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16)화 (117/227)

116화 투쟁기 (16)

나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대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자자, 아까는 선착순이라고 했지만 사실 모든 분들에게 충분히 나눠 줄 만큼 여력이 있습니다. 밀지 마세요!”

마치 마술사가 텅 빈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는 것처럼 인벤토리에 저장되어 있는 식료품을 하나씩 꺼내서 나눠 주는 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렇게나 많은 피난민들은 각기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물자가 풍족한 사람이라도 그 복잡한 수요에 전부 맞춰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가능했다.

“부부 동반으로 오셨군요. 아이에게 먹일 이유식, 기저귀, 그리고 깨끗한 수건과 물티슈 여기 있습니다.”

칭얼대는 아이를 데리고 힘겹게 내 앞에 선 부부에게 그에 걸맞은 조치를 취해 준다.

앞서 말했다시피 거점 연결 스킬로 모든 거점을 연결하면서 내 물자 관리 효율은 극에 도달했는데, 모든 거점 내에 존재하는 방위 무기와 물자를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적재적소에 필요한 만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현재 나는 어지간한 대형 백화점보다 거대한 창고형 마트의 주인이었다.

거점 지정 스킬 등급이 ‘B-’가 되면서 한 차례 더 업그레이드된 홈마트는 이제 국내 최고 규모의 물자 보관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방대한 양과 품목을 자랑했다.

그래도 이렇게 막 퍼 주다 보면 금세 동나는 것 아니냐고? 그 말대로 당장 대구 전체에 이런 식으로 물자를 막 뿌리면 하루 만에 거덜 나겠지.

아무리 많은 물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자그마치 수백만 명을 모두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갑부인 것은 아니니까. 내가 확실하게 책임질 수 있는 인원은 정말 잘 쳐줘도 십만 명 단위다.

당연하지만 내가 어느 소설 속 주인공처럼 성격이 너무 좋아서, 내가 가진 것을 사람들과 나누지 않으면 온몸에 가시가 돋는 호구라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다.

‘이렇게 민간인들에게 미리 눈도장을 찍어 두면 차후에 대구 측 경찰이나 군인들도 나를 쉽게 어찌할 순 없다.’

이 위험천만한 시국에 혼자서 무장 열차(ATX)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호구처럼 물자를 나눠 주는 내가 굉장히 수상해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저들이 무력으로 나를 어떻게 해 볼 건덕지는 없다.

이미 추위와 굶주림으로 신경이 예민해진 절대다수의 피난민들에게 나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자선 사업가였으니까.

오히려 내게 위해를 가하려는 모든 행동이 자칫 황금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으로 보일 터. 그러면 아마 민간인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다.

‘당장은 물자를 공짜로 나눠 주는 내 손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선 결국 사람을 얻게 될 내가 이득이다.

계속 대구에 남아 있어 봤자 제대로 된 노동에 투입될 수도, 막상 힘든 노동에 투입된다고 해도 그만한 보상을 받을 수도 없는 노약자와 미성년자, 그리고 여자들.

그들을 공략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가족이나 연인 관계인 남자들까지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장수(노동 인력)를 잡으려면 먼저 말(가족)부터 쏘라는 의미다.

“감기 기운이 있으시다구요? 여기 해열제랑 식료품 팩 받으시고요. 빨리빨리 다음 사람에게 차례 넘겨주세요.”

한국 사람들이 이럴 때는 또 쓸데없이 차례를 잘 지켜서, 언제 소동이 일어났냐는 듯 저들끼리 차례를 정해서 줄을 서고 있었다.

ATX 객실 안에 서서 차례가 된 사람이 원하는 물자를 정확히 지급해 주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던 걸까, 다들 물자가 다 떨어져서 자신이 못 받게 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는 눈치였다.

‘고작 이 정도 기부 행위로 빈털터리가 되진 않지.’

비전문 의약품 정도라면 약국이 딸린 홈마트와 경희대 중앙 병원에서 ‘공유’받은 것들을 건네주면 된다.

식료품이나 생필품은 거대한 홈마트에 차고 넘칠 만큼 있으니, 각기 원하는 것이 달라도 금세 찾아서 지급해 줄 수 있었다.

설마 이런 시국에 누가 식료품만 달랑 나눠 주는 것도 아니고, 생필품까지 하나하나 정확히 지급해 주겠는가.

“그, 젊은이…… 혹시 바나나 우유랑 빵 있는감? 손주가 워낙 먹고 싶다고 그래서…….”

“여기 있습니다, 어르신. 그런데 유제품을 급하게 먹으면 자칫 탈이 날 수도 있으니까 다른 것도 몇 가지 더 챙겨 드릴게요.”

“고마우이…… 복 받을 거야, 청년.”

건장한 남성들보단 대부분 피치 못한 사정으로, 혹은 여력이 되지 않아서 이곳에 남은 사람들뿐이라 소동이 크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약함과 여의치 않은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질서 정연하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느낌. 혹여나 내가 마지막 차례까지 식료품과 생필품을 나눠 주지 않고 떠나면 어쩌나 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군말 없이 차례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을 묻고, 원하는 물자를 챙겨 주었다.

그렇게 족히 몇 시간 동안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물자를 나눠 주고 보니 슬슬 끝이 보였다.

‘이쪽을 감시하는 군인들의 숫자가 늘었다.’

사이렌까지 울리게 만든 데다, 동대구역에서 피난민들에게 공짜로 물자를 나눠 주고 있는 미친놈이 등장했다는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까지 나눠 준 물자만 하도 동네의 작은 마트를 거덜 내는 데에는 충분했지만, 나는 마지막 피난민에게도 아낌없이 물자를 나눠 주었다.

이들 모두가 내 포석이다.

-갑자기 웬 미친놈이 이상한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에 침입해서 90% 떨이 장사꾼들도 안 하는 공짜 나눔을 하고 가더라!

이런 소문을 대구 전체에 퍼뜨려 줄 포석.

‘대구는 유능한 인재도, 인프라도, 땅도 충분히 확보되어 있기 때문에 잠재력이 높은 도시다. 하지만 그런 대구도 수백만 피난민을 모두 품을 수는 없어. 결국 소모품(노예)처럼 쓰다 버리거나, 최소한의 보급으로 목숨만 붙여 놓을 가능성이 높다. 그럴 바에야 물자와 인프라가 넉넉한 내가 품을 수 있는 만큼 품어야 해.’

김해 공항에서 확보한 민간인들처럼 양심 없는 인성 쓰레기들도 아니고, 밀양시처럼 아예 인간조차 아닌 것들과는 달리 이곳의 피난민들은 ‘아직’ 순수하다.

제 잇속만 챙기는 기득권층이나,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각성자, 점점 더 수가 늘어날 좀비들에 의해 이들이 피폐해지기 전에 먼저 내 휘하로 들이는 게 낫다.

물론 아무리 많이 품는다고 해도 기껏해야 십만 명 단위겠지만, 경상도 남부 지방 전체를 완벽하게 인간의 영역으로 되돌리고 자급자족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최종적으로는 내가 할 일이 훨씬 더 줄어든다.’

짬이란 짬은 다 때려 버리고 놀 수 있는 거다. 격하게, 신나게, 앙증맞게!

그러기 위해서라면 잠시 기부 천사가 되는 것쯤, 그렇게 속이 쓰리지도 않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마지막 사람까지 내게서 필요한 식료품과 생필품을 받아 가고, ATX 근처가 한산해졌다.

필요한 것을 받아 간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굶주린 배를 채우거나, 지친 몸을 돌보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덕분에 이제야 좀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를 노렸다는 듯, 저 멀찍이 떨어져서 대기하고 있던 군인과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특히 아까 피난민들의 몸싸움에 밀려났던 경찰이 다시금 호루라기를 불면서 내게 삿대질을 했다.

“거기 멈춰!”

“신원을 밝히십시오!”

어떻게든 날 붙잡아서 비밀 친구로 만들고 싶은 모양인데, 나는 저렇게 체계 잡힌 군대라면 전신에 두드러기가 도질 만큼 혐오스러웠기 때문에 즉시 입간판을 회수하고 객실 문을 닫았다.

아슬아슬하게 문이 닫힌 ATX 앞에 선 그들이 유리창이나 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들겨 대면서 나보고 얼른 나오라고 소리쳤으나, 어디 내가 그렇게 쉬운 남자였던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대학생 시절 여자 후배가 적어도 다섯 번은 졸라야 밥을 사 주던 까칠한 도시 남자였다.

그런데 시커먼 사내새끼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나랑 한번 밥이나 같이 먹어 달라고 조른다?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응, 계속 두들겨 봐~ 출발하면 그만이야~~”

나는 격하게 소리치는 그들 앞에서 빵긋 웃어 보이며 약 올렸다. ATX는 이미 원격으로 내 명령을 받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 강력한 각성자라면 일반 기차 정도는 어찌어찌 막을 수 있겠지만, 이 기차는 평범한 기차가 아니다. 무려 내 거점 중 하나로 취급되며, 내구도가 다 소모되기 전에는 절대 파괴되지 않는 무적의 ATX란 말이다.

뛰뛰빵빵 칙칙폭폭.

저들이 성난 원숭이처럼 덤벼들건 말건 ATX는 무사히 동대구역을 빠져나와 다시 철로 위를 달렸다.

아! 철마는 아직 달리고 싶다!

‘이쯤 되면 저쪽에서 날 기차와 관련된 각성자라고 착각하겠군.’

각성자가 되는 조건은 아마도 진심을 다해, 자신의 생존을 걸고서 좀비와 사투를 벌여 승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각성자의 직업이 정해지는 조건은 무엇일까? 바로 그 각성자와 가장 연관성이 높은 직업이나 특정 행동 방식이다.

예를 들어 직업은 아니지만 변태처럼 쫄쫄이 티를 입고 자전거만 탔던 자전거 동호회 놈들은 당연히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각성자로 전직했다.

그밖에도 군인이었던 사람은 군인, 경찰이었던 사람은 경찰, 간호사였던 사람은 간호사, 노숙자였던 사람은 노숙자.

그 사람의 인생에서 ‘이거다!’ 싶은 요소가 바로 각성자의 직업이 되는 것이다.

이 흘러 빠진 세상에서, 그것도 평범한 기차가 아니라 뭔가 크고 아름다운 기차를 타고 다니는 놈이 있다면 당연히 그놈 직업이 역무원이나 기관사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즉 나라는 인물을 기차와 연결시키면서 포커싱을 그쪽에만 맞추도록 유도한 셈이다.

“그리고 기차가 대구를 빠져나가는 틈을 타서 나 혼자 뛰어내린다!”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기차만 도시 밖으로 내보내고, 나는 기차 밖으로 몸을 던져 안정적인 나려타곤으로 착지, 빠르게 대구 시내에 숨어들었다.

원래 영화든 드라마든 웹 소설이든 1부와 2부 내용은 확 달라야 보는 맛이 있지 않겠나.

1부가 마음씨 좋은 자선 사업가 콘셉이었다면, 이제 2부는 빨갱이 첩보 요원 콘셉이다.

‘몸에 적당히 흙도 묻힌 덕분에 숨어들기 편하겠어.’

내 얼굴을 본 사람이 제법 있으니, 최소한 얼굴만은 알려지지 않도록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은 가렸다.

추운 겨울이라 그런지 일감이나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내 복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쪽의 몰골이 좀 더 추레해 보이긴 했지만, 나도 그들 사이에 섞여 적당히 강가나 산기슭 주변을 어슬렁거리니 금세 똑같은 꼴이 되었다.

내가 이런 짓까지 하며 대구에 숨어든 이유는 지극히 단순했는데, 겉만 보고 대구 측 세력을 판단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니 직접 대구 내부를 돌아다니며 판단할 생각이다.

물론 그럴 의도였다면 처음부터 순순히 군인들을 따라가서 저쪽 상층부와 접촉해 보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 생리적 거부 반응과 혐오감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이유 없이 사람이 싫은 경우도 허다한데, 나는 합리적인 이유까지 있으니 나름 괜찮은 변명 아닌가?

‘최종적으로는 대구를 통제하고 있는 세력의 핵심 인사들과 대면하기는 해야겠지만, 적어도 내 눈으로 직접 피난민과 대구 시민 삶을 확인하고, 아직 내가 파악하지 못한 지역(대구)에선 어디까지 좀비들이 인간의 영역을 침범했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밀양을 쓸어버리기 전에 대구의 처우도 결정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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