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09)화 (110/227)

109화 투쟁기 (9)

쓰레기의 공개 처형을 끝낸 나는 놈의 시체를 발로 툭 차서 아래로 떨궜다.

철퍼덕! 하는 소리와 함께 시체가 지면과 충돌하며 핏물을 흩뿌렸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그 끔찍한 광경에 또 한 번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지만,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큰 소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저들도 지난 한 달간 이곳에서 지내면서 돌아가는 상황이 어떤지는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기존의 기득권층(권력자)이 처형당하고 새로운 기득권층이 자리를 꿰찼으니 당연한 순응할 수밖에 없으리라.

뭐, 모든 인간들이 같은 생각이고 같은 목적이라면 이 세상에 왜 전쟁 같은 게 일어나겠느냐마는.

“다, 당신들! 군인들이 어떻게 저런 파렴치한 놈들과 손을 잡을 수가 있어! 당신들이 그러고도 대한민국의 군인들이야?!”

“그래! 우리 세금으로 지금까지 밥 빌어먹고 살았으면 우릴 지켜 줘야지!”

“이 매국노 새끼들!”

군인들, 정확히는 병사 계급에 해당하는 젊은 청년들이 모두 목숨 바쳐 싸우지 않고 허무하게 투항해 버린 것이 거슬렸던 걸까.

민간인 무리 사이에서 몇몇 이들이 삿대질하며 언성을 높였다.

지금까지 자신들을 위해 밤낮없이 경계 근무를 서고, 부족한 물자도 자신들에게 먼저 (반강제로) 양보했던 군인들의 희생과 노고는 싹 잊은 모양이다.

아니면 이렇게나 보는 눈이 많은 상황에서, 그것도 힘없고 무장하지도 않은 민간인을 건드릴 리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2층 라운지 난간에 기댄 채 아래에서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김진경 경장에게 턱짓했다.

이번 작전을 실행하면서 다소 더러운 꼴을 보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었고, 또한 필요하다면 손속에 사정을 둬선 안 된다고 주의까지 줬다.

행여나 잔정에 호소되어 일을 그르치는 사람은 내 거점에서 추방을 각오하라고 한 건 그래서였다.

내 의사를 전해 들은 김진경 경장은 직접 민간인 무리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더니, 방금 헛소리를 지껄인 중년 사내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서 들어 올렸다.

“어, 어으으윽?!”

“분명 통제에 따르라고 했을 텐데, 우리 말이 말 같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케, 케흑! 잠깐! 잠깐! 우린 아무 잘못도 없다고! 우린 그냥 여기에 피신해 있던 피난민일 뿐이야!!”

“그래도 상황이 돌아가는 것쯤은 알지 않습니까? 이곳은 우리가 점거했고, 저 친구들은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여기 처박혀서 한 달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저들을 비난하는 겁니까?”

“쿨럭! 쿨럭! 우, 우린 민간인이잖아! 무기도 뭣도 없다고! 군인이든 경찰이든 그런 민간인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잖아?!”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는 분명 우리 같은 사람들이 당신 같은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게 맞지만, 세상이 변했습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얻어먹기만 하는 무임승차는 더이상 용납되지 않습니다.”

“알았…… 쿨럭! 알았다고! 내가 잘못했으니까 일단 이것 좀……!”

김진경 경장이 중년 사내를 내팽개치자 그가 어구구구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본래 경찰이었던 그가,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여전히 정의감 넘치는 그가 연기라도 힘없는 민간인을 핍박해야 한다는 사실은 다소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내 거점의 일원이 된 이상 누구만 책임을 지고, 누구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우리와 협력하기로 한 군인들이 욕을 먹고 있다면, 우리도 똑같이 욕을 먹어야 한다.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니까. 일종의 연대 책임이다.

나 다음으로 강한 각성자인 김진경 경장이 사납게 주위를 훑어보자, 그의 기세에 짓눌린 민간인들이 포식자 앞의 초식 동물처럼 움츠러들었다.

애초에 그의 성향과 맞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에, 슬슬 내가 나서야겠다 싶었다.

나는 2층에서 훌쩍 뛰어내려 그들 앞에 섰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선언하겠습니다. 먼저 사회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는 19세 이하 미성년자들, 그리고 힘이 없어서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60세 이상의 노인분들은 새로운 거처로 이동시키고 보호하겠습니다. 단 20대에서 50대 여러분은 남녀를 막론하고 이 사태에 어느 정도 책임을 분담하고, 그에 따라 여러분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노동에 동원될 겁니다.”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이 없는 이상, 60세 이상의 노인들은 노동 인구라고 볼 수 없다. 사무 작업 정도야 할 수 있겠지만, 노인들 중 대다수가 노안에 저체력, 온갖 성인병들을 달고 사는 사람들 아닌가.

따라서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안락하게 보내기 위해 보호되어야 한다. 과거의 나처럼.

반대로 19세 이하의 미성년자들은 머리가 굵었든, 생각이 있든, 사회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더욱이 아이들은 나라의 미래이자 희망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상 우리의 다음 세대라고 할 수 있으니 노인들과는 다른 의미로 보호하고 교육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19세 이하의 미성년자와 60세 이상의 노인들을 별도의 거점에서 대가 없이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연대 책임을 주장한 이상 미래의 일꾼과 과거의 일꾼은 현재의 일꾼들이 책임지는 게 맞으니까.

예상대로 20대에서 50대에 속하는 다양한 연령층의 남녀가 극렬하게 반발했다. 조금 전에 김진경 경장이 기선을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잠깐! 보호를 해 주려면 모두 공평하게 보호해 줘야지, 누구는 그냥 보호해 주고 누구는 강제 노동에 동원시킨다는 게 말이 되나?!”

“50대도 60대 못지않게 약하고 아픈데 우리까지 노동에 나서란 말인가?”

“여자들은 신체적으로 남자보다 힘이 약하잖아요! 왜 그런 부분은 감안해 주지 않는 거죠?!”

그래, 이래야지.

이래야 6년 전에 수십만에 달하는 20대 청년들을 희생시키고 나 몰라라 했던 인간들답지.

저들 입장에서 타인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고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는 것은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것이다. 옛날부터 당연했던 그 기조가 조금도 바뀌지 않은 것이다.

“불만 있는 새끼는 내 앞으로 나와.”

철컥!

내가 총을 뽑아 들고 말했다.

또한 내 팀원과 군인들 역시 나를 보조하듯, 내 뒤에 서서 거대한 벽을 형성해 주었다.

“자기들이 주도적으로 뭔가를 해 보려고 노력하기는커녕 그런 생각조차 해 본 적도 없는 새끼들이, 이제 와서 고생길이 열리니까 막 좆같고 억울하지? 그런데 그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희생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여기 있는 군인들한테 한번 물어볼까? 거기 너, 이세형 상병.”

“사, 상병 이세형!”

“너희의 일일 배식은 얼마나 적었지?”

“평시에 먹는 것보다 최소 2배는 적었습니다. 김해 공항에 자리 잡은 지 일주일이 지났을 시점에는 모든 병사들의 배식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근무 강도는?”

“그게……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땔감과 식수 확보에 상당 인원이 투입되었습니다. 진지 보수 공사도 해야 했고, 혹시 좀비나 약탈자들이 쳐들어올 것에 대비해서 밤낮으로 경계 근무도 섰습니다.”

“인력은 충분했나?”

“한참 부족했습니다. 일은 많은데 일손이 부족해서…… 피곤하고 아파도 쉴 수 없었습니다. 우리 소대 애들 중 몇 명은 지독한 몸살에 시달려도 나와서 일하다 쓰러지기까지 했습니다.”

들리는가? 너희의 안락한 평화를 위해서 누군가는 고통스럽게 희생되어야 했음을.

“힘들게 일하는 건 군인들이었는데, 배식은 어째서 적었지?”

“위, 윗분들께서 민간인 분들이 워낙 많으시니까 눈치를 봤던 것 같습니다.”

좀비들이 쳐들어오지 않았던 안전한 김해 공항 내에서 근무하던 병사들도 이렇게 시달리고 있었다. 그럼 목숨 걸고 바깥으로 나돌아야 했던 각성자 병사들은 어땠을까?

“박지찬 병장, 할 말이 꽤 많을 것 같은데?”

사실상 가장 먼저 우리와 내통하고 다른 군인들을 매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박지찬 일행이 걸어 나왔다.

“우리가 목숨 걸고 바깥에서 힘들게 구해 온 물자들은 대부분 윗분들이 가져갔습니다. 윗분들이 민간인분들에게 직접 나눠 주면서 생색 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걸 알게 된 게 최근이었습니다.”

“그럼 목숨 걸고 밖에 나가서 물자를 구해 왔던 박지찬 병장 일행이 받은 특별한 대우 같은 건 있었나?”

“하하…… 그런 게 있었다면 저도 이렇게 쉽게 여러분과 협조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일반 전우들이 받는 배식보다 양이 조금 더 많았다는 거? 그마저도 평시에 받는 배식량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만, 그나마 저흰 각성자라서 남들보다 조금 더 버틸 수 있었죠.”

“DNA 샘플로 상점창을 열 수 있었을 테니까. 내 말 맞지?”

“……부끄럽지만 맞는 말입니다.”

“아니,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오히려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 스스로를 칭찬해도 부족하지.”

나는 산증인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모두에게 들려주고서, 다시 좌중을 돌아보았다.

“다시 말한다. 불만 있는 새끼는 나와.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 넣든, 아니면 발가벗겨서 좀비들이 들끓는 저 바깥에 던져 줄 테니까.”

조용하다. 개미가 기어 다녀도 이것보다 더 시끄러울 만큼.

이제야 좀 얘기가 통하겠다 싶어, 나는 80년대 꼰대처럼 뒷짐을 지고 민간인들 주변을 휘적휘적 걸어 다녔다.

“그럼요, 당연히 이렇게 협조해 주셔야 서로 기분도 안 상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하기도 쉽겠죠. 서로 쓴 소리 나오지 않게 협력한다, 이게 바로 사람 사는 세상 아니겠어요?”

저 바깥의 좀비들이 무서워서 바깥으로 나가 물자를 구할 수 없었다, 당연히 이해한다.

무기도 없고 체계도 잡혀 있지 않은 민간인 무리가 뭘 할 수 있었겠나, 당연히 이해한다.

지금까지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하고 사회 구성원으로 일해 온 건 이런 상황에서 보호받기 위함이었다, 그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도 선이 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넘지 말아야 할 선.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도의적인 선.

모두가 목숨을 걸고, 모두가 힘들고, 모두가 절망적인 이 시기에 자신은 책임을 지기 싫지만 권리는 당연히 누리고 싶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나처럼 이 나라에, 이 국민에 일말의 기대도 걸지 않고 평생을 집구석에 틀어박혀 홀로 쓸쓸하게 죽어 갈 각오가 되어 있어야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생기는 거다.

“긴말 안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당연히 우리에게 보호받을 것이고, 생계에 필요한 의식주를 제공받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해 왔던 생활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안락함을 약속합니다. 대신 지금까지 여러분이 짊어지지 않고 회피하려 했던 책임을 노동이라는 형태로 짊어지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남들보다 몇 배는 더 힘들고 피곤하고, 어쩌면 위험한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여러분에게 거부권이 없다는 겁니다.”

나는 말을 끝맺는 대신 저 바깥을 향해 손가락 끝을 가리켰다.

“내가 운영하는 생존자 그룹은 무임승차를 허용할 생각이 없고, 염치도 없이 남에게 빌붙으려는 자들을 혐오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보호 아래 노동에 동원되기 싫다면 지금 즉시 우리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어딘가로 떠나십시오. 여러분이 바깥에서 얼어 죽든, 좀비들에게 잡아먹히든 우린 조금도 신경 안 씁니다. 설령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모두가 단체로 걸어 나간다고 해도 우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이만한 노동력을 잃는 건 아쉽지만, 처음부터 맞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과감하게 연을 끊어 버리는 게 맞다. 생존에 유리한 건 우리지 저들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곳에 남겠다면 여러분은 거점 일원이 아닌 외부인으로서 우리의 관리 감독하에 일하게 될 겁니다. 동의한다면 아가리 닥치고 그대로 앉아 계십시오. 지금부터 연령과 성별, 건강 상태와 전문 지식 및 기술의 유무, 기타 능력에 따라 사람을 선별할 예정이니까요.”

민간인들은 군말 없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만만하게 이곳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침내 만 명 단위의 인력과 또 하나의 대규모 거점인 김해 공항을 온전히 손에 넣게 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