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투쟁기 (19)
약 한 달 전, 갑작스럽게 서울 도심 곳곳에서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들이 사람을 덮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 아래에서, 가문 대대로 검도를 배워 온 진가희는 당시 서울에서 발생했던 끔찍한 사태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집어삼켰는지 똑똑히 목격했다.
워낙 급작스럽게, 전조도 없이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경찰과 군대만으로는 그 사태를 억제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민간인 대피를 돕기 위해, 사람을 상대로는 절대로 사용해선 안 되는 진검까지 뽑아서 길목 하나를 틀어막았다.
마구잡이로 사람을 찢어발기며 몰려오는 괴물들, 수십 년간 단련한 강인한 육체와 경이적인 검술로 괴물을 베어 넘기는 그녀의 아버지, 주변인의 손에 붙들려 피난길에 올라야 했던 그때의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문 안 열고 뭐 하냐?”
“……영악한 놈이니까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잠시 소리를 들어 본 거예요, 아재.”
“나 정도면 아직 청춘이라니까?”
청춘은 무슨, 잘 쳐줘도 그녀의 삼촌뻘인 중년 엽사의 투덜거림에 진가희는 피식 웃었다.
피난길에 무방비하게 위험에 노출된 민간인들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처럼 똑같이 진검을 들었던 그녀는 각성했다. 그녀의 뒤에서 엽총을 들고 있는 엽사 한동석처럼.
수도권을 빠져나와 경기도, 충청도를 거쳐 대구에 이르기까지 각성자로서 참 많은 좀비들을 베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시스템의 힘을 이용해 군대와 적극 협력하기도 했고.
오늘 같은 날 문제가 생긴 구역에 출동해서 소방수 역할을 하는 것도 그녀를 포함한 대구 각성자 집단의 주요 임무였다.
다만 최근 몇 주 사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새로운 유형의 괴물들 때문에 적잖이 애를 먹고 있었다. 일반인은 고사하고, 총을 든 군인이나 경찰도 쉽게 대적할 수 없는 놈들이 대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놈은 왜 변종을 놓쳐 가지고는…… 쯧.”
“스킬 쿨타임이 돌고 있었다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스킬 배분을 못 한 건 본인 책임이긴 하지만.”
아주 미세한 소리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옥상 문에 귀를 바짝 갖다 대고 있던 진가희는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자신이 먼저 진입하겠다는 신호를 보내자 한동석이 숨을 들이쉬고 호흡을 통제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젖힌 진가희는 변종이 갑자기 덤벼들면 즉시 검 손잡이로 턱을 올려쳐서 뇌진탕을 유도한 다음, 단번에 참격을 가하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잔뜩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두 사람이 발을 들인 옥상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역한 냄새에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챘다.
한동석이 주변에 위험 요소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총구를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방금 울려 퍼졌던 총성은 다른 곳에서 터져 나온 총성이 아니었나 본데.”
“누가 여기 있었다고요?”
“군인이나 경찰은 아니야, 자경단은 더더욱 아니고. 총알을 그렇게 미친 듯이 퍼붓고 우리가 올라오기도 전에 모습을 감췄다면…… 각성자뿐이지.”
두 사람은 옥상 한편에 축 늘어져 있는 변종의 시체에 다가갔다.
총을 어찌나 많이 맞았는지, 전신이 너덜너덜한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권총으로는 흠집이나 내면 다행이고, 관통력이 강한 소총탄으로도 치명상을 입히기 힘들 만큼 털가죽이 두꺼운 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기관총으로 사납게 찢어발긴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직 시체가 사라지지 않았어. 죽인 지 얼마 안 됐다는 거야. 그리고…… 주변에 떨어진 탄피는 군인들이 사용하는 5.56mm NATO탄과 같은 규격이야.”
“우리 말고 먼저 이곳에 도착한 각성자는 없었잖아요.”
“먼저 도착한 각성자가 있었다면 바로 우리와 합류했겠지. 지금 대구 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각성자 명단은 군부와 대구 시청이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으니까 전투 능력이 출중한 각성자라면 숨기는 것도 힘들어.”
한동석은 옥상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탄피를 몇 개 줍더니, 변종의 시체에 난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확실해, 각성자야. 평범한 5.56mm 탄환으로는 절대 이런 위력을 낼 수 없어. 설령 변종을 향해 미친 듯이 탄을 쏟아부었다고 해도 치명상을 입히지 못할 테니 결국 역으로 당했을 거야. 그런데 봐, 놈의 시체는 걸레짝이 됐지만 정작 놈이 이곳에서 날뛴 흔적이 없잖아. 즉 이곳에서 변종과 각성자가 조우하자마자 승패가 빠르게 갈렸다는 거야.”
“우릴 그렇게나 애먹이던 변종이 여기서는 일방적으로 당했다고요?”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놈에겐 공격 기회도 없었어. 게다가 바닥에 떨어진 탄피의 수를 봐. 한 탄창 기준 20발이나 30발짜리를 쏜 게 아니라, 최소 50발 이상을 쐈어. 변종을 앞에 두고 느긋하게 재장전까지 해 가며 제압 사격을 할 수 있는 각성자가 얼마나 될 것 같아?”
총잡이 각성자 중에 변종을 앞에 두고서 단신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각성자는 없다.
총잡이 각성자들을 보호하면서 변종의 접근을 원천 봉쇄 하는 칼잡이 각성자인 그녀이기에 잘 안다. 총잡이 각성자들은 보통 스킬을 이용해 사격이나 색적 능력을 향상시키지, 총의 위력을 끌어 올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게 가능했다면 칼잡이들이 일반 좀비를 처리하고, 총잡이들이 원거리에서 변종들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전개했을 것이다.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뭔 줄 알아?”
“뭔데요. 답답하니까 그냥 말해요, 아재.”
“여기서 변종 잡은 놈, 딱 한 발로 끝낼 수 있었으면서 일부러 가지고 놀았어.”
변종을 압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원 불명의 각성자의 존재도 믿기 힘든데, 압도 수준을 넘어서서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능력까지 있었다?
진가희는 인상을 찡그리며 한동석을 흘겨봤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인마, 내 엽사 경력만 15년이야. 20대부터 이 바닥에서 총질만 했는데 내가 사냥과 전투도 구분 못 하겠냐?”
“시체가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어떻게 한 방에 끝낼 수 있었다는 걸 알아요? 대단한 각성자라는 건 어찌어찌 이해하겠지만 그건 좀 비약이…….”
“시체를 잘 살펴봐. 마구잡이로 총을 난사한 것 같지만, 잘 살펴보면 팔과 다리만 철저하게 조져 놨어. 그런데 미간에는? 구멍이 딱 하나뿐이야. 아주 깔끔하잖아. 이놈들 대가리가 얼마나 튼튼한지는 네가 더 잘 알 텐데?”
전직 야구 선수이자 야구 방망이로 좀비 머리통을 펑펑 터뜨리는 동료 탁재현을 떠올렸다.
그런 그가 스킬을 사용해 전력으로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도 변종의 머리통을 몸과 분리시키는 선에서 그쳤다. 단단한 머리통을 깨부술 수 없다면 그냥 멀리 날려 버리는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었던 거다.
당연히 진가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깔끔하게 목을 베어 내거나, 사지를 베어 내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선호하지, 무식하게 검으로 머리통을 쪼개려 하지는 않았다.
“막말로 기관총이나 유탄을 갈기는 게 아닌 이상 이놈들 대가리는 못 부숴. 그런데 봐라, 깔끔하게 관통한 흔적을.”
한동석은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일방적인 사냥에 대해 자신만의 추측을 내놓았다.
“아마 처음 각성자와 마주친 변종은 갑자기 총탄이 날아드니까 일단 두꺼운 양팔로 급소를 보호했을 거야. 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재장전할 때까지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예상 이상으로 탄환의 위력이 강해서 결국 제대로 힘도 못 써 보고 당했다는 거네요.”
“그렇지. 팔다리를 다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고 마지막에 탕!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사냥의 미학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이야. 오히려…….”
“오히려?”
“……사람 죽이는 기계나 할 법한 짓이지.”
6년 전 발발한 2차 남북 전쟁 때문에 민방위로 소집되었던 기억이 있는 한동석은 기억을 더듬었다.
운 좋게 예비군으로 소집되지는 않아서 전쟁터에 끌려가지는 않았지만, 종전 이후 들려온 소문이 워낙 무성해서 엽사인 그의 귀에도 들어온 얘기가 제법 있었다.
“일단 돌아가서 보고부터 하는 게 좋겠다. 피해자도 제법 있었고, 피해 구역 복구 요청도 할 겸 대구에 우리가 모르는 강력한 각성자가 있는 것도 알려야지.”
“개인적으로는 같은 편으로 끌어들였으면 좋겠네요. 군인 아저씨들 우리 각성자들 상대로 엄청 깐깐하잖아요.”
“각성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거대 집단을 이뤄서 일반인들을 싹 쓸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이 도시를 지키고 유지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운 거지. 기득권들은 원래 다 그런 법이라고. 춥다, 얼른 가자.”
“어휴, 이 짓도 언제쯤 끝나려나…….”
한동석은 투덜거리는 진가희를 먼저 내려보내고,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건물 옥상을 바라보았다.
엽사인 그는 준수한 사격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색적과 추적 스킬도 결코 사격 스킬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빛 한 점 없이 정확히 상대를 포착하고 사격할 수 있는 것도 색적 스킬 덕분이었다.
-[색적에 실패했습니다.]
-[추적에 실패했습니다.]
-[상대의 직업 숙련 레벨이 당신보다 2배 이상 높습니다. 모든 추적, 색적, 염탐, 도청, 간파, 암시, 독심술류 스킬이 무효화됩니다.]
‘내 숙련 레벨이 12인데, 나보다 2배 이상 높다고?’
숙련 레벨 12는 결코 쉽게 찍은 것이 아니다.
당장 대구 내부의 각성자 집단에서 숙련 레벨이 10을 넘는 사람은 전체 인원 중 5%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
이마저도 지난 한 달간 목숨 걸고 다른 각성자, 군인들과 협력하며 일반 좀비와 변종 좀비를 족히 수천 마리는 때려잡은 결과였다.
심지어 매 레벨 업마다 잡아야 하는 좀비의 수가 점점 늘어나기 때문에 20레벨을 찍으려면 정말 몇 년은 걸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스템이 말하길 상대는 최소 24레벨 이상이라고 한다.
‘……대체 얼마나 많은 좀비를 잡았다는 거지?’
수천 마리가 ‘고작’이라는 취급을 당할 만큼 많은 좀비를 때려잡은 것은 확실했다. 어쩌면 그와 같은 각성자들까지 포함해서.
진가희는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겠지만, 한동석은 진심으로 대구 시청이나 군부의 사람들이 이 신원 불명의 각성자를 대할 때 ‘깐깐하게’ 굴지 않기를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런 사람을 상대로 목을 뻣뻣하게 세웠다간 콧대부터 바닥에 처박히는 불상사가 생길 테니까. 아니, 무조건 확정이다.
15년이 넘도록 야생 동물을 사냥해 가며 일반인보다 훨씬 더 감각이 예민하다고 자부하는 그이기에 느낄 수 있었다.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겠지만, 영역을 침범하거나 심기를 거스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단번에 목을 물어뜯는 스타일이다.’
인간 불신이나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 혹은 어떤 연유로 크게 상처 입거나 주변에 실망한 사람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유형이었다.
‘각성자에게 유달리 깐깐하고 예민한 군부나 시청보다, 각성자 집단인 우리가 먼저 가까워질 수 있다면 좋겠는데…….’
어중이떠중이들 아래에서 명령을 듣는 것보다, 절대적인 힘과 권력을 가진 1인자에게 충성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인간이든 짐승이든 괴물이든 누구나 다 그렇게 하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