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투쟁기 (10)
상황은 무사히 정리되었다. 아니, 종료되었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우리 거점의 통제하에 놓인 민간인들은 나의 협박 섞인 선택지 강요에 못 이겨 결국 노동자 계급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물론 나는 한참 전에 폐지된 무식한 노예제를 그대로 답습할 생각은 없었다. 원래 사람은 과거의 역사로부터 배우고 미래의 후손들에게 가르친다고 하지 않던가.
“노동자 계급의 1차 분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단순 노동, 서류 업무, 전문 활동.”
내가 대략적인 마인드맵을 짜 주자 김진경 경장은 서류 업무와 전문 활동을 가리키며 물었다.
“현재 전산 업무가 가능할 리는 없고, 따로 관공서나 사무실이 있는 것도 아닌데 서류 업무가 왜 필요한 겁니까?”
“거점 내 일원 및 노동자 계급의 민원 처리, 정찰조와 물자 회수조의 보고서 정리, 거점 내 물자 재고 파악, 거점 내 인원의 안전을 위한 인적 사항 조사 등등. 직접 기입하고 관리해야 할 정보들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아, 그렇군요. 지금까지 딱히 그런 일을 시킨 적이 없으신 것 같아서, 그냥 시스템으로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제 거점 내에 존재하는 거점 일원과 외부인, 적성체의 머릿수는 시스템으로 파악할 수 있어요. 게다가 지금까지는 거점 일원이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주먹구구식 운영이 가능했는데…… 이젠 아니죠.”
마침 김해 공항은 서류 업무를 하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다. 인터넷은 여전히 먹통이지만 빳빳한 새 종이가 끼워진 서류철과 필기구는 넘쳐 났고, 간단한 전산 업무를 할 수 있는 PC도 몇 대 있었다.
공항 시스템의 대부분은 내 스킬에 의해 굴러가고 있기 때문에 공항 직원들이 전문적으로 다뤄야 할 물건들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나는 공항의 넓고 커다란 보안 검색대를 이용해서 민간인 무리의 기본적인 인적 사항을 파악, 그 사람에게 걸맞은 노동 계층으로 분류하게끔 지시했다.
이미 이런 일을 질릴 대로 해 본 군인들은 서류와 펜을 하나씩 들고 민간인들의 분류에 나선 참이고, 우리 팀원들은 미처 다 회수하지 못했던 창고의 군수물자를 내 앞으로 가져왔다.
K-2 소총 62정, 5.56mm 탄약 2만 발, 155mm 견인포 2대, 155mm 고폭탄 16발, 장갑차 전용 40mm 고속 유탄 150발, 기타 거치형 기관총 탄약과 수류탄, 연막탄 등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다.
개인 화기 비중이 생각보다 적은 이유를 물었더니, 군인들이 한 달 전 부산에서 급하게 퇴각하느라 미처 넉넉한 양을 챙기지 못한 까닭이라고 한다.
하기야 그 난리통에서 이만큼 챙겨 온 것도 용한 거겠지.
그보다 육군이 후퇴할 때 꼽사리를 낀 공군은 뭐 전투기나 헬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나 내심 기대했는데, 불행하게도 그런 건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것 아닌가.
이 당나라 군대 놈들이……!
“일단 급한 대로 우리 팀원들은 물론이고, 다른 거점에서 대기 중인 전투원들도 무장시킬 수는 있겠습니다만, 탄약이 압도적으로 부족하군요. 전문적인 군대도 아니니까 체계를 확실하게 잡으려면 훈련도 엄청 해야 할 테고…….”
경찰 아니랄까 봐 가장 현실적인 문제부터 꺼내 드는 김진경 경장의 지적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다른 건 몰라도 탄약만큼은 내가 책임지고 보급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 팀원들이 원시적인 원거리 무기를 사용했던 이유는 바로 총이 없었기 때문이지, 탄약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탄약은 제 도구 제작 스킬로 필요한 만큼 충분히 만들 수 있어요. 재료만 갖춰진다면 1만 발이든 10만 발이든 뚝딱이죠.”
“……그건 굉장하군요. 그런데 왜 제 탄약은 안 만들어 주셨습니까?”
“스킬 때문에 탄약 자동 충전 되잖아요.”
“아니, 저도 급할 때는 예비탄이 있어야 안심이 되는데…….”
“부족함이 사나이를 키우는 법! 배부른 사자는 나태해진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
김진경 경장에게 내가 만든 탄약을 제공해 줘야 한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어쨌든 가혹한 환경에서 강하게 성장했으니 이것도 다 내 덕 아니겠는가?
잡설은 이쯤 하고, 나는 팀원들이 군인들의 숙소부터 창고까지 싹싹 긁어서 털어 온 군수 물자 일부를 내 인벤토리에 욱여넣었다. 당연하지만 개인 화기에 해당하는 총기와 탄약은 그대로 공항에 남겨 두었다.
오매불망 나의 복귀만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거점의 일원들에게 능력껏, 재주껏, 공평한 듯 공평하지 않게 공평한 척 분배할 예정이다. 나 대신 김진경 경장이.
“부산과 김해의 대규모 거점을 확보한 이상 두 지역은 사실상 우리의 영향권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아직 좀비들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있지만, 홈그라운드의 주인이 바뀐 이상 주도권을 가져오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죠.”
“확실히 이전보다 상황이 나아진 건 맞지만, 그래도 승권 씨가 관리하는 거점의 모든 일원을 합친들 전투원이 턱없이 부족해요. 무기는 어느 정도 확보했다지만 정작 싸울 사람이 부족하니 큰 전투는 가급적 지양할 필요가 있어요.”
김진경 경장이 다수의 사람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쪽이라면, 채성아는 거점 전체를 두루 살피고 적절한 진단을 내리는 타입이었기에 그녀의 말은 백번 옳았다.
전직 경찰과 간호사의 역량이 바로 이런 곳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하긴,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빡세게 움직이긴 했죠. 솔직히 사상자가 한 명도 없었던 건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맞아요. 아무리 좋은 음식과 안전한 쉼터를 내어 준다고 해도 같은 인원이 계속 전투에 투입되면 빠르게 한계를 맞을 가능성이 높아요,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그러니 우선 내실을 다질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 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솔직히 그쪽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서 거점을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해선 할 말이 없습니다만, 전투원들의 훈련과 합 맞추기는 필수 고려 사항입니다.”
김진경 경장은 기존부터 우리와 함께하고 있던 팀원들, 그리고 이번에 합류한 김해 공항의 군인들을 최대한 빨리 섞어 놓길 희망했다.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해서, 자신과 상황이나 신분이 다르다고 판단하면 같은 그룹에 소속되어 있어도 은근히 서로를 배척합니다. 뉴페이스를 잔뜩 영입한 지금 신속하게 관계 형성을 시키지 않으면 서로 간의 격차 때문에 부작용이 일어날 게 뻔합니다.”
내가 또 전투광처럼 팀원들을 이끌고 다른 거점을 손에 넣는다든가, 약탈자 무리나 좀비 떼를 소탕하기라도 하면 그만큼 뉴페이스의 자존감과 실적은 줄어들겠지.
서로 간의 격차가 벌어질수록 인간관계도 멀어진다는 건 사회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나도 지금까지 무리해 준 팀원들을 무작정 이끌고 또 원정을 나가고 싶지는 않아요. 새로운 무기, 새로운 체계, 새로운 관계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겠죠. 해서, 진경 씨가 사람을 좀 뽑아서 교육 및 훈련 시스템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진경 씨가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숙련된 전투원들 위주로 교관직을 맡기고, 군대처럼 체계를 잡아 보죠.”
“제게는 너무 과분한 직책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애초에 그런 건 전직 군인인 병원장님이 더 잘하시는 것 아닙니까?”
“난 따로 할 일이 있어요.”
“실례지만 어떤 일이……?”
“먹고 마시고 놀아야 해요.”
“…….”
“…….”
왜 다들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거지?
윗대가리는 원래 다들 믿음직한 측근들에게 일을 맡겨 두고서, 자기는 실컷 먹고 마시고 노는 법이잖아?
혹시 김해의 적법한 군주이자 부산 시장 후보, 김해 공항의 플라잉 마스터 이승권이 먹고 마시고 놀겠다는데 불만이 있는 건가?
“사실 그쪽 분야에서 따로 믿고 맡길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내가 직접 해도 상관은 없지만, 나는 군대에 좀 안 좋은 기억이 있거든요. 괜히 그런 일을 맡으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것 같은데…… 탈영이나 총기 난사 사고가(주로 나 때문에) 터질 수도 있고…….”
“그냥 제가 하겠습니다.”
“땡큐! 사 딸라! 땡큐!”
나는 다음 타자인 채성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상했는지 모든 것을 내려놓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아 씨는 내실 다지기에 힘 좀 써 주세요. 우리가 따로 관리하고 인재로 영입해야 할 전문 인력 후보군을 별도로 뽑아 주시고, 겸사겸사 김해 공항 주변의 노는 땅과 건물을 찾아서 농사라든가, 실내 재배라든가 이것저것 시도해 보세요. 이 근방은 사방이 강이니까 수원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전부…… 제가 하는 건가요?”
“진경 씨가 사람 뽑아서 부려 먹는 것처럼 성아 씨도 필요한 만큼 사람 뽑아다 쓰세요.”
“정말로 필요한 만큼 뽑아 써도 되겠죠?”
“뭐, 도장이라도 찍어 드려요?”
“……일단 해 볼게요.”
원래 힘든 일은 그 얘기를 먼저 꺼낸 사람들이 하는 거다.
딱 하나 예외가 있다면 생활관에 누워 있다가 방송으로 ‘훅훅!’ 하고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렸을 때뿐이다.
그때는 말을 먼저 꺼낸 놈이 아니라, 먼저 방송을 들은 놈부터 나가서 일을 하는 게 국룰이다. 나다 싶으면 일단 튀어 나가라고!
“아아, 세상은 정말 아름다워.”
나는 자판기에서 뽑은 믹스 커피를 홀짝이며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더러운 꼴, 힘든 일, 죽음을 각오한 전투 등등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로 가득했던 1차 장기 원정이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제 우리는 본격적으로 내실 다지기에 들어가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전투 부대와 자급자족 시스템을 구축할 것이다.
나아가서 우리 거점의 영향력을 타 지역에도 널리 알려, 더 많은 생존자 그룹이 우리와 함께하도록 유도할 예정이다.
이제 우리의 소확행(소비에트 연방의 확장주의적 행보)에 두려움을 느끼는 건 오직 비열하고 더러운 약탈자 무리와 좀비들뿐이리라.
아, 하나 더 있군.
‘인간에서 짐승 이하로 추락한 구더기들.’
김해 공항의 노 양심 무임 승차충들이 차라리 양반이라고 생각될 만큼, 같은 세상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구역질이 나는 놈들.
나는 모두 함께 힘을 합쳐 거점이 어찌어찌 굴러가게끔 용을 쓰고 있는 팀원들을 한번 훑어본 다음, 거점창을 열었다.
“그래,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하겠어? 이참에 실컷 먹고 마시고 놀아야지.”
본래 계획대로였다면 김해 공항을 확보하자마자 전투기든 항공기든 확보해서 그대로 꼬라박아 줄 예정이었는데, 예상했던 대로 시스템은 그런 오버 밸런스를 용납하지 않았다.
무장 열차(ATX)와 다르게 전투기와 항공기는 거점을 지키는 용도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해 공항의 격납고와 활주로 그 어디에도 날개 달린 깡통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딴 게…… 공항?
하는 수 없이 무식한 방법을 쓸 수밖에.
“빠른 이동, 뉴밀양역.”
내가 너희를 잊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금수 새끼들아.
나는 너희의 고통과 절규를 먹고, 피를 마시며, 너희의 골통을 깨부수면서 놀 예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