.
‘각성자가 아무리 강해 봤자 특정 스킬이나 아이템의 보조가 없다면 총 한 발에 죽는 건 똑같고, 무엇보다 군인들의 수가 압도적이니 자신들이 결코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각성자들의 힘은 인정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각성자 그 자체를 인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믿을 수 있는 동료와 써먹기 좋은 도구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특히나 사태 초기에 각성자 범죄가 판을 쳤다고 하니, 아마 이 도시에서 각성자와 비각성자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묘한 기류와 간극이 존재할 것이다.
그 점이 내게는 참으로 잘된 일이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나는 사람이 정말 많이 필요하다. 각성자든 비각성자든 이 무너진 사회를 재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인재라면 누구든 상관없다.
하지만 지금 나를 보자고 하는 사람, 아마도 군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양반은 어떨까.
군인들의 성향이 이럴진대, 군부의 높으신 분도 색안경을 끼고 각성자를 평가하진 않을까?
아직 만나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 상대의 성향을 확정짓는 건 너무 섣부를 수도 있지만, 내가 누군가? 지난날 동안 참 많은 인간 군상을 봐 왔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인간 감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독심술 마스터 이승권이란 말이다.
‘내 추측대로라면 상대는 분명 배가 불룩 튀어나왔으며, 탈모이며, 성격이 괴팍하고, 대낮에도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숙취에 찌들어 있겠지. 아마 첫 만남부터 죽빵 꽂고 싶은 인상일 거다. 내 일주일 치 요플레 뚜껑을 걸 수도 있어.’
내 촉(색안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동대구역에서 출발한 차량은 우리를 금방 제2 작전 사령부 앞에 내려놓았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이동 시간도 짧았다.
하지만 이동이 빨랐던 것과는 별개로, 나는 사형을 선고받은 연쇄 살인범처럼 군인과 각성자들에게 밀착 포위당한 채 조금 느리게 걸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마주친 2작사 경계 근무에 투입된 군인들은 한눈에 봐도 이 부대 저 부대에서 막 끌고 온 이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도시 외곽 경계 때문에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 달 전 대구로 피난 오는 길에 너무나도 많은 군인들이 희생되고 여러 부대가 해체되었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지금 군인들에겐 ‘능숙함’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허니 반 갈릭 반 치킨 같은 근본 없는 군대가 밤낮으로 도시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는 순수하게 존경심을 표하고 싶지만, 아직 이 도시에 대한 나의 마지막 평가가 남아 있었다.
그 마지막 평가는 정체도 알 수 없는 외부인 각성자를 과감하게(혹은 겁 없이) 2작사로 불러들인 인물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후에야 결과가 나올 것이다.
“충성! 상부에 보고가 올라간 예의 인물을 호송 중입니다.”
“충성. 이미 연락은 받았습니다. 통과.”
지금까지 봐 왔던 일반적인 군인들과는 상당히 분위기가 다른, ‘MP’ 견장을 착용하고 있는 떡대 군인들이 우리를 건물 내부로 들여보내 주었다.
내 눈썰미가 아직 죽지 않았다면 이들은 도시 외곽에서 변종 좀비들과 격전을 벌였던 그 각성자들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강할 것이다.
그들 옆을 지나가면서 서슬퍼런 눈빛을 교환한 나는, 이윽고 높으신 분이 기다리고 있다는 공간으로 안내받았다.
그곳은 꽤 넓은 회의실이었는데, 그런 것치곤 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인물이 단 두 명뿐이었다.
긴 회의용 테이블 가장 끝자리, 이른바 상석에 위치한 노년의 포 스타와 그의 전속 부관 역할을 하고 있는 중령 계급의 남자였다.
본래 포 스타의 전속 부관이라고 해도 소령이 맡는 게 일반적이지만, 지금 대구에 자리 잡은 군의 체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눈치는 아니었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보다 첫인상은 틀림없이 ‘배가 불룩 튀어나왔으며, 탈모이며, 성격이 괴팍하고, 대낮부터 숙취에 찌들어 있고, 첫 만남부터 죽빵 꽂고 싶은 인상’일 거라고 확정 지었던 내 예측이 무색하게도, 저 앞에 앉아 있는 포 스타는 딱 군인의 표준 같은 남성이었다.
노년의 나이에도 적당히 관리해서 건장한 체격과 날카로운 인상, 스트레스 때문에 주름 잡힌 미간, 그리고 이런 위기 속에서도 아직 죽지 않은 눈빛까지.
“지금부터 중요한 대화를 나눌 예정인데, 미안하지만 자네들은 잠시 바깥에서 대기해 주게.”
“외람되지만 호위 없이 정체도 알 수 없는 외부인 각성자와 같은 공간에 남아 계시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절차에 따라 몸수색을 진행하기는 했지만 각성자들은 모두 인벤토리라는 수단이…….”
“그 또한 숙지하고 있네. 그리고 호위가 없기는 왜 없나? 여기 특전사 출신인 내 전속 부관이 있지 않나.”
“……이자는 각성자입니다.”
“각성자도 우리와 같은 인간 아닌가?”
그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한마디는 아마 ‘총 맞으면 똑같이 죽는’이었을 거다.
결국 호위로 남아 있으려던 군인과 각성자들을 모두 내보낸 뒤에야 그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나 역시 그의 인상을 찬찬히 뜯어 보며 대략적인 정보를 파악해 나갔다.
‘대구로 임시 이전한 육본에서 가장 높은 인물, 별 4개, 그리고 육군. 육참 총장이구만.’
합참 의장을 제외하면 국군 의전 서열 2위이며, 실질적으로 육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 육참 총장만 있고 육참 차장을 비롯한 다른 장성들이 없는 걸 보아하니 정말로 나와 독대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옆의 전속 부관은 문자 그대로 전속 부관이니까 없는 셈 치고.
“자, 그럼…… 모처럼 마련한 뜻 깊은 자리의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들도 사라졌으니 이제 편하게 대화할 수 있겠군. 그 전에 내 소개부터 하지. 나 육참 총장 신해룡일세. 약 1년 전에 이번 정부에서 종전 선언을 하면서 임명됐지.”
“이승권입니다.”
“……상당히 간결한 소개군. 젊은 친구니까 좀 더 이것저것 말할 거리가 있을 줄 알았네만.”
“제가 군대라는 집단에 쌓인 혐오감이 적지 않다 보니 아무래도 상대가 군인이라면 말이 짧아지는 버릇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부분을 차치하더라도, 제 소개로 내세울 만한 건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애초에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서요.”
그렇다고 김해 군주 이승권(SSR+), 오늘은 왠지 기분이 꿀꿀한 이승권(R+) 같은 어중간한 자기 소개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를 소개하고 표현하기에 가장 걸맞은 건, 내 이름 석 자가 전부다. 이건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단언할 수 있다.
“행동거지나 분위기로 보건대 전직 군인처럼 보이지만, 지금은 소속이 없다면 그렇게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하지만 난 자네가 소속된 세력도, 거처로 삼고 있는 거점도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네만. 어떤가? 내 말이 틀린가?”
“그런 자잘한 요소들이 저를 대표할 수 있을 만큼 의미 있는 것들은 아닌 것 같군요. 하지만 굳이 그렇게 물으신다면 맞다고 답해 드리죠. 예, 저는 대구 바깥에서 온 외부인입니다. 엄연히 소속이 있고, 거점도 있고, 또 개인적인 목적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성자이며, ATX를 타고 다니며, 또 피난민들에게 공짜로 물자를 나눠 주는 이상한 놈이다 같은 설명까지 덧붙일 필요는 없겠지.
신해룡 대장은 잠시 턱을 괸 채 조용히 나를 바라보더니,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도시에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이상 행동을 벌인 이유, 설명해 주겠나?”
아, 바로 직구로 꽂아 넣는군.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 역시 본론부터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이만한 규모의 도시와 거래를 트면 좋겠다 싶어서 말입니다. 다른 도시도 몇 개인가 둘러봤지만 그럴 만한 여건이 되는 도시는 대구뿐이더군요.”
“무엇과 무엇을 거래하고자 하는가?”
“상도덕과 신뢰.”
내가 입찰한 밀양에 너희가 상회 입찰한 거 다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