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18)화 (119/227)

118화 투쟁기 (18)

‘졸지에 내가 대구의 경계심을 확 올린 꼴이 돼 버렸군.’

내가 ATX로 냅다 바리케이드를 밀어 버리고 무작정 동대구역 벨튀를 했기 때문일까, ‘외부 침입’에 좀 더 예민해진 대구 측 군인들이 사이렌 경보보다 먼저 총을 쐈다는 건 적성체가 도시에 가까이 접근했다는 의미일 터.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군인들의 경계심을 키운 나는 상을 받아야 할지 비난을 받아야 할지 굉장히 애매했다. 이승권 포인트는 일단 +50점이었는데.

“이럴 때가 아니지.”

주변인들이 빠르게 도심으로 도망쳐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나는, 경계 태세를 취하기 시작한 군인과 경찰들을 피해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짚라인을 이용해 반대편 건물의 옥상 난간에 후크를 걸고 단숨에 뛰어올랐다.

도시 외곽을 밝게 비추는 작업등을 제외하면 도시 내부를 밝히는 빛은 굉장히 적었다. 덕분에 사람이 갑자기 건물 위로 훌쩍 뛰어오른다고 해도 들킬 일은 없었다.

타타타! 타타!

조금 전부터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총성을 좇아 시선을 돌리니, 저 멀리서 예광탄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빛의 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밤이나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실내(지하)에선 적들의 정확한 위치와 분대원들 간의 타깃 공유를 위해 예광탄 사용은 필수적이었다.

특이한 점은 현재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지역은 이쪽과 달리 작업등을 환하게 밝혀 두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다들 그렇게나 날이 어두워지는 걸 두려워했는데, 저쪽에서 근무하던 인원들만 군기가 빠져서 작업을 늦게 켰을 리는 없고…… 파괴당한 건가?’

그 빛에 민감하다는 야행성 변종들을 경계하고 감시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늦더라도 반드시 작업등을 켰겠지.

그런데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지금까지도 저쪽 구역만 유독 어둡다는 건 필히 문제가 있다는 뜻.

나는 각성자 특유의 우월한 신체 능력으로 가까운 건물의 옥상을 훌쩍 타 넘고, 조금 거리가 있다 싶은 건물 사이는 짚라인을 이용해 스무스하게 통과했다.

뻥 뚫린 길을 차량으로 이동해도 몇 분은 걸릴 것 같은 거리였는데, 그냥 다이렉트로 건물을 타 넘으니 생각보다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비각성 군인들은 민간인부터 대피시켜!”

“저 새끼들 도시 안으로 들이지 마! 한 마리라도 들어오면 좆된다!”

“거기 빠져! 빠지라고!”

옥상 위에서 확인한 현장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난장판이었다.

바리케이드와 참호를 파는 것으로 조금씩 외부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민간인 작업자들이 먼저 기습을 받았는지, 방어선 바깥에 몇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시체마저도 곧 어둠 속에서 휙휙 움직이는 뭔가에 의해 사라졌는데, 예의 야행성 변종인 듯했다.

‘그 아재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을 ‘낚아챌’ 정도의 속도와 힘을 가진 좀비인 건 확실하군. 총탄 속에서도 상당히 과감하게 움직이고 있어.’

좀비가 저만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신체 능력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 아니겠나.

놈들은 악에 받쳐 총을 쏘는 비각성자 군인들을 조롱하듯, 어둠 속을 휙휙 오가며 간을 봤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격이 중단되었다.

비각성자 군인들이 민간인 대피와 새로운 방어선 구축을 위해 물러난 틈을 타, 일반인과는 분위기부터 다른 이들이 대신 현장에 섰다. 한눈에 봐도 저들이 각성자였다.

‘각성자는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다.’

당장 나만 해도 겉모습만 보고 넷플러스를 사랑하는 애국자인지, 아니면 남의 동네까지 기어들어 가서 식료품과 생필품을 마구 뿌리는 미친놈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비각성자들을 후방으로 보내고 주요 진입로를 막아선 각성자들은 얼추 1개 소대 인원이었다.

박지찬 병장 일행을 포섭한 것으로 간신히 전체 각성자 수를 두 자릿수에 맞춘 내 거점에 비해, 이쪽은 각성 인원이 제법 많은 듯했다. 그러니 이 시국에도 어찌어찌 대도시를 유지하고 있겠지.

맞으면 아야 할 것 같은 야구 방망이를 붕붕 휘두르고 있는 남자, 수렵용 엽총을 꼬나쥐고 있는 남자, 한국에선 좀처럼 보기 드물다는 진검을 들고 검도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여자 등등 각양각색의 각성자들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당연히 총을 든 군인이나 경찰 각성자도 있었다. 다만 각성자의 특성상 다루는 무기와 장비를 일체화할 수 없어 저런 구성이 된 게 아닐까 싶다.

뭐, 사실 겉모습이 그리 중요한가? 좀비만 잘 잡으면 됐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간만 보고 있던 놈들이 총탄이 더 이상 날아들지 않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가히 우사인 볼트 저리 가라 하는 수준이라 확실히 비각성자들은 반응하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개잡놈이 뒤질라고!”

야구방망이를 붕붕 휘두르며 자신의 근육을 과시하고 있던 남자가 자신에게 접근한 좀비의 머리통을 시원하게 날리면서 1호 홈런을 기록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소문이 무성한 그 야행성 변종 좀비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과연 소문이 무성해질 만한 비주얼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마주친 좀비들은 변종이라고 해도 인간의 형태 정도는 유지하고 있었는데, 저것들은 근본적으로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무언가를 낚아채기에 용이한 갈고리 형태의 긴 발톱, 크게 굽은 등, 어둠 속에 잘 녹아들게 해 주는 검은 털가죽, 그리고 야구공만큼 비대해진 눈까지.

저걸 ‘좀비’라고 부르기는 다소 어폐가 있을 것 같으나, 곧 어둠 속으로 끌려갔던 시체들이 하나둘씩 되살아나 우르르 달려오는 모습에 그 생각은 깔끔하게 접었다.

크게 찢기거나 베어 먹힌 흔적이 있는 시체들은 빠르게 좀비화되어 각성자들을 상대로 물량 공세를 펼쳤고, 각성자들은 능숙하게 일반 좀비들을 처리하면서도 자신들의 틈을 노리는 야행성 변종을 경계했다.

“거, 일반 좀비는 총잡이들이 알아서 좀 치워 달라니까 진짜!”

“각성자들은 탄약 보급 안 되는 거 알면서 너무 그러지 맙시다. 우리라고 뭐 탄약 아끼고 싶어서 아끼는 줄 아나!”

탕! 타앙!

각성자들을 귀찮게 하는 일반 좀비들은 아예 접근하기 전부터 총잡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칼같이 처리했다.

나처럼 도구 제작 스킬로 성능이 뛰어난 탄약을 따로 제작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결국 각성자가 쏘는 탄환도 일반인이 쏘는 탄환과 똑같다.

‘총을 들고 있는 각성자들이 저 기괴한 변종을 쏘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알 것 같군.’

각성자 정도가 아니면 반응하기 어려운 신체 능력을 가진 놈들. 아마 그 우월한 신체 능력 때문에 일반 탄환으로는 확실하게 사살하기 어려워 괜히 헛고생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실제로 근접전에서 매우 강력한 전투력을 자랑하는 각성자들만이 몽둥이로 후려치거나, 검으로 베어 내서 접근한 변종을 처리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살짝 고민되는군.’

저 전투에 개입할까 말까에 대한 고민이다.

하지만 지금 전투의 양상이 저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건 아닌지라 아직 고민의 영역에만 그치고 있다.

비록 변종들이 영악하게 일반 좀비들을 고기 방패 삼으며 각성자들의 실수나 방심을 유도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지만, 각성자들은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 같았다.

솜씨 좋게 좀비들을 처리하는 모습만 봐도, 아마 큰 변수가 없는 한 무난하게 일반 좀비들을 쓸어버리고 변종 좀비를 쫓아 낼 것이다.

이미 동대구역에서 한번 거하게 소란을 일으킨 내가, ATX를 타고 대구를 빠져나간 줄 알았는데 다시 대구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그림이 좀 이상하다.

저쪽에 굳이 의심할 여지를 줄 바에야…….

“억! 야! 저 새끼 잡아!”

“이런 씹! 그걸 왜 놓쳐서는……!”

“내 스킬 쿨타임 돌고 있었어!”

그냥 적당히 지켜보면서 정보만 수집하다가 빠지자고 생각한 찰나, 저 아래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바리케이드가 쌓여 있는 다른 진입로는 후방까지 물러난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서 좀비들이 침투할 수 없었지만, 변종들 중 한 마리가 기어이 부서진 가로등을 발판 삼아 하늘 높이 뛰어오른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놈은 하필 내가 서 있던 곳의 바로 옆 건물 옥상까지 단숨에 기어 올라왔다.

설마 이곳에 다른 인간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건 놈도 마찬가지였는지, 아주 잠깐이지만 나를 본 놈의 움직임이 굳었다.

“그렇지. 슬슬 클리셰에 적응할 때도 됐지.”

지금까지 힘을 숨기고 있던 찐따 이승권!

어처구니없게도 맞딱뜨린 적과 한판 대결!

거침없이 살갗을 할퀴어 대는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는 옥상에서, 나와 변종 좀비가 서로에게 살의를 드러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로등을 밟고 건물 벽을 기어 올라올 만큼 신체 능력이 뛰어난 놈이니, 불과 10m도 채 안 되는 거리를 좁히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북극곰이 사람을 찢는 것이 이 세상의 당연한 진리이듯, 나 이승권의 소총도 좀비를 찢는 신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거 인챈트 탄환이야, 병신아.”

지금껏 네가 맛보지 못한 고-오급 5.56mm 고속 철갑탄(E+) 맛 좀 쬐끔만 보거라.

타타타타타타타타!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소총의 조정간을 연발로 바꾸고, 역으로 내가 놈을 향해 다가가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카하아아아!”

군인들이 쏘는 평범한 탄환이라 생각하고 무지성으로 달려든 놈은 건장한 체구를 구성하는 근육과 털가죽을 파고드는 탄환에 정신을 못 차렸다.

외국인이 한식당 들어와서 ‘이거 안 매워요?’ 하고 물어 가며 어렵사리 주문했는데,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매콤함이 입 안을 마구 난도질하는 것 같은 상황.

놈은 결국 인간을 낚아챌 만큼 우월한 근육질의 팔을 X자로 교차해서 필사적으로 탄환 세례를 방어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때린 데 또 때리고, 안 때릴 것 같으면서 때리고, 때리는 척하면서 진짜 때리는 희대의 나쁜 남자 이승권이다.

“재장전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

지금까지 네가 봐 온 군인들은 모두 탄창 하나를 소비하면 아무리 빨라도 2~3초가량의 빈틈이 생겼겠지. 학습 능력이 뛰어난 건 인정한다.

근데 나는 ‘물리적 재장전’이 필요 없는 사람이거든.

탄약이 다 떨어진 총은 인벤토리에 수납하고, 인벤토리에 들어 있던 재장전된 총을 다시 꺼내 든다.

꽉 채운 탄창과 빈 총을 인벤토리 내에서 결합하는 방식도 쉽고 빠르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화력을 투사하고 싶을 때는 아예 총을 통째로 교환하는 게 더 낫다.

타타타타타타타!

놈의 급소를 방어하고 있던 두꺼운 털가죽과 근육, 뼈까지 남김없이 철갑탄으로 갈아 버린 끝에, 마침내 사지가 너덜너덜해져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놈과 마주 보고 섰다.

가로등 불빛은커녕 달빛조차도 구름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 오늘 같은 날, 나는 놈의 신체 구조와 내구도를 확실히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놈을 산채로 잡아 가서 연구할 수는 없으니 이렇게라도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이렇게 확보한 자료는 나중에 경희대 중앙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의사들에게 가져가 자문을 구할 생각이다.

철컥!

기록을 끝낸 나는 총을 바꾸지 않고, 느긋하게 새로운 탄창을 꺼내서 갈아 끼웠다.

사지가 철저하게 갈려 나간 탓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놈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기껏 어렵사리 침투했나 싶었는데 하필 재수 없게 나 같은 놈을 만나서 저지당한 것이 그토록 억울한 걸까?

그래도 가는 길에 교훈 하나는 얻었으니 아주 손해만 본 건 아닐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 살아남는 건 항상 나 같은 사람이라는 교훈 말이다.

“꼬우면 이겼어야지.”

타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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