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17)화 (118/227)

117화 투쟁기 (17)

잠깐 돌아다녀 본 대구의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했으며, 또 생각했던 것만큼 위험하지는 않았다.

한반도 전역에서 좀비들이 들끓고 있는 것에 비해, 과도한 인구를 품고 있는 대구는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었다.

그런 한편 필요치에 훨씬 못 미치는 비축 물자 때문에 기존의 대구 시민과 피난민 모두 끙끙 앓고 있는 상황.

큰 재난은 원래 아주 작은 문제와 실수, 사고들이 이어진 끝에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대구의 앞날이 썩 밝지는 않다.

‘하지만 김해와는 달리 최소한의 생존자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고, 다들 어려운 상황임에도 각자 해야 할 일을 알아서 찾아 나서고 있어.’

나는 도시 외곽에서 좀비들의 기습적인 침투를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와 임시 초소를 건설하고 있는 사람들을 먼저 살폈다.

노동자는 대부분 힘깨나 쓸 법한 성인 남성들이었으며, 또한 절대다수가 민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 주변에서 총과 무전기를 든 채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경찰이나 군인들이 몇 명인가 보이긴 했지만, 그들이 노동에 투입되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이 거대한 도시의 전방위를 지키자니 인력이 턱없이 부족할 테지. 그래서 민간인들을 동원해 좀비들이 타 넘을 수 없는 바리케이드만 빠르게 짓고, 적당한 임시 초소를 세워서 초병 몇 명만 붙여 두려는 것이다.

설령 수백, 수천 마리의 좀비 대군이 몰려온다고 해도 바리케이드가 약간이지만 시간을 벌어 줄 것이고, 그 틈에 경계 근무를 서고 있던 초병들이 재빨리 도시에 위험을 알리기만 하면 되니까.

실로 효율적인 방어 구조다.

‘마음만 먹는다면 건장한 성인 남성들 위주로 예비군을 편성해서 즉시 전투원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군수 물자가 모자라겠지.’

다른 사람들에게 의심받지 않도록 슬그머니 현장에 기어들어 가서 다른 이들과 함께 모래 포대를 나르거나, 참호 비스름한 구덩이를 파냈다.

어떻게든 배급을 타 내야 하는 민간인들이 힘든 노동에 투입되는 건 당연한 듯, 나 한 명이 추가됐다고 해서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 제대로 잡아! 자세 그렇게 잡으면 허리 박살 나!”

“에헤이!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힘을 못 쓸까. 누가 보면 한 달은 굶은 줄 알겠네.”

“조심조심. 포대 터지면 안 되니까 살살 내려놔!”

노가다 판이라고 착각이 들 만큼 여기저기서 작업과 관련된 쓴소리나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철물점이나 농가에서 연장이란 연장은 다 챙겨 왔는지, 숙련된 솜씨로 땅을 파헤치거나 산기슭에서 나무를 베어 오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반면 그런 기술이 없는, 소위 도시 촌놈 취급당하는 사람들은 내일 아침 전신 근육통을 대가로 무거운 것을 나르느라 정신없었다.

“거기 청년! 자네도 와서 좀 거들지!”

“예, 갑니다.”

딱히 노가다 판에서 뛰어 본 적은 없지만 이와 비슷한 막노동은 질릴 만큼 해 봤기 때문에, 그리고 직업 숙련 레벨이 높은 덕도 있어서 어렵지 않게 인부들과 어울렸다.

남들이 포대 하나 나를 때 나는 2개, 3개도 너끈히 나르며, 생활관에서 모포 각을 칼같이 잡던 것처럼 포대도 예쁘게 쌓았다.

이 정도면 좀비가 혼신의 힘을 다해 몸통 박치기를 해도 흠집 하나 나지 않으리라.

“젠장, 해 지잖아!”

“여기까지 합시다! 해가 지고 있습니다!!”

“작업 종료! 작업 종료!”

이제야 몸이 좀 풀렸다 싶은 그때,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지는 것을 의식해서인지 주변인들이 좀 과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며 작업을 서둘러 중단했다.

해 떨어지면 춥고, 인프라가 망가져서 가로등 불빛도 없으니까 위험해서 그런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손을 털고 있으니, 내게 모래 포대를 건네주었던 중년 사내가 다급한 표정으로 내게 손짓을 했다.

“거기 청년, 뭐 해! 뒤지기 싫으면 빨리 이쪽으로 와!”

“……예?”

“아 이 친구 답답하기는! 처음 보는 얼굴이라 예상은 했는데…… 일단 이쪽으로 오기나 해!”

혹시 늦으면 밥을 안 주는 건가?

“지금부터 다 같이 함바집에 가는 건가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 친구야. 이 주변은 밤만 되면 그 괴물딱지들이 지랄발광을 한다는 걸 몰라서 그래? 요 한 달간 피해자만 셀 수도 없이 많았는데.”

“아, 제가 피난민 수용소에서 좀 오래 지내다 보니…….”

“그래도 정신머리는 똑바로 챙기고 다녀야지. 까딱 잘못했다간 아차하는 순간에 물려 갈 수도 있다고.”

밤만 되면 지랄발광을 하는 괴물딱지, 아차하는 순간에 물려 갈 수도 있다,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속으로 되뇌면서, 나는 도시 외곽보다 안쪽에 위치한 방어선으로 이동했다.

작업 인부들은 물론이고, 총을 들고 경계 근무를 서는 경찰과 군인들마저 방어선 안쪽으로 들어온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야 밤은 위험하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인간에게 밤이란 곧 미지의 영역이나 다름없으니까.

게다가 좀비들은 시각과 청각이 기묘할 정도로 뛰어나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살아 있는 인간을 정확히 포착하고 달려드니, 그 위험성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런데 내가 인지하고 있는 좀비의 위험성과 이들이 인지하고 있는 좀비의 위험성이 어딘가 살짝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긴 해. 이 거대한 도시의 전방위를 방어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임에도 필사적으로 도시 외곽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어.’

대구도 당연히 도시가 함락되면 끝장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무리해서라도 도시 외곽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거겠지만, 아무리 봐도 ‘영역 확보’가 목적은 아닌 것 같다.

‘방어선의 형태나 용도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모두 시간 벌기에 용이한 구조야.’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방어선 뒤에 서서 외세의 침략을 막는 것이 아니라, 필요 최저한의 감시 인력만 배치해 두고, 만약 적들의 침입이 포착되면 그제서야 적절한 방어 인력을 투입시키려는 게 아닐까?

방어선을 이렇게 쌓아 두었으니 막말로 좀비가 하늘을 날아오지 않는 한 무작정 도시 내부로 침투할 수는 없다.

중간중간 배치해 둔 참호 같은 것도 알고 보면 적들의 침입을 최대한 늦추려는 함정 구덩이였던 것이다.

“태양광 발전기 얼마나 충전됐어?”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점점 더 짧아져서…… 생각보다 많이 충전되지는 않았습니다.”

“쯧, 일단 연결해!”

작업 인부들이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불안한 얼굴로 무어라고 떠들고 있는 사이, 다른 한쪽에선 군인들이 바삐 움직이며 공사장에서나 쓰일 법한 작업등의 전원을 켰다.

상당한 광량을 자랑하는 작업등이 켜지자, 금세 어두워진 산기슭의 풍경이 훤히 드러났다. 아무것도 없는 밤에 어떻게 감시를 하나 싶었는데, 저런 방식으로 감시를 해 왔던 모양이다.

“휴우, 안 늦어서 다행이구만. 한겨울이라 해가 자꾸 빨리 떨어져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말도 말어. 어제는 쩌어어어기 북구 읍내동 방면에서 중앙 고속 도로에 버려진 차량 사이에 숨어 있다가 확 튀어나온 놈들 때문에 난리도 아니었다더라.”

“그 주변에 큰 대학 병원이 2개나 있지 않았나? 그래서 거기는 배치된 군인들도 여기보단 많다고 들었는데.”

“그 지랄맞은 것들이 해 떨어지자마자 냅다 달려들었는데, 암만 군인들이 많아 봤자 우리처럼 무방비한 민간인들은 쪽도 못 쓰고 당할 수밖에 없제.”

“염병할 것들…….”

퉤 하고 가래침을 내뱉은 중년 사내는 다른 이와 말을 하다 말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도 방금 얘기 들었지? 배급 타 먹으려고 대구 외곽까지 나와서 일하는 건 기특한데, 그래도 목숨 간수는 잘해. 여기는 그래도 도심이랑 비교적 가까워서 여차하면 안쪽으로 도망치면 된다지만, 다른 구역은 얄짤없어.”

“다른 구역은 생각보다 많이 위험한가 봐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미 피해자가 많이 나왔어. 최근 몇 주 전에 갑자기 대구 위쪽에서 갑자기 내려오기 시작한 그놈들…… 나도 딱 한 번 봤는데, 어둠 속에서도 눈만 빛나더군.”

“불빛 비추면 눈만 밝게 보이는 고양이처럼요?”

“그렇지, 딱 그거야. 낮에는 산이나 들판, 지하, 건물 속, 어디에나 숨어 있다가도 해 떨어진다 싶으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사람을 낚아채 간다고!”

대구 위쪽에서 등장했다고 하니 남부 지방에 있었던 내가 모를 만했다.

그리고 좀비들은 본능적인지 시스템에 의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연스럽게 사람이 많은 곳으로 이동하는 습성이 있다.

실제로 활천초가 그런 이유 때문에 한번 크게 습격을 받았었고,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내 거점 일원들이 정기적으로 김해 시내를 청소하고 있다고 들었다.

밀양과 김해 공항은 외부와 연결된 교각이 끊어져서 좀비들이 접근하지 못했고, 부산에 있던 놈들도 김해로 건너올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 주변만 맴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과 가까운 양산, 울산, 경주는 사람이 다 쓸려 나간 것 같으니, 부산의 좀비들이 늑장을 부리고 있었던 이유도 납득이 간다.

‘그렇다면 지금 대구가 겪고 있던 그 야행성 좀비들의 습격은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건데…….’

대구와 그리 멀지 않으면서 대구 북부에 자리 잡은 도시(유의미한 규모)는 딱 하나, 구미뿐이다.

그 외에는 경상북도와 강원도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첩첩산중과 시골뿐. 어떤 특이한 계기로 변종 좀비가 나타날 만큼 대단한 도시는 없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구미에는 말 많고 탈 많은 화학 공업 단지가 존재한다.

‘가만, 이거 흐름이 어째 김해 남부 공업 단지랑 비슷한데?’

박지찬 병장 일행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어깨의 구멍에서 송곳 같은 걸 쏘아 내는 원거리 공격형 좀비도 공업 단지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변종 중에는 폭발형 좀비와 거인형 좀비도 있지만, 그 둘은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을 만큼 수가 그리 많지 않다. 유독 사람이 많았던 도심 속에서 극소수 발견되었던 게 전부.

그렇다면 야행성 좀비 역시 구미의 화학 공업 단지에서 발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디까지나 뇌피셜이긴 하지만, 그래도 대구에서 며칠 지내며 조사하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물자도, 인력도, 거점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적에 대한 명확한 정보 역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원이다.

만약 나와 내 거점 일원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그 무시무시한 야행성 좀비들의 습격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라. 분명 적잖은 피해를 낳았을 것이다.

무턱대고 팀원을 이끌고 경북까지 치고 올라오지 않은 스스로에게 안도감을 느끼며, 작업 인부들을 따라 배급을 받으러 가던 그때였다.

탕!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최초의 총성이 어떤 착각에 의한 오발탄이길 간절히 비는 작업 인부들의 기대는 너무나도 쉽게 배신당했다.

타타타타타타! 타타! 타타타타!

번갯불에 콩 볶는 듯한 총성이 미친 듯이 터져 나오자, 곧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안쪽으로 도망쳤다. 오죽하면 귀중한 배급을 받는 것도 잊어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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