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20)화 (121/227)

120화 투쟁기 (20)

그 기괴하고 영악한 변종은 정말로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드리워야 활동한다는 말이 사실인지, 동이 트기가 무섭게 대구는 다시 조용해졌다.

태양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살아 갈 수 있는 삶의 원천이자 동력. 그리고 안녕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만고불변의 상징.

현재 대구에 있는 수백만 국민들 중 밤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그렇기에 약속이라도 한 듯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보고 열광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두려운 밤이 무사히 지나가고 밝은 아침이 찾아왔다는 건, 자신들이 또 한 번 지옥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물론 모두가 아침 해를 보고 무조건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건 아니었다.

간밤에 피해자가 없지는 않았기에, 아침이 되어서야 그 실상을 확인한 사람들이 저마다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절망에 몸부림쳤다.

“이 도시가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겠군.”

나는 입김이 절로 새어 나오는 쌀쌀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저 멀리서 박살 난 도시 외곽 방어선의 잔해를 수습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간밤에 내가 확인했던 구역 외에도 그 변종 좀비들이 기습을 가했는지, 대구 북부 외곽 방어선 곳곳에서 씁쓸한 참상이 아침 햇살 아래에 모습을 드러냈다.

좀비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뜯어먹힌 시체, 혹은 좀비가 되었지만 군인들에 의해 벌집이 된 시체, 좀비를 막으려다 불상사를 당한 군인이나 각성자들까지.

그들의 시체는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고 관까지 짜 줄 여력이 없었기에, 도시 외곽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한데 모아 불태웠다.

이미 도시의 모든 기능을 상실해 버린 부산과 달리, 대구는 오히려 도시와 사람들 대부분이 멀쩡했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고역인 곳이었다.

시체를 치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다음 날 자신이 시체로 치워지지 않기를 기도하며 하루를 끝마쳐야 하는 곳.

이제는 내 홈그라운드가 된 김해나 부산은 좀비들을 치워 내고 인간의 영역을 재건하는 일만 남았지만, 반대로 대구는 지켜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재건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단 말이지. 어째서 저 변종 좀비들은 대구 북부에서만 활동하는 걸까? 어차피 대구는 분지 도시라서 주변이 온통 산이니까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날뛰기 좋은 지형인데.’

해가 떠 있을 때는 절대로 활동하지 않는다면 산속에 숨어 있기만 해도 충분하다. 경상도와 강원도까지 쭉 이어지는 산맥의 규모가 그렇게 작은 것도 아니니 몸을 숨기기엔 최적이다.

하지만 내가 남쪽에서 ATX로 선로 바리케이드를 박살 내며 무단 침입을 했을 때도 방어선이 그렇게 두터운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최소한의 경비 인력과 구색만 갖춘 정도였다.

‘어쩌면 일반 좀비와는 다른 신체 구조와 생태를 가지고 있어서 활동 반경이 극도로 좁은 것일지도 모르겠어.’

놈들의 신체 능력은 분명 각성자와 비등비등한 수준이지만, 감염이 목적인 일반 좀비와 다르게 ‘사냥’과 ‘식사’가 주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즉 짧은 시간에 폭발적인 신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대신, 많은 열량(에너지)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리고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막기 위해서 낮에 휴면 상태에 들어간다면 제법 그럴싸한 가설 아닌가?

만약 그 가설이 맞는다면 놈들에겐 험한 산맥을 빙 돌아서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큰 손해인 셈이다. 특히 대구 북부에 위치한 구미에서 발원된 놈들이라면 더더욱.

도시의 상황을 살피는 건 이쯤 하기로 하고, 나는 다시 원격으로 도시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ATX를 불러들였다.

이번에도 누군가가 임시로 쌓아 둔 엉성한 바리케이드를 박살 내 버리고 당당하게 진입한 ATX. 다행히 대구 측에서도 좀비의 침투가 아니면 사이렌을 울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이번에는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다.

다만 전과 달리 물자를 공짜로 나눠 주는 미친놈과 이상한 기차에 대한 소문이 제법 돌았기 때문일까, 오늘은 동대구역 주변에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남쪽에서 올라온 의문의 기차, 공짜로 물자를 나눠 주는 미친놈, 얼핏 이상한 조합인 이 두 가지를 잘 엮어 보면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묘한 유혹으로 다가올 것이다.

-사실 대구 아래에 위치한 남부 지방은 물자도 풍부하고 기차도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비교적 안전한 게 아닐까?

-계속 대구에 남아서 기약 없는 안전과 배급을 기다리기보단, 차라리 남부 지방으로 한 번 더 피난을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북쪽에서 자꾸 내려오는 그 괴물들도 남부 지방에는 없을 텐데.

그런 유혹들이 하나둘씩 쌓이다 보면 사람들은 실제로 저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의식적으로 ‘환상’을 품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그게 아주 환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실제로 최대한 안전한 거점을 많이 확보해서 수천 명이든 수만 명이든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거점이 있고, 물자가 있고, 커뮤니티와 의료 체계가 어느 정도 복구되었으며, 또한 엄격한 규율로 구성원 전체가 묶여 있다.

일단 맛보기로 내 거점에서의 풍족한 생활을 한 번이라도 체험해 보면 대구와 극명한 차이를 느끼고 깔끔하게 손절을 칠 수밖에 없다.

대구와 비교하면 나는 금발 태닝 양아치 같은 존재였다.

우효오오오옷! 피난민들은 대구보다 내 거점을 더 좋아하는걸? 그런 도시로는 더 이상 피난민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구~

김해의 적법한 군주이자 부산의 시장, 대한민국의 자랑이신 이승권 님의 극대 거점 너무 좋아요오오오옷!

“…….”

군대에서도 라노벨과 애니를 찾던 그 씹덕 동기에게 이상한 병이 옮은 걸까. 그놈 뚝배기를 후려쳐서 먼저 의가사 제대를 시켜 줬어야 했는데.

아무튼 나는 하루에 한 번 쓸 수 있는 ‘빠른 이동’ 기능을 이용해 단숨에 ATX 안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이미 동대구역 플랫폼에서 목이 빠져라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딱히 또 찾아오겠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왠지 같은 시간에 또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 그리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 때문에 지난번보다 훨씬 더 붐비고 있었다.

‘오늘은 아주 작정하고 나왔군. 군인보다 각성자들이 더 많아.’

또 남쪽에서 이상한 기차가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출동한 건지, 군인들과 함께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각성자들이 제법 보였다.

오늘은 각성자를 동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꼭 나를 붙잡아 음침한 지하실에서 다 같이 스무고개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뭐, 사실 내 입장이었어도 자신의 거점에 난데없이 들어와서 공짜 아이템을 뿌리고 사라지는 보물 고블린이 있다면 즉시 붙잡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딱히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대구 내부의 상황은 충분히 살폈고, 군인과 각성자, 민간인들이 어떻게 이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확인했으니까. 또 변종 좀비에 대한 정보를 얻은 건 덤이었다.

남은 건 나에 대한 더 많은 소문을 대구 내에 흩뿌리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이 부족한 민간인들에게 나와 남부 지방에 대한 환상을 품게 하는 것.

이 작업만 끝마치면 저들이 원하는 대로 짝짜꿍이든 보드게임이든 얼마든지 어울려 줄 생각이었다.

* * *

“보고드립니다. 예의 ‘기차’가 또다시 동대구역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일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피난민들에게 무료로 물자를 나눠 주려는 목적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동대구역 전체에 체포조를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돋보기안경을 쓰고 서류를 살피고 있던 신해룡 대장이 부관의 보고에 눈빛을 바꿨다.

“해당 기차가 남부 지방에서 올라온 것은 확실한가?”

“예, 갑작스럽게 복구되었다던 그 밀양역에서 출발한 기차인지는 알아 낼 수 없었습니다만, 선로 배치상 남부 지방에서 올라온 건 확실합니다. 일반적인 KTX와 달리 동체에 두꺼운 장갑판을 덧대고 총안구까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필시 누군가에 의해 임의로 개조된 무장 열차(Armoured Train)로 추정됩니다.”

“무장 열차라…… 분명 2차 세계 대전을 끝으로 사장된 낡은 개념 아니었던가?”

“말씀대로입니다. 다만 강력한 항공 폭탄이나 미사일, 대전차 공격에 당할 우려가 거의 없는 지금이라면 오히려 효과적인 개념이기도 합니다. 무장 열차가 사장되기 전까지만 해도 경무장 보병의 기습과 약탈 정도는 쉽게 대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와 같은 육사 출신답게 역사에 해박하고 눈치도 빠르다고 해야 하나, 딱딱 원하는 대답을 내놓는 부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신해룡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 열차의 출발지가 어디일 것 같나?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유명하네만.”

“밀양이 아니라면 남은 건 공업 도시 창원과 김해밖에 없습니다. 도시에 매우 큰 규모의 공업 단지가 존재하는 창원과 김해라면 기술자를 동원해서 기존의 기차를 개조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다면 창원이겠군. 김해는 부산과 너무 가까워서 아마 전멸을 피하지 못했을 거야.”

“저 또한 동의합니다. 특히 창원에는 경상도 최대 규모의 방산업체들이 존재하는 만큼, 이곳 대구처럼 민간인과 각성자가 협력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각성자 얘기가 나오자 신해룡 대장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그 끔찍한 사태에서 무사히 살아남았으며, 또한 도망치거나 숨기보단 적극적으로 싸운 소수의 사람들만이 ‘각성’이라는 기묘한 과정을 거치고 각성자가 된 것은 유명한 사실이었다.

가장 먼저 각성하고 사람들을 이끌어야 할 자신 같은 사람들은 각성하지 못했는데, 한없이 중요도가 낮은 사람들이 각성하면서 그 지위가 상당히 높아졌다.

좋게 말하면 보수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살짝 꼰대 기질이 있는 신해룡 대장은 그 점이 못마땅했다.

그들이 자발적이든 반강제든 이런 시국에 순순히 협력해 주는 것은 분명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실제로 그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대구는 지금보다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인간이란 원래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더 가지고 싶어 하는 법. 이미 권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각성자들처럼 실질적인 ‘힘’도 원했다.

혹시나 뒤늦게 각성하지 않을까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괴물을 직접 처리해 봤지만, 딱히 각성을 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에 뒤처진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복잡미묘한 심경 때문에, 괜히 색안경을 끼고 각성자를 상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군부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그 기차가 단순히 기술자들이 만들어 낸 물건이라면 당장은 우선순위를 높게 책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하지만 피난민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물자를 나눠 주고 있다는 그 인물은 틀림없이 각성자일 터. 가능하면 ‘평화적으로’ 대화를 해 보고 싶군.”

“체포조에 각성자들도 다수 배치되어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겁니다. 다만 그에게 임의 동행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다소 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어차피 이 도시에 있는 모두가 우리 덕분에 안전하게 지내고 있는 것 아닌가. 약간의 소란이 일어난다고 해서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그보다 그 각성자가 피난민들에게 무료로 나눠 주고 있는 물자의 출처가 더 신경 쓰이는군. 역시 빠르게 전멸해서 물자를 소비할 생존자가 없는 남부 지방에서 구해 온 건가?”

“자세한 건 그와 대화를 나눠 봐야 알겠지만, 현재 괴물들에게 점령당한 타 도시에는 필시 많은 물자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을 겁니다.”

“그야말로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군.”

그런 귀중한 물자를 왜 남의 도시까지 넘어와서 아깝게 허공에 뿌려 대는지는 모르겠지만, 신해룡 대장은 그 각성자와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어 두고 싶었다.

지금 대구는 그가 가진 물자, 그리고 외부 지역에 대한 정보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그리고 여담입니다만, 이상한 기차가 동대구역으로 들어오기 전에 방공 시스템을 맡고 있던 군인들로부터 뭔가를 격추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었습니다.”

“지금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은 없을 텐데?”

“격추한 비행 물체가 하필 산 깊숙한 곳에 추락했기 때문에 아직 조사에 나서지는 못했습니다만, 드론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포항의 끄나풀일지도 모르겠군. 그 부분은 따로 조사를 명령해 두도록.”

포항에는 대한민국 공학 분야 꿈나무와 인재가 즐비한 포항 공대가 있었다. 이런 시대에도 드론 하나둘쯤 뚝딱 만들어 내서 대구를 염탐한다고 해도 아주 이상하지는 않았다.

“괴물도, 물자도, 사람도, 각성자도, 신경 써야 할 게 한둘이 아니군.”

이미 늙어 버린 그가 따라잡기에는 시대가 너무나도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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