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13)화 (114/227)

113화 투쟁기 (13)

밀양 시장 김한산은 좀처럼 쉽게 구할 수 없는 두꺼운 시가 담배를 그의 집무실에서 뻑뻑 피워 대고 있었다.

옛말에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그게 무슨 말인고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세력은- 김한산이 오랜 지병으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기득권, 즉 권력자의 힘이 가장 막강할 때는 당연히 권력자가 건강하고 이성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을 때다.

하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주변을 견제하고 아랫것들을 통제해야 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온갖 스트레스와 신경 과민에 시달리기 마련.

해서 조금 더 똑똑한 권력자들은 일부러 자신을 견제하거나 탐탁지 않는 세력에게 거짓 정보를 흘린다. 쉽게 말해서 누가 봐도 뻔한 틈을 내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준동하는 불순한 무리를 일거에 잡아들여 처리할 수도 있고, 또 적대 세력에게는 방심을 유도할 수도 있다.

고작 건강 이상설 하나만 흘려도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으니, 대놓고 건강한 척하는 게 오히려 손해일 지경이었다.

요컨대, 그는 건강하다.

오랜 지병 같은 건 없고, 폭음에 폭식, 폭연까지 해도 문제없을 만큼 내구성 하나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다.

“흐흐, 그래서 계획대로 잘 풀렸다고?”

“예! 그 눈엣가시였던 군바리 놈들을 이쪽에서 힘도 들이지 않고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군. 그 대령 놈, 조막만 한 부대 하나 끌고 들어왔다고 뻗대는 게 상당히 거슬렸는데, 잘됐어.”

딱 얌체 같은 성격을 지녔을 것 같은 비서의 보고에 김한산 시장은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이성철 대령이 이끄는 그 조막만 한 부대를 알뜰살뜰하게 잘 써먹은 입장이었다.

본래 그의 계획은 수십만 피난민들이 밀양으로 들이닥치기 전에 경찰과 소방관들을 동원해서 ‘매뉴얼’대로 교각을 파괴하려는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그 부분은 역시 민간인보다 군인들이 더 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과 협력하는 조건을 걸고 교각 파괴 임무를 대신 맡겼다. 쉽게 말해서 하청을 준 것이다.

결과적으로 밀양 내외에 연결된 모든 교각을 성공적으로 파괴할 수 있었고, 김한산 시장을 따르는 공무원들과 군바리 조금, 그리고 자급자족 시스템을 위해 힘써 줄 시민들과 함께 섬에 안착하는 데 성공했다.

딱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피난민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였으면 도시 운영에 필요한 물자 소모량이 급격히 늘었을 테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남들은 자신을 인류의 배신자니 학살자니 손가락질이나 하겠지만, 김한산 시장은 오히려 밀양 시민들과 도시의 일부라도 안전하게 지켜 낸 자신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과감한 결단을 내렸기 때문에 시민과 도시가 안전할 수 있었고, 그런 시민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무한한 지지와 감사가 바로 증거였다.

‘하지만 그 자존심 강한 놈들은 끝까지 나를 상대로 뻗대기만 했지.’

담배 연기를 후욱 내뱉은 김한산 시장은 싫은 기억이 떠올라서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가장 높은 계급이 대령 하나에, 실질적으로는 대대장도 아니고 중대장이 관리하는 조막만 한 부대 하나가 참 속을 많이도 썩였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나 다름없으니 민간인은 군의 통제를 따라야 한다든가, 형평성을 위해 배급은 군대가 직접 맡겠다든가,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그와 대립각을 세웠던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그 조막만 한 부대라도 꿀꺽 집어삼켜서 자신의 친위대처럼 만들 생각이었는데, 유독 자존심이 강한 대령 한 명이 감히 자신과 이권 다툼을 하려 했던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차도살인지계를 썼다.

폭력은 더 큰 폭력으로 상대하듯, 조막만 한 부대를 이끄는 군바리는 더 큰 부대를 이끄는 군바리로 상대한 것이다.

“대구에서 아주 쓸 만한 사냥개들을 풀어 줘서 망정이지, 솔직히 그놈들을 우리 손으로 처리하려 했다면 적잖은 피를 흘렸을 거야.”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저희 쪽에도 혈기 왕성한 경찰과 예비군들이 제법 있었지만…… 그 아무래도 총 화기가 부족하다 보니.”

“그 문제도 이번에 대구와 접선하면서 차차 해결될 문제 아닌가? 저쪽에서 밀양 안보를 위해 경비대를 파견하기로 했고, 공장에서 자체 생산한 총기와 탄약을 적정가에 팔아 주기로 계약했잖나.”

“예, 기존 화폐는 더 이상 받지 않고 식료품이나 생필품, 의약품만 받는다는 점이 조금 까다롭기는 합니다만…… 아랫사람들을 동원하면 마련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다들 이미 나와 한배를 탄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제 와서 발을 쏙 빼겠다? 그놈이야말로 진짜 인류의 배신자 아니겠나, 하하!”

그래, 이 삼문동(섬) 내부에 함께 숨어든 시민과 공무원들은 이미 김한산 시장과 일심동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구처럼 인구도 많지 않고, 당장 가용할 수 있는 땅이나 인프라도 많지 않지만, 우선은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힘을 기르다 보면 이 지독한 세상에서도 빛을 볼 수 있으리라.

“오늘같이 좋은 날은 역시 꺾어야겠지. 일찌감치 정리들 하고 한잔하러 가자고.”

“아직 양주 재고가 넉넉한 룸을 알아 뒀습니다.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역시 최 비서는 일머리가 좋아. 나처럼 스마트한 시장에 어울리는 스마트한 비서라니까?”

“아직도 부족합니다. 곁에서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비축 물자로 지정해서 훗날 물물 거래용으로 써도 모자랄 고급 양주를 ‘낭비’하러 가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굉장히 가벼웠다.

* * *

경상도 남부는 내가 확실히 먹었다.

정확히는 창원 쪽은 아직 건드리지 않았지만, 창원에서 김해로 넘어오는 좀비들이 꾸준히 보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창원은 이미 글렀다.

하기야 경상도 남부 최대 공업 도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창원은 광역시를 제외하면 비수도권 도시 중 가장 규모가 크다. 그리고 그만큼 인구도 많다.

무려 부산과 견줘도 될 만큼 100만 단위의 인구를 자랑하는 곳이 바로 창원인데, 도시의 특이한 구조 때문에 범국가적 재난 상황을 이겨 내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

창원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냥 사방이 탁 트여 있다.

공업 단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당연히 교통이 활발해야 하기 때문에 포장 도로가 넓게 쭉쭉 뻗어 있었고, 이는 창원 내 거주 구역에도 비슷한 영향을 끼쳤다.

깔끔하게 정비된 길과 탁 트인 거주 구역, 그리고 좀비 아포칼립스.

이 기가 막힌 조합은 창원을 부산만큼이나 빠르게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했을 것이다.

좀비가 미친 듯이 활보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주어졌는데, 그 많던 사람들이 대피하는 것과 좀비가 아득바득 쫓아가는 것, 어느 쪽이 더 빠를까?

창원 방면에서 피난민이 아니라 좀비가 유입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답이 나왔다. 그쪽에 더 이상 뜯어 먹을 사람 고기가 없으니까 주변 지역으로 점차 발을 넓혀 가는 것이다.

사실 창원이 멀쩡하면 그쪽 공업 단지를 내가 어떻게 먹어 볼까 생각도 했었는데, 그냥 김해 남부 해안가에 있는 공업 단지로 만족할 생각이다.

차치하고, 사실상 경상도 남부가 내 손에 떨어진 지금, 경상도 중부와 북부를 먹고 있는 또 다른 세력들과의 접촉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밀양은 접촉과 협상, 협력을 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제외하고, 대구와 포항이 신경 쓰인다.

‘포항은 제철소가 자리 잡고 있는 만큼 창원 못지않은 해안 공업 도시다.

반면 대구는 분지에 위치한 내륙 도시인 만큼 공업 경쟁력은 타 도시에 비해 떨어지겠지만, 대신 인프라가 타 도시에 비해 빵빵하고 인구도 많다.

우수한 인프라는 더 많은 인구를 불러들이는 법이고,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강력한 세력이라는 걸 의미한다.

‘수도권에서 발생한 좀비 사태를 피해 달아난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선택을 했을 거다. 숙련된 군대가 지키고 있는 이북 지역, 아니면 편하게 몸을 의탁할 수 있는 남부 지역.’

약 6년에 걸친 전쟁 복구 작업과 기업들의 대대적인 투자 사업 덕분에 이제는 이북 지역도 그럭저럭 사람 살 만한 곳이 되었다고 들었던 적이 있다.

실제로 2~3년 전쯤에 평양까지 이어지는 기찻길도 뚫렸다고 들었으니, 아마 이북 지역으로 피난을 간 사람들도 제법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는 제1 피난처로써 상당히 매력적인 남부 지방 도시였다.

못해도 수백만은 몰려들었으리라.

‘주변은 온통 산이니까 주요 길목만 잘 막아도 좀비들의 침투를 8~9할 정도는 걸러 낼 수 있어.’

그렇게 안정기에 접어든 대도시가 다음 수단으로 무엇을 고를 것 같은가? 바로 총력전이다.

어감이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어쨌든 물자가 한정적인 그들 입장에서 무작정 수백만이 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는 없을 테니 마구잡이로 노동에 투입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논밭 관리, 강에서 물고기 잡기, 산에서 나물이나 버섯 캐 오기.

그야말로 세기말 북한군들이나 했을 법한 전투 노동을 하면서 기본 물자를 확보하면서 앞으로의 대책 같은 걸 논의했겠지.

윗대가리들이 대응책이랍시고 내놨을 만한 정책은, 윗대가리의 패악질을 가장 많이 경험해 봤던 나라서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김해 공항과 달리 대구나 포항은 꽤 적극적으로 각성자들을 포섭해서 대규모로 운영하고 있을 거다. 아니, 무조건 그렇게 해야 돼.’

왜냐하면 각성자는 상점창을 이용할 수 있고, 좀비를 잡아서 얻은 DNA 샘플로 필요한 것들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충 3~5 DNA 샘플을 소모하면 1인분 먹거리나 식수를 한 병 살 수 있다.

당연히 나 같아도 각성자 부대를 새롭게 창설해서 좀비를 사냥하게끔 판을 깔아 줬을 것이다.

나는 캡슐 호텔의 푹신한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그들이 어느 정도의 각성자를 보유하고 있을지, 또 세력이 가진 잠재력과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두고 가늠해 보았다.

‘생활 인프라가 반영구적이며, 거점을 지키는 데 특화된 나는 장기전에 매우 유리하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부족한 아포칼립스 시대에서 나와 장기전을 해서 이길 수 있는 놈은 없어.’

하지만 상대가 압도적인 무력과 머릿수를 이용해 단기 결전을 걸어온다면?

필사적으로 거점을 사수하면서 적들의 힘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후퇴한다고 해도 내가 크게 밀릴 것은 뻔했다.

게다가 한 번 파괴된 거점은 두 번 다시 거점으로 지정할 수 없으니,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거점을 하나 잃을 때마다 내 힘의 총량이 크게 깎이는 것과 같았다.

싸워야 하나, 아니면 어느 정도 선을 두고 협상해야 하나.

그것들조차 다 제쳐 두고 호구처럼 무조건 협력해야 하나.

참으로 골치 아픈 문제였다.

‘그래도 얼굴은 한번 맞대 보고 결정을 내리는 게 맞겠지.’

경상도는 지금 사실상 작은 삼국지나 다름없었다.

가장 세력이 큰 대구, 대구에게 밀려난 감이 있지만 그래도 잠재력이 만만찮은 포항, 그리고 경상도 남부를 싹 다 집어삼킨 나.

나한테도 제갈공명 같은 인재가 있었다면 차라리 속이 편했을 텐데, 이쪽은 압도적으로 인재 풀이 부족했다. 아니, 애초에 가진 땅과 거점에 비해서 사람이 너무 적다!

‘사람을 더 많이 확보해야 해.’

못해도 10만. 내가 가진 거점과 지역을 모두 최대 효율로 운영하려면 널널하게 100만쯤.

그런데 마침 나는 인구가 부족한데 저쪽은 인구가 많네?

“그럼 개같이 인구를 유출시켜야겠지?”

뉴밀양역, 네가 드디어 중개 무역 센터로 신장개업할 날이 다가오는구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뉴밀양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서비스를 플랫폼에 정차 중인 ATX에 실었다.

본래 특정 거점에 배치된 물건은 외부로 반출할 수 없었지만, 이번에 거점 연결 스킬을 얻게 되면서 거점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른 거점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ATX는 거점 연결과 공유 효과를 받는 특수 이동 거점이네? 다 뒤졌네?

“아이스크림 기계, 커피 머신, 오븐, 냉장고, 아무튼 다 기차에 ‘재배치’한다!”

이제 이 기차는 전설의 황금마차와 이동식 PX를 뛰어넘는 이동식 만물 잡화점이 되는 거다.

빌어먹을, 난 너무 똑똑해. 내가 너무 자랑스러워. 내가 만약 여자였다면 벌써 국내 최고 섹시남 이승권에게 바로 프러포즈부터 박았을 거다.

“새끼…… 출발!”

나를 태운 ATX가 출발을 알리듯 따흐흑! 하고 울부짖었다.

이 ATX를 본 자, 희망을 버려라이라이 차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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