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15)화 (116/227)

115화 투쟁기 (15)

과거에 경상도를 대표하는 도시는 부산이었지만, 경상도의 중심을 꼽으라고 한다면 대부분 대구를 지칭하곤 했다.

위치상으로도 경상도의 중앙이었고, 한반도를 관통하는 경부선 교통로의 중추를 담당하는 역할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대구에 국가적 재난 사태가 벌어지자마자 피난민이 대거 유입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약 70년 전에 발발했던 제1차 남북 전쟁인 6.25 전쟁 당시에만 해도 낙동강을 넘어 최남단으로 피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때와 지금의 차이점이라면 서울 다음으로 부산도 빠르게 함락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부산이 한반도 최후의 요새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결국 대구에 반쯤 눌러앉다시피 한 피난민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는데, 그렇게 불어난 피난민만 해도 자그마치 수백만에 달했다.

기존의 250만 인구를 수용하고 있던 대구를 미어터지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정확한 피난민 집계를 하지 못한 이유는 그럴 행정력도 없거니와, 행정 시스템도 죄다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대구라는 도시에 사람이 미어터지게 되었으니 피난민이 100만은 가볍게 넘겠지 하는 대략적인 추측만이 있었을 뿐.

피난민들과 마찬가지로 군대와 함께 대구까지 후퇴한 육군 본부의 군 장성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빠르게 인지했다.

후일을 기약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전멸한 수방사 병력은 둘째 치고, 당장 군 장병들과 피난민, 그리고 대구 시민들을 모두 넉넉하게 먹여 살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식수는 강물을 끓이고 간단한 여과 작업을 거치면…… 어떻게든 해결이 됩니다. 물을 끓이는 데 필요한 땔감이나 간단한 여과 장치 정도는 주변에 널린 자원으로 어렵지 않게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건 식량입니다. 자급자족 시스템을 안정화하기까지 수백만 인구를 최소 몇 개월에서 1년 이상 먹일 식량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대구 시청에서 파견 나와 회의에 참석한 공무원의 현실적인 보고에 참석자들 모두 표정을 굳혔다.

현재 대구 시청에서 파악해 둔 대구의 식량 사정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규모가 큰 대도시인 만큼 자체적으로 비축해 둔 식량이나 거래를 통해 유입된 물자는 넉넉했지만, 문제는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250만 인구를 수용하고 있던 대도시에 수백만 피난민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는데, 당연히 계산이 맞을 리가 없다.

급한 대로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풀어서 비교적 안전한 낮에 강과 산을 돌아다니며 식자재를 확보하게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다행히 한국은 쌀 생산량이 높은 국가라 수백만 국민들을 충분히 먹여 살릴 비축미가 있었지만, 그것도 한 지역에만 집중적으로 보관되어 있는 게 아니다. 각기 다른 지역의, 각기 다른 창고에서 지금도 주인을 기다리며 고이 잠들어 있는 실정이다.

비축미 창고처럼 군수 물자 창고 역시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에, 정보가 있어도 당장 찾으러 갈 방법이 없다.

“대구의 비축미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습니까?”

“남부 평야권(달성군)에서 올해 늦지 않게 추수를 끝낸 덕분에 당장은 걱정 없습니만, 이 대도시를 장기간 먹여 살릴 정도는 아닙니다. 게다가 해당 지역에서 재배하는 작목도 벼농사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각종 채소와 과일도 겸하고 있습니다.”

벼는 인류가 지금껏 재배하고 섭취해 온 작물 중에서 가장 효율이 좋은 작물이다.

과거 유럽이 고작 몇만 군대를 일으키는 선에서 그쳤다면, 동아시아에선 기본 10만에서 100만 단위로 대군을 일으키게 했던 힘의 원천이 바로 쌀이었으니까.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쌀은 더 이상 주류 작물이 아니었다. 한국 정부가 이 악물고 쌀 생산력만큼은 낮추지 않기 위해 온갖 농업 정책을 장려했다지만, 그래도 인기 작물에 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막말로 쌀농사 짓는 사람들은 국가에서 비처럼 뿌려 주는 보조금만 아니었어도 벌써 다른 인기 작물이나 키웠을 거라는 의견이 대세였으니까.

때문에 대구는 강과 산, 약간의 평야를 모두 가진 황금 같은 환경을 보유했음에도 생각보다 비축미가 많지 않았다.

애초에 2차 남북 전쟁에서도 비축미를 대대적으로 풀어야 할 만큼 심각한 식량난이 발생하지 않았는데, 설마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누가 알았을까.

“후우, 그냥 툭 까놓고 얘기해 봅시다. 얼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길어도 반년입니다. 상식적으로 수백만에 달하는 엄청난 인구를 외부와의 거래도, 전라도처럼 드넓은 곡창 지대도 없는 대구가 단독으로 어떻게 버틸 수 있겠습니까?”

공무원의 딱딱한 대답에 주변인들은 펜을 톡톡 두들기거나 헛기침을 토해 내기만 했다.

그들도 안다.

한국은 빌어먹을 산이 너무 많아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드넓은 평야가 턱없이 부족하고, 그 때문에 곡창 지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지역도 매우 한정적이라는 것을.

특히 대구처럼 산맥에 둘러싸여 가용 토지 면적이 한정적인 도시는 유통망이 끊어진 시점에서 고립무원이나 다름없었다. 저 옆 동네인 포항처럼 드넓은 바다와 직통으로 연결된 것도 아니고.

그나마 경부선을 통해 여러 지역으로 빠르게, 효율적으로 오갈 수 있다는 장점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좀비들이 들끓는 타 지역까지 건너가서 물자를 조달해 오거나, 그곳에서 어렵게 자리 잡은 생존자 그룹과 거래망을 틀 방법이 없다.

아마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두가 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청와대의 VIP가 간신히 헬기를 타고 탈출하고, 육본의 장성들이 잔존 병력을 힘들게 긁어모아 대구까지 후퇴한 이유가 무엇인가? 저 멀리 북한 땅 위에 있는 최정예군을 불러들이지 못한 이유는 또 무엇인가?

바로 서울에서 쏟아져 나오는 좀비 대군을 현실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이 끔찍한 사태가 한반도 남부에서만 일어났다는 보장도 없다. 어쩌면 최정예 군대가 자리 잡고 있는 한반도 북부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전 세계가 이곳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현대의 발전된 무기가 대량 살상에 특화되어 있다고는 하나, 좀비 대군의 머릿수는 단위부터가 달랐다.

10만? 100만? 장담하건대 현시점에서 한반도를 장악한 좀비들의 머릿수는 천만을 가볍게 찍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만.

대한민국과 통일된 이북 지역의 인구를 모두 합치면 얼추 7~8천만인데, 사태 초기부터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서울이 함락되었으니 좀비의 수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으리라.

지금이라면 좀비 취향에 맞는 영화만 내도 천만 좀비 관객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올 지경이니 말 다 했다.

“그래도 안 좋은 소식만 있는 건 아닙니다. 최근 군부에서 밀양시와 접선하는 것에 성공했다지요? 대구 시청 측에서도 그쪽과 연결이 되어 시청 간의 정보 교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듣자 하니 중요한 거래 내용이 오갔다던데…….”

갑자기 화제가 바뀌자 회의실 내부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육본의 기둥이나 다름없는 장성들도, 현시점에서 그들을 총괄하는 육군 참모총장 신해룡 대장도 눈빛을 바꿀 정도였으니까.

“아아, 그 부분이라면 안 그래도 이번 회의에서 결과를 보고하려 했습니다. 일전에 밀양시와 성공적으로 접선하여, 해당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월권행위를 남발한 이성철 대령을 구속하고, 그의 월권행위에 동조 및 협력한 군인들을 처리했습니다.”

마침 자료를 가지고 있던 군사 경찰단의 임시 지휘관인 모 중령이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해당 사안에 대해 보고했다.

“현재 활동 중인 군사 경찰(MP)은 사실 ‘단’이라고 불릴 만큼 규모가 크지 않습니다만, 이곳에 소속된 인원 대부분이 수도권에서 발생했던 소요 사태를 초기에 겪으며 발 빠르게 각성하였습니다. 현재는 꾸준히 좀비와 악질 각성 범죄자를 처리한 덕분에 한 명 한 명이 특수 부대 소속 대원과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투입해서 밀양시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 대가로 밀양시가 보유한 식료품을 비롯한 물자 일부를 양도받기로 했다는 겁니까?”

“정확히는 ‘거래’를 하기로 했습니다만, 보수의 형태로 일부 대가를 받는 것 역시 확정된 내용입니다. 밀양시는 자신들의 안위를 지켜 줄 경비대와 자체적으로 무장할 수 있는 군수 물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경비대 인력도, 군수 물자 수량도 당장 대구에서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상황 아닙니까?”

파견 공무원 중 한 명이 안경을 고쳐 쓰며 묻자 중령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당장은 그렇게 보이겠습니다만, 곧 대구 내부의 군수업체가 소유한 공장에서 무기와 탄약을 생산할 예정입니다.”

“그에 필요한 원자재는 어디서 구할 예정입니까? 애초에 공장을 돌릴 전력도…….”

“각성자가 있습니다.”

자세한 건 민간인에게 알려 줄 수 없다는 단호한 뉘앙스였지만, 각성자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말은 마법의 주문과도 같았다.

실제로 군부에선 이미 다수의 각성자 군인과 예비군을 확보해 둔 상태였다.

한술 더 떠서 각성자들이 좀비를 때려잡을수록 레벨 업을 하고, 특정 스킬을 얻거나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는 사실도 파악해 냈다.

또 각성자들이 상점창에서 DNA 샘플을 이용해 원자재도 비교적 싼값에 구입할 수 있게 되면서, 공장만 돌릴 수 있다면 이론상 완제품을 팍팍 찍어 내는 게 가능하다는 것도 밝혀졌다.

물론 아무리 많은 각성자들을 동원한다고 해 봤자 그런 무식한 방법으로 원자재와 공장 비상 발전기를 돌릴 연료를 대량 구매한다고 한들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뻔하다.

현재 한국에서 원자력 발전소를 비롯한 모든 발전소는 가동을 중지한 상황이다. 전력, 수도, 가스, 무엇 하나 공급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각성자들만 쥐어짜 내다 보면 결국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일이 닥칠 것이다.

그럼에도 군 내부에선 당장 코앞에 닥친 위기를 넘기기 위해, 미래를 팔아넘겨서라도 현재를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뭐, 그 부분은 군부가 알아서 하리라고 믿습니다만, 그래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은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대구는 시민과 피난민들을 모두 케어할 수 있을 만큼 의식주가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당장 피난민들도 임시 수용소로 전락한 학교나 체육관, 사용이 중단된 기차역에서 대충 이불 하나 깔고 지내는 신세다.

대구가 타 지역에 비해 겨울철이 조금 더 따뜻해서 아직 이 정도지, 이제 연말 연초가 다가오면 난방도 안 되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겠는가?

굶어 죽든, 쇠약해져서 죽든, 아니면 병에 걸려서 죽든, 분명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올겨울을 넘기지 못하리라.

“그리고 마지막 안건 말입니다만, 밀양시 측에서 보고가 들어온 바에 의하면 분명 완전히 파괴되었던 밀양역과 일부 노선이 불과 하룻밤 사이에 완벽하게 복구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 부분은 저희 측에서도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만, 아직 정확한 원인을 밝혀 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파괴된 건물과 주변 토지 일부를 복구하는 능력을 지닌 각성자의 소행이 아닌가 추측의 영역에 있을 뿐입니다.”

사실 이번 회의의 핵심 안건이기도 한 ‘밀양역 복구 사건’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분위기가 조금 달아올랐다.

만약 정말로 파괴된 건물과 토지를 복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각성자가 있다면, 그 각성자를 이용해서 파괴된 인프라를 복구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만약 그런 각성자가 실존한다면 약이나 수술 도구를 쓰지 않고도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는 의료인 각성자보다 훨씬 더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인프라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상황이라 하루빨리 복구하지 않으면 그만큼 삶의 질도, 생존 가능성도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해당 각성자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까?”

“밀양에 파견된 군사 경찰들이 해당 밀양역을 드론으로 감시한 영상을 입수했습니다. 자체적으로 영상을 분석해 본 결과, 경상도 남부에서 북상한 것으로 추정되는 생존자 집단의 일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산이 완전히 망하면서 경상도 남부는 끝장난 게 아니었나?”

“생존자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중장비와 차량을 동원해서 도로를 정리한 정황도 있습니다.”

“중장비와 차량을 운용할 정도의 세력이라면 규모가 결코 작지는 않겠군. 차량 연료도 충분히 확보했다는 뜻이고.”

생각해 보면 좀비에 의해 너무나도 빨리 멸망당한 서울과 경상도 남부는 기회의 땅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은 거의 없고 좀비들만 가득한 곳이라, 아직 건드리지 않은 물자로 넘쳐 날 터.

마음 같아서는 각성자와 군대를 이끌고 내려가서 주인 없는 물자를 대량으로 회수해 오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 최소한 사단급 병력을 온전히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철저하게 무장시키고, 훈련시키고, 물자를 비축해 둬야 군을 움직일 여력이 생길 것이다.

“우선은 주기적으로 그쪽에 정찰조를 보내는 것으로 하고, 가능하다면 밀양역에도 방문해서 해당 각성자나 그가 소속된 생존자 그룹과 접선할 수 있도록 해 봅시다.”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신해룡 육참총장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대략적인 방향성을 제시하자 다들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들이 가진 힘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의식주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은 때를 기다리며 힘을 비축해야 할 때였다.

그때, 회의실 바깥에서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에 참석자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도심의 사이렌은 외부 세력 침공, 혹은 도시 내부에서 좀비 감염 사태가 발발하지 않는 한 울릴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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