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투쟁기 (5)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살아온 서울 촌놈이지만, 그래도 전쟁이 터지기 전엔 나름 여행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젊은 놈이 건강한 몸 가지고 썩히면 아까우니까 자전거로 국토 일주도 하고, 비행기 타고 가까운 제주도에 가서 제주 감귤 까먹으며 제주 조랑말도 타고, 그런 인생에 새길 가치가 있는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인생은 원래 뜻대로 풀리지 않는 법. 특히 내 인생은 태어나기 전부터 어떤 미친놈이 하드코어 모드를 찍어 놨는지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었다.
“기차 여행도 참 괜찮은데, 이승권한테 정말 좋은 건데,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네.”
무장 고속 열차 ATX의 지붕 위에 올라가서 선탠을 즐기는 피서객처럼 벌렁 드러누운 나는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우선 부산역을 완전히 내 통제하에 들이면서 수많은 추가 혜택이 생겼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ATX의 추가 배치였다. 이제 나는 총 3대의 ATX를 가지게 되었다.
3대의 ATX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부산역에서 동시에 서쪽, 북서쪽, 북쪽 방면으로 3대의 ATX를 모두 출격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힘차게 출발하는 ATX는 시스템의 힘으로 복구된 선로를 따라 더욱 많은 좀비들을 처리하고, 잃어버린 인간의 영역을 되찾게 해 줄 것이다.
ATX가 가진 힘은 이미 부산역에서 거점 전쟁을 하며 파악한 바 있기 때문에, 어지간한 강적이나 대군이 상대가 아니고서야 ATX가 힘 싸움에서 밀릴 일은 없다.
‘애초에 ATX가 무조건 힘 싸움에 응해 줘야 한다는 법도 없지 여차하면 기동력을 살려서 도망칠 수 있으니까.’
흑심을 품은, 이른 바 통제를 잃고 무자비한 약탈자로 전락한 군대가 ATX를 상대로 중화기를 퍼붓는다면 또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살덩어리로 구성된 생명체가 ATX를 이길 방법은 거의 없다고 본다.
무엇보다 원거리 포격은 ATX도 할 수 있다. 지금은 105mm 곡사포가 전부지만 숙련 포인트를 투자해서 업그레이드를 하면 더 굉장한 화력을 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이제 거점 간의 연결이 가능해지면서 거점 방위 무기를 서로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게 핵심이야.’
나는 족히 수천 명은 가볍게 수용할 수 있는 역 플랫폼을 힐끔 살폈다.
밀양역에서도 크게 활약한, 스카이넷의 화신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무시무시한 경비 로봇이 삐빅 기계음을 흘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ATX는 특수 이동 거점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부산역과 거점 연결을 하면 저 경비 로봇도 가지고 다닐 수 있었다.
즉 ATX에 탑승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 강력한 중화기와 장갑, 그리고 우수한 AI로 무장한 경비 로봇이 되는 것이다.
분명 적들은 ATX를 집중 공격했는데 그 안에 인간은 한 명도 없고, 대뜸 경비 로봇이 우르르 튀어나와서 ‘너는 이제 뒤진 목숨이다, 살덩어리.’, ‘인간 시대의 끝이 도래했다. HAHAHA.’ 같은 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무서운가?
‘이참에 경비 로봇의 적성체 발견 대사에 ‘존 코너는 어디 있나, 살덩어리?’라는 대사도 추가할까?’
내가 확보한 거점들이 지금보다 약했던(?) 시절에는 외부의 좀비들을 거점으로 끌어들여서 소탕한다는 작전을 실행하지 못 했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ATX에 경비 로봇을 태우고 대충 노선 뺑뺑이를 돌면서 어그로를 끌고, 그렇게 모여든 좀비나 약탈자들을 깔끔하게 처리하면 끝.
유리하면 철저하게 유린하고, 불리하면 즉시 빤쓰런을 치는, 그야말로 야비함의 끝판왕 전략을 시도해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SSS급 독식하는 퇴역병’이라는 제목으로 웹 소설 하나 뚝딱 써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중에 웹 소설이 대박 치면 넷플러스 직원들이 찾아와서 제발 드라마로 제작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지 않을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넷플러스를 복구하고 나면 내가 대주주가 되는 것도 괜찮겠어.’
잡생각은 딱 거기까지.
나는 이 추운 날에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집하는 팀원들이 플랫폼으로 내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리뉴얼된 부산역의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만들어 온 저들이 정말로 아포칼립스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생존자가 맞는 건지 의심스럽다.
“승권 씨도 한잔하실래요?”
“전 쓴 거 싫어하는데요.”
“그럴 줄 알고 레모네이드 가져왔어요.”
나와 같은 무수한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택한다는 전통 음료 레모네이드가 합격 목걸이처럼 내 손에 주어졌다.
부산역이 리뉴얼되자마자 우리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최신식 숙박 시설에서 씻고, 늘어지게 한숨 자고, 의류 매장에서 깨끗한 옷을 골라 입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전부 부산역을 이용하는 외부인과 거점 일원들에게 공평하게 제공될 서비스였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부산역을 확보하기 위해 고생한 이들만 누리는 특혜였다.
평소 군기가 바짝 들어 있는-경찰이지만- 김진경 경장도 이번만큼은 전투로 쌓인 스트레스와 피로를 덜어 내고 싶었는지, 무장 제복을 벗어 두고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도 이번에 레벨 업 꽤 하지 않았나요?”
“아, 맞습니다. 안 그래도 향후 우리 조직의 방향성과 함께 그 부분을 논의하려고 찾아온 참입니다.”
“저는 새로운 스킬이 2개나 생겼어요!”
거점 방위자와 거점 일원은 싫어도 나와 자동으로 파티를 맺는 구조였는데, 일단 함께 전투를 치르면 무조건 경험치를 50%를 나눠 받는 구조였다.
여기서 나눠 받는다는 것은 내 몫을 50%만큼 나눠 준다는 게 아니라, 내가 100%를 받으면 저들은 그중 50%에 해당하는 경험치만을 받는다는 의미다.
내가 좀비 1만 마리 분 경험치를 획득했다면 저들은 5천 마리 분 경험치를 획득하는 셈.
게다가 두 사람은 나에 비하면 턱없이 레벨이 낮았기 때문에, 고정 비율로 받은 경험치를 그대로 환산해서 폭발적인 레벨 업이 가능했다.
듣자 하니 채성아는 단숨에 레벨이 15나 되었고, 김진경 경장은 그보다 조금 더 높은 19를 찍었다고 한다.
좀 잘나가는 각성자들의 평균 레벨이 10레벨 대인 걸 감안하면, 두 사람의 성장 폭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그 이만철 세력에게도 밀리지 않는 수준이니까.
“저부터 말씀드릴게요. 우선 이번에 폭발적인 레벨 업을 하면서 숙련 포인트를 꽤 벌었고, 무엇보다 레벨 업 랜덤 효과로 특전 스킬을 2개나 획득했어요.”
“획득으로 얻을 수 있는 특전 스킬은 쓸 만한 게 제법 나오더군요. 그래서 어떤 스킬들이 나왔나요?”
“하나는 제 직업과 관련이 깊은 약재 조합이에요. 특정 의약품이나 의약 원료를 구해서 조합하면 특수한 효과를 가진 약을 만들 수 있다고 해요. 게다가 등급은 C++라서 숙련 포인트를 조금만 투자해도 바로 B- 등급으로 만들 수 있어요.”
그건 상당히 좋다. 아니, 좋은 걸 넘어서 혁신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채성아는 의약품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약국이나 병원에서 즉시 약재 조합이 가능할 것이다. 의약 지식이 부족하다면 현재 경희대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의사들의 도움을 받아도 된다.
이미 나는 일반 소총탄보다 조금 더 효과가 좋은 소총탄을 스킬로 만들고 있다. 시스템이 아주 살짝 개입하기만 해도 현실에서 매우 큰 차이가 생기는데, 하물며 의약품이라면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순간적으로 비아그라 효과를 500배 늘리는 것이 가능하냐고 물어볼 뻔하다가 간신히 참았다. 아무리 내 주둥이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그건 아니지.
‘성능 좋은 비아그라를 만들어도 쓸데가 없잖아! 정신 차려, 이승권 주니어!’
내가 이승권 주니어를 타박하든 말든, 채성아는 신이 나서 자신의 두 번째 특전 스킬에 대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두 번째 특전 스킬은 사실 제 직업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특이한 건 확실해요. 약점 공유라는 스킬인데, 적성체를 대상으로 시전하면 아군에게 적성체의 가장 취약한 신체 부위 정보가 10분간 공유되는 스킬이래요. 등급은 D-인데…… 투자할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관련이 있다면 있겠네요. 간호사도 기본적으로 해부학 정도는 배우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딱 봐도 전투 보조 스킬인 것 같아서 간호사한테 어울리는 스킬인지는 좀…….”
“직업 고유 스킬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 쓸모는 충분히 있다고 보는데요.”
나도 암행이나 도구 제작, 짚 라인 같은 특전 스킬을 잘 써먹고 있다. 직업 고유 스킬에 비하면 엄청 대단하다까지는 아니지만 일단 얻어 두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정도?
“스킬이 많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애초에 스킬 투자는 천천히 알아보면서 해도 늦지 않아요.”
개인적으로 필드 요원 겸 야전 의료인으로서 그녀의 역할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는 스킬 조합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필드 요원으로 키우자고 마음먹길 잘한 것 같다.
다음은 김진경 경장의 차례였다.
그는 나 다음으로 거점 내에서 가장 무력이 강한 전투원이었기 때문에, 그의 능력과 성장 척도를 꼼꼼하게 살필 필요가 있었다.
동료들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주지 않는 거냐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나 김해의 적법한 군주이자 부산의 통 승궈이햄이 거점을 떠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저도 채성아 씨와 마찬가지로 레벨 업을 하면서 특전 스킬을 2개나 얻었습니다.”
“난 아무리 레벨 업을 해도 하나 얻으면 다행이었는데, 두 사람은 2개씩 얻네. 이거 차별인가?”
“하하, 대신 저희보다 훨씬 더 강하고 많은 권한을 가지고 계시잖습니까. 각설하고, 제가 얻은 첫 번째 특전 스킬은 ‘전투 자극’입니다. 전투에 들어가기 전 허공에 대고 총을 쏘면 발동하는 버프 스킬인데, 30분간 모든 아군의 육체적 스텟 등급을 한 단계씩 올려 준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근력 스텟이 B인 사람이 제 버프를 받으면 일시적으로 A가 되는 겁니다. 스킬 등급은 B+입니다”
“……상당히 좋네요. 조용히 적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선 사용할 수 없겠지만 기습을 가하거나 전면전을 벌일 때는 상당히 유용하겠어요. 그런데 효과가 좋은 만큼 당연히 쿨타임도 길겠죠?”
“예, 스킬 지속 시간은 30분이지만 스킬 쿨타임은 무려 12시간이나 됩니다. 뭐, 전투광이 아니고서야 하루에 몇 번이고 격전을 벌일 일은 없을 테니 스킬 스케줄을 잘 조정하면 될 겁니다.”
스킬 지속 시간이나 쿨타임은 스킬을 업그레이드하면 어느 정도 해소될 문제이니 일단 제쳐 두고, 나는 가만히 그의 설명을 경청했다.
“두 번째로 획득한 특전 스킬은 ‘고가치 표적 지정’입니다. 특정 적성체를 고가치 표적으로 지정하면 사망에 이르게 할 때까지 모든 아군이 20% 추가 데미지를 입힐 수 있으며, 고가치 표적 처치 시 2배에 달하는 DNA 샘플과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스킬 등급은 마찬가지로 B+인데, 이건 스킬 쿨타임이 무려 24시간입니다.”
“전투 자극과 고가치 표적 지정을 조합해서 사용하면 전투 효율을 극한까지 끌어 올릴 수 있겠네요. 격전을 앞두고 사용할 수 있는 히든카드로 생각하면 되겠어요.”
가령 부산역의 보스로 등장했던 그 ‘로랜드뭐시기존나큰 좀비’를 상대할 때 써먹을 수 있었다면 효과가 엄청났을 것이다.
앞으로는 그런 상황에서 김진경 경장의 특전 스킬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더욱 신경 써야겠다.
‘아니, 그런데 왜 이 양반들은 고작 특전 스킬 성능이 왜 이렇게 좋아?’
나는 살짝 억울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지만, 정작 두 사람은 의아함을 표할 뿐이었다. 이런 타고난 인싸들 같으니.
“그럼 전국 스킬 자랑 대회는 이쯤 하면 된 것 같고, 이제 부산역을 점령했으니 다음 목표와 계획에 대해 논해 봐야겠죠?”
사실 두 사람이 찾아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향후 계획에 대해 설명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부산역 관리자 사무실에서 가져온 지도를 펼쳐서 검은 수성 펜으로 선을 찍찍 긋고, 특정 지역에 동그라미나 별 모양을 그렸다.
“부산역을 점령한 시점에서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지역은 김해 공항이에요. 족히 만 명 단위의 인간들이 여기에 한 달 가까이 처박혀서 놀고먹고 있거든요.”
“사태가 발발한 뒤 부산에서 급하게 후퇴한 군대가 김해의 피난민과 잔존 병력을 긁어모은 곳이군요. 자기들 말로는 가장 안전하고 물자가 넉넉한 피난민 수용소라고 했었는데…… 솔직히 저는 믿지 않습니다.”
“저도 사실 처음에는 좀비들을 피해서 김해 공항 방면으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중간에 승권 씨와 만나서 합류하게 됐어요. 아마 그대로 김해 공항으로 향했더라면 그다지 좋은 일은 없었겠죠.”
두 사람의 말대로, 나 역시 이 암 덩어리 같은 김해 공항을 좋게 볼 수 없었다.
‘극소수의 양심 있고 선량한 인원이 절대다수의 병신들에게 노예처럼 부려 먹혀지고 있는 곳이지.’
나는 병원으로 급히 도망쳐 왔던 박지찬 병장과 그 일행을 떠올렸다.
기껏 각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체가 강하지 않고 마음도 독하지 않아서, 김해 공항의 병신들에게 휘둘리고 있는 불쌍한 인재였다.
“사실 김해 공항을 접수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부산역을 점거한 이유와 같아요.”
“어쩌면 비행기를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까?”
“글쎄요, 시스템이 기차를 제공해 주긴 했지만 비행기까지 제공해 줄지는 의문이에요. 시스템이 우리 각성자에게 아낌없이 막 퍼 주는 라임 오렌지 나무 같지만, 저는 시스템이 그렇게 마냥 친절한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마 비행기를 제공하더라도 다양한 제약을 걸거나, 최소 2개 이상의 또 다른 공항을 확보하지 않으면 비행기를 제공하지 않는다 같은 조건이 달릴 수도 있죠.”
기차역을 점령했으니 기차를 제공한다 같은 단순한 생각을 가지는 건 조금 위험했다.
시스템은 인간과 좀비 간의 끊임없는 생존 경쟁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존 경쟁에서 극심한 밸런스 파괴를 유발하는 요소는 아예 배제할 가능성이 높다.
막말로 ATX는 좀비들이 떼로 달려들어서 파괴할 수라도 있지,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는 좀비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게 뻔하지 않은가. 따라서 그 부분은 논외라고 봐야 한다.
“비행기를 받지 못한다고 해도 교역 장소, 피난민 수용소, 그리고 임시 군사 기지 등 용도는 다양하니까 확보해서 나쁠 건 없어요. 오히려 김해 남부 공업 단지를 확보하기 전에 반드시 처리하고 넘어가야 하죠.”
공업 단지를 확보해서 강력한 무기나 차량 등을 만들면 그것을 보관할 대규모 창고가 필요한데, 김해 공항은 딱 어울리는 장소였다.
“그럼 결정됐군요.”
“저쪽에서 알아채기 전에 기습적으로 들이쳐야겠네요.”
“물론이죠. 이틀 뒤에 작전 시작할 테니 미리 팀원들에게 공지해 두세요.”
나 좀비 아포칼립스의 사이다 머신 이승권은 김해 공항의 떨거지들에게 갑질을 시전할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