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투쟁기 (6)
우리는 짧지만 매우 강렬한 휴식을 취했다.
어째서 휴식을 취하는데 ‘강렬한’이라는 표현이 들어갔느냐면, 문자 그대로 강렬했기 때문이다.
뉴밀양역은 손님들이 잠깐 머무르다 거쳐 가는 가벼운 중개역 느낌이라면, 뉴부산역은 차원이 다른 편의 시설과 서비스를 자랑했다.
“확실히 밀양역에 비하면 부산역의 시설이 압도적으로 크고 좋네요. 팀원들도 모두 만족스러워하고 있어요.”
간호사인 채성아는 필드 요원이자 야전 의료인 역할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팀원들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팀원들의 스트레스 수치가 크게 내려갔다고 알려 주었다.
목숨 걸고 필드에서 뛰는 사람들이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육체적 피로도, 부상도 아니었다. 바로 정신적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였다.
육체적 피로는 좀 쉬면 금방 괜찮아지고, 부상을 입어도 심각한 수준이 아니면 금세 다시 복귀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흉터를 남기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는 한번 싹트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도 전장에 나간 군인들에게 매주 정신 상담을 받게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육체가 멀쩡해도 정신이 병든 사람은 두 번 다시 필드에 나갈 수도, 아군과 함께 움직일 수도 없으니까.
“제 무리한 부탁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따라와 준 사람들인데 그 정도 호사는 당연히 누려야죠. 솔직히 더 못 해 주는 게 미안할 지경이에요.”
죽음을 각오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자기 암시를 걸듯이 ‘나는 준비됐어.’, ‘나는 죽음을 각오했어.’라고 끝없이 되뇌어도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겁먹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역전의 베테랑 군인도, 고된 훈련을 받은 특수 요원도 예외는 없다.
죽음이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
받아들이되 굴복하지는 않는 것.
그런 어려운 결정을 하고, 또 지옥 같은 경험을 하면서도 함께해 준 사람들에겐 감사할 따름이다.
“아, 그리고 승권 씨가 알려 준 대로 다른 거점들과 연결되면서 연락 수단이 생겼어요. 공중전화를 쓰는 느낌이긴 한데, 모든 통신망이 끊어진 지금 유일하게 작동하는 통신 설비라 상당히 유용하게 쓰이고 있어요. 저쪽의 상황을 전해 듣거나, 이쪽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또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즉각적인 피드백이 가능해졌거든요.”
“잘됐네요. 솔직히 저도 거점창을 일일이 열어서 거점 내부 상황을 살피는 게 좀 귀찮았거든요.”
“이미 저희끼리 상의해서 각 거점마다 정기 연락 시간을 정해 뒀어요. 또 모든 통신 설비 앞에 긴급 호출을 받을 수 있는 통신원을 한 명씩 의무적으로 배치해 두자는 얘기도 나왔고요. 지역 커뮤니티를 활성화하는 데 한 걸음 나아간 느낌이에요.”
역시 똑똑한 사람이 일도 잘한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 조직에 도움이 되는 일을 체계적으로 딱딱 정리해서 효율적으로 관리 감독하는 이 느낌. 대부분의 업무와 작전이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던 군대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귀한 광경이었다.
군대는 나름 체계가 잡혀 있지 않냐고? 평시에는 그랬지. 전쟁이 터지자마자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반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한국군이 미군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왜 북한 영토 정리에 어째서 5년이나 걸렸는지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나는 사우나, 캡슐 호텔, 그리고 식당이나 카페에서 마음껏 휴식을 취하고 있는 팀원들을 모두 확인한 후에야 다른 일에 주의를 돌릴 수 있었다.
“팀원들은 오늘까지 편하게 휴식을 취하게 두고, 내일 이른 새벽에 다시 움직일 겁니다. 다른 거점에도 그 부분에 대해선 이미 얘기해 뒀겠죠?”
“네, 활천초와 경희대 병원 거점 모두 김해 공항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어요. 애초에 사태 초기에 가장 먼저 라디오 방송을 통해 피난민들을 대거 수용한 곳이 그쪽이었으니까요.”
김해 공항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사람이 적어서, 기타 개인적인 사정으로 당시 김해 공항에 합류하지 못한 사람들이 지금은 내 거점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거기까지라면 어차피 서로 탄 버스가 각자 갈 길을 간 마당이니 남남처럼 지내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김해 공항 측 세력이 여태껏 보인 태도였다.
절대다수의 민간인과 군인들이 극소수의 각성자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는 것도 모자라, 김해 시내 곳곳에 똥을 뿌리고 있었다.
먹는 입이 많은 김해 공항은 당연히 많은 물자를 필요로 하는데, 그쪽의 각성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두돈반 트럭을 타고 다니며 최대한 물자를 긁어모아야 했다.
당연히 시내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다 보니 좀비들의 어그로를 끄는 건 일상다반사고, 그렇게 시내로 유입된 좀비들이 내 거점으로 흘러 들어오기도 한다는 모양이다.
내 거점에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강렬한 생체 반응에 좀비들의 어그로 핑퐁이 튀어서 애먼 불똥을 맞고 있는 셈이다.
한술 더 떠서 이번에 우리가 김해에서 자리를 비우자, 결국 문제가 하나 터졌다는 모양이다.
“최근 군인들이 김해 시내에 조금씩 접근하기 시작했다네요.”
“일전에 우리 병원을 찾아온 그 각성자 군인들이랍니까?”
“인상착의와 이름까지 다 공유해 뒀는데, 그쪽 사람들은 아니라고 해요. 아마 다른 군인들이 김해 공항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 같은데, 역시 급격하게 줄어 가는 물자 상황 때문이겠죠?”
“뭐, 그렇겠죠.”
내가 계산기를 좀 두들겨 봤는데, 박지찬 병장 일행이 매일같이 죽어라 물자를 찾아 나선다고 해도 메꿀 수 있는 물자의 양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김해 공항에 쌓여 있던 막대한 양의 비상 물자를 까먹으며 어찌어찌 버텼던 것 같은데, 좀비 사태가 시작된 지 한 달이 흐른 지금, 수만 명을 먹여 살리던 물자가 마침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서로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기 싫어서 떠넘기고 미루다가, 결국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한 거겠죠. 안 봐도 뻔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김해 공항에 모였다면 저들끼리 잠시 재정비의 시간을 가진 다음, 주변 좀비들을 처리하면서 어떻게든 자급자족하려는 노력이라도 했어야지.
결국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게으름 피우다가, 스리슬쩍 남이 지어 놓은 밥상에 숟가락 얹겠다는 것 아닌가?
우리가 어떻게 거점을 활성화하고, 좀비들을 처리해 가면서 자급자족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염치없이 빼앗아 가겠다는 놈들의 심보는 역겨움의 끝판왕이었다.
부산역 일이 끝나면 밀양에 남아 있는 금수 새끼들도 깔끔하게 처리할 생각이었지만, 우선 급한 불부터 꺼야 할 것 같다. 등 뒤에 적을 남겨 두고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마음 같아서는 싹 다 남해 바다에 수장시켜 버리고 깨끗한 사회를 만드는 데 한 손 거들고 싶다만, 그 많은 인력을 고래 밥으로 만드는 건 지나친 낭비지.’
너무 약해서, 혹은 책임을 지기엔 너무나도 어려서 이 힘든 시기에도 나설 수 없는 노약자와 장애인, 그리고 미성년자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을 예정이다.
다만 사지 멀쩡하고 그럭저럭 힘도 쓸 수 있는 ‘평균적인’ 성인 남녀들에게는 예외 없이 책임을 물어 사회 재건의 노동력으로 사용할 것이다.
“내일 김해 공항을 접수하죠. 그 게으른 돼지 새끼들에게 의무 없이는 권리도 없다는 걸 알려 줘야겠어요.”
“……그래도 군대가 상대인데 괜찮을까요?”
“안 될 거 없죠. 부산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김해 공항도 거점 지정 스킬로 탈취하면 그만이니까요.”
이미 부산역을 먹은 시점에서 부산 전체가 우리에게 이로운 효과를 주는 우호 지역으로 전환되었다. 그럼 김해의 대규모 거점이자 랜드마크나 다름없는 김해 공항을 ‘강제 탈취’ 한다면? 아마도 김해 역시 우호 지역으로 전환될 것이다.
우호 지역 내에선 거점 방위자와 거점 일원 모두 신체 능력에 큰 보정 효과를 받는다. 이건 비각성자와 각성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 측 비각성자도 상대를 수월하게 통제할 수 있을 터.
인간끼리 연합해서 으쌰으쌰해도 모자랄 판국에 서로 피를 흘려야 한다는 사실이 탐탁지 않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세상이 이렇게 변한 마당에 더 이상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다른 한쪽은 의무 없이 권리만 누리는 걸 용납해선 안 된다.
필요하다면 피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언젠가는 다들 손에 피를 묻히게 되어 있어요. 그저 그 시기가 내일로 앞당겨진 것뿐이죠. 김해 공항의 무력 집단은 제가 처리할 수 있으니 여러분은 저들에게 공평하면서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분류만 하세요.”
“분류…… 라고 하시면?”
“책임지고 사회 재건에 동원되어야 할 노동자 계급과, 보호받아야 할 취약 계층의 분류요.”
아브라함 링컨이 폐지시킨 노예제를 다시 현대에서 부활시켜야 한다는 게 씁쓸하지만 어쩌겠는가. 저들이 자초한 일인 것을.
저들을 모두 죽이기에는 너무 아깝고, 그렇다고 공평하게 다른 이들처럼 거점 일원으로 받아들여서 혜택을 누리게 하자니 너무 쓰레기 같다.
그러니 하다못해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보호해 주되, 저들이 진정한 사회적 책무의 참뜻을 알게 될 때까지 부려 먹을 수밖에.
* * *
채성아와 김진경 경장에게 먼저 내 계획을 전달하고, 두 사람이 각 팀원들에게 다시 설명하고서 정확히 하루가 지났다.
슬슬 본격적인 겨울의 한파가 한반도를 뒤덮기 시작하자, 제아무리 따뜻한 남부 지방이라고 해도 이가 시릴 만큼 추웠다. 바닷바람을 그대로 맞는 새벽의 부산은 특히 더.
‘조만간 남부 지방에도 첫눈이 내리겠군. 강원도나 그 위쪽 지역은 이미 새하얗게 덮였겠어.’
전쟁이 발발하기 전, 최전방에서 근무하던 당시 이맘때 하늘에서 내리는 새하얀 똥을 치우느라 참 많은 고생을 했던 것 같다.
군인들이 가장 귀찮아하는 작업 TOP3인 배수로 청소, 진지 공사, 그리고 제설 작업은 항상 우리 곁을 맴돌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니까.
사실 귀찮음의 끝판왕인 대민 지원을 나갈 때도 조금 짜증이 날지언정 싫지는 않았다.
결국 군인은 국가와 국민을 지키고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대민 지원을 받는 사람들은 대개 어려움에 처한 약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호의가 계속된다고 해서 권리라고 착각하면 안 되지.’
호국 선열들이, 또 그들에게서 보호받아 온 선배들이, 그리고 선배들의 유지를 이은 우리들이 힘들고 좆같아도 국방의 의무를 졌던 이유는, 미래에도 우리의 뒤를 이어 줄 사람이 있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좆같이 부려 먹기만 하고 존중하지 않는다면 누가 국방의 의무를 지고 싶어 하겠는가.
누가 김해 공항에 편하게 눌러앉아 하염없이 떼쓰고 징징거리는 ‘어른이’들을 위해 희생하고 싶어 하겠는가.
세상이 바뀌었고, 시대가 흐르고 있으며, 이제 사람도 기존의 상식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는 걸 저들도 알아야 한다.
“ATX 출발합니다. 각 팀원들은 김해 공항에 도착하면 미리 브리핑받은 대로 움직여 주세요. 그리고 미리 경고해 두는데, 혹시라도 괜한 정 때문에 손속에 사정을 두거나 작전을 방해하는 팀원은 거점에서 추방시키겠습니다.”
우리를 태운 ATX가 어슴푸레한 새벽을 등에 업은 채 슬그머니 부산역을 빠져나왔다.
김해 공항에 눌러앉은 저 게으른 돼지들은 아직 갱생의 여지가 있다.
딱히 내가 저들의 인간성이나 의지를 믿는 것은 아니다.
갱생시키지 않으면 공짜로 거점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나와 함께 거점에서 생활하며 의무를 진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지.’
물론 갱생이 안 될 만큼 쓰레기인 연놈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단숨에 휘어잡고 통제하려면 그것들의 피를 내 손에 직접 묻힐 필요가 있겠지.
우리를 태운 ATX가 당당하게 교각을 넘어서고, 김해 공항이 훤히 내다보이는 선로 한복판에 정지했다.
105mm 곡사포가 조용히 포구를 들어 올리고, 허공을 향해 이른 새벽을 뒤흔드는 기상나팔을 불었다.
꽈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