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투쟁기 (4)
사람들은 누구나 이기고 싶어 한다.
그게 아주 간단한 가위바위보든, 서로 총칼을 맞대고 피를 흩뿌리는 전쟁이든.
먼 옛날부터 인류는 경쟁과 투쟁으로 삶을 연명해 왔다. 경쟁 없이 발전 없고, 투쟁 없이 생존도 없기 때문에 서로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것보다 치고받는 걸 더 생산적인 일로 여겼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주아주 먼 뿌리의 조상님들 앞에서도 자랑스럽게 자신을 뽐낼 수 있는 남자라고 할 수 있다.
초경쟁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당당히 인서울 대학에 입학하여 짧은 인싸 생활을 즐겼으며, 현역 군인이던 시절에는 북한군 놈들과 뒤엉키며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으니, 결국 경쟁과 투쟁 모두 승리한 알파 메일인 셈이다.
벌써부터 베타 메일들의 열등감과 질투 섞인 시선이 느껴지는군.
하지만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 이승권은 결국 승리했다는 것을!
“라이라이 차차차!”
“꺅!”
힘찬 기합과 함께 벌떡 일어난 나는 지척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 정신을 잃고 있었던 내게 무릎 베개를 해 주고 있던 채성아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 왜 멀쩡한 침상 내버려 두고 무릎 베개 같은 비효율적인 짓을…….
“저, 정신이 드셨나요? 폭발의 충격에 휘말리셔서 기절하셨길래 간호사인 제가 잠깐 상태를 살피고 있었어요. 절대 이상한 의도는…….”
“간호사가 환자 상대로 당연히 이상한 의도를 품었을 리가 없죠. 저는 채성아 씨의 투철한 직업 정신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보다 제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나요?”
슬쩍 손목시계를 살핀 그녀는 대략 3시간 정도 지났다고 알려 주었다.
3시간이나 외간 여자 허벅지 위에서 꿀잠을 때린 내가 문제인지, 아니면 각성자인 자신의 신체 능력만을 믿고 3시간이나 외간 남자 머리를 허벅지로 받쳐 준 그녀가 문제인지는 쉽사리 판단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미쳐 돌아가는 세상인데 멀쩡하던 사람의 정신머리까지 갑자기 회까닥한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으니까.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나는 여전히 파괴된 상태 그대로인 부산역 내부를 둘러보았다.
부산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거점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내 거점 지정 스킬 등급이 낮은 탓에 부산역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 상태였다. 덕분에 내가 거점을 지정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인 ‘거점 리뉴얼’도 없었다.
‘우선 거점 전쟁의 결과부터 확인해 봐야겠군.’
배에 힘을 빡 주고 상태창을 호출하니 익숙한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생존자 : 이승권]
[직업 : 퇴역병]
[직업 숙련 레벨 : 26 > 35]
[칭호 : 오버킬, 피바람, 응급 구조 요원, 동족 포식자, 농성의 왕, 부산의 승궈이햄(NEW)]
[생존 기간 : 28일 차]
[숙련 포인트 : 10 > 20]
[생존자 중 최초로 직업 숙련 레벨이 30레벨을 돌파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새로운 직업 고유 스킬이 개방됩니다.]
[레벨 업을 통해 랜덤한 확률로 새로운 특전 스킬을 획득하였습니다.]
좀비를 1만 마리나 때려잡았음에도 레벨이 9밖에 오르지 않은 이유는 그만큼 내 레벨이 너무 높기 때문일 것이다. 요구하는 경험치가 늘어났으니 당연히 1만 마리를 때려잡아도 레벨 업이 더딜 수밖에.
그래도 10레벨 단위마다 지급하는 보너스 포인트까지 합쳐서 정확히 20 숙련 포인트를 채울 수 있었다. 이걸로 거점 지정 스킬을 C-에서 단숨에 B-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사실 반쯤 이걸 노리고 부산역을 공략한 것이었기 때문에, 예상했던 그대로 계획이 성공하자 어깨가 절로 들썩였다. 역시 넌 너무 섹시해, 이승권.
‘잠깐, 그보다 새로운 직업 고유 스킬이 개방됐다고?’
어차피 스킬 창을 열어야 하는 김에 그것도 살피기로 했다.
“스킬 창!”
[직업 고유 스킬 : 거점 연결(A-), 거점 지정(C-), 거점 경계 강화(E), 거점 방어 강화(E), 최후의 보루(A+)]
[개인 고유 스킬 : 사격(A), 체술(B), 야간 경계(B++), 통증 억제(D)]
[획득 및 특전 스킬 : 도구 제작(E), 짚라인(D-), 암행(D), 전투 자극제(C+)]
딱 봐도 새로운 놈이 하나 보인다. 거점 연결이라는 묘한 이름을 가진 놈. 직업 고유 스킬 중에선 최후의 보루에 이은 두 번째 A급 스킬이라 홀린 듯 해당 스킬의 상세 정보를 열었다.
새롭게 획득한 전투 자극제(C+)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금 A급 스킬이 새로 생겼는데 그깟 C급 스킬이 뭐 대수란 말인가?
[거점 연결(A-) : 거점과 거점을 연결하여 퇴역병의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연결된 거점끼리는 방위 무기를 공유할 수 있으며, 거점 간에 상시 연락할 수 있는 통신 수단이 배치됩니다. 또한 특정 지역 내에서 ‘대규모 거점’을 1개 이상 확보할 경우, 해당 지역은 퇴역병에게 ‘우호 지역’으로 변경됩니다. 단 거점이 파괴되거나 거점 지정을 취소할 경우 ‘적대 지역’으로 변경됩니다.]
[우호 지역 : 우호 지역은 퇴역병과 거점 방위자, 거점 일원 모두에게 신체 능력을 최대 ++ 시키는 효과가 적용됩니다.(같은 효과는 중첩되지 않습니다.)]
[적대 지역 : 적대 지역은 해당 지역 내에 존재하는 모든 적성체의 신체 능력을 최대 ++ 시키는 효과가 적용됩니다.(일부 같은 효과는 중첩됩니다.)]
[최대 연결 가능 거점 수 : 100]
[특수 효과 : 퇴역병은 1일 1회 한정으로 거리에 관계없이 거점과 거점 사이를 즉시 이동할 수 있는 ‘빠른 이동’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퇴역병에게만 적용되는 효과입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먹을 쥐지 않으면 흥분으로 다른 부위에 피가 몰릴 것 같았기 때문에.
거점 연결(A-)는 정말 시스템에 충실한 스킬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오픈월드형 게임과 상당히 유사한 특징을 자랑했다.
거점과 거점 간의 연계를 더욱 쉽게 해 주며, 특정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 한술 더 떠서 거점과 거점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제한적인 순간 이동 기능까지!
이거지, 이게 바로 나 이승권의 앞날이 밝을 수밖에 없다고 알려 주는 운명의 억지력!
아아, 행운은 바람과도 같지, 늘 내 곁에 있으니.
눈을 감고 조용히 박수를 친 나는 스스로에게 이승권 포인트 3점을 부과하기로 했다. 이승권 포인트 1점은 참 잘했어요 도장 1개와 바꿀 수 있다.
“아, 이러고 있을 게 아니지.”
엄밀히 따지면 아직 거점 연결은 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산의 대규모 거점 중 하나인 부산역을 내가 온전히 통제하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거점 지정 스킬에 20 숙련 포인트 투자.”
[거점 지정(C-) > 거점 지정(B-)]
어렵게 모은 20포인트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서 거점 지정에 꼴아박았다.
[생존자 중 최초로 대규모 거점을 온전히 통제하에 두었습니다.]
[당신은 이제 우호 지역 내부 상황을 감시, 관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제 확률적으로 ‘거점 강제 탈취’가 가능합니다.]
[거점 지정 스킬 등급에 따른 거점 강제 탈취 성공 확률 : B(70%), A(85%), S(100%)]
[이제 거점 방위 무기는 우호 지역 내의 적성체를 자동 포착, 요격합니다.]
[우호 지역 내의 방위 무기는 자동 수리, 자동 탄약 생산에 추가 보정 효과를 받습니다.]
두 번째 희열은 나비처럼 날아와 벌처럼 내 뇌를 후벼 팠다. 도파민이 이토록 미친 듯이 분비되었던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희열에 젖어 있는 것도 잠시, 곧 부산역이 온전히 내 통제하에 놓이면서 자동적으로 거점 리뉴얼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부산역 내부에서 뭐 쓸 만한 거 없나 뒤적거리고 있던 팀원들이 놀라서 우르르 뛰쳐나올 만큼,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진동과 섬광이 일었다.
밀양역을 손에 넣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한민국에서 규모로만 따지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초대형 역은 역시 달라도 다르구나 싶었다.
“와……!”
눈부신 빛이 잦아들고, 지진을 연상케 하는 진동도 사라지자 성질 급한 누군가가 나보다 먼저 새롭게 바뀐 부산역을 확인했다.
나도 생일 선물을 기대하는 어린아이처럼 두근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은 밀양역보다 적어도 2배, 아니 3배 이상은 거대한 기차역이었다. 이걸 기차역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의심스러운 규모이긴 했지만, 대놓고 외부 플랫폼과 연결된 선로까지 보였으니 기차역은 분명했다.
부산에 한번 내려오시면 꼭 풀코스로 대접해 드리겠다던 후임이 문득 떠오른다. 그 친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이곳 부산에 내려와서 시스템 풀코스를 대접받고 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할 수 있다는 걸 안 기분이랄까. 내 안의 무언가가 뜨겁게 용솟음치는 듯했다.
“우웃, 갑자기 몸에 힘이 불끈불끈해!”
“뭐야, 내 근육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부산이 우호 지역으로 바뀌면서 모든 거점 방위자와 거점 일원의 신체 능력에 ++ 보정 효과가 붙었다. 지금이라면 체력이 후달려서 좀비들과 힘겹게 싸우는 일도 없으리라.
나는 미사일을 때려 박아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을 것 같은 부산역을 바라보며, 드디어 지역 커뮤니티 활성화와 생존자 집단 규합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제 김해의 공업 단지를 먹고 불필요한 쭉정이들을 걸러 내면 되겠군.’
김해에서 유일하게 아직 점령하지 못한, 김해 국제공항이 거슬렸다.
부산의 대규모 거점은 부산역, 김해의 대규모 거점은 김해 공항. 모두 내 손에 넣어야 안심이 된다.
“뭐, 부산역이 리뉴얼되면서 끊어진 선로와 교각도 복구되었으니, 어려울 건 없겠군.”
소수의 각성자와 군인들을 부려 먹던 저 역겨운 집단을 단죄하고 나면 내 마음도 조금은 편해지겠지.
* * *
상층부, 정확히는 김학렬 소장의 강압적인 명령과 등쌀에 못 이겨 결국 김해 공항의 물자 수색 팀은 강을 건너야 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부산에 발을 들인 그들은 다행히 강둑 인근이 조용한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움직였다.
저 폭군이나 다름없는 김학렬 소장, 그리고 머릿수가 쓸데없이 많아서 군인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고 있는 피난민들의 비위를 맞춰 주려면 뭐라도 건져야 했다.
“신선 식품은 이미 다 썩었을 테니 거들떠보지 마. 물이 없으면 끓여 먹을 수 없는 라면도 내버려 둬. 최대한 오래 보관하고, 별도의 조리 없이 먹을 수 있는 통조림부터 찾아. 식수와 의약품, 생필품은 그다음이야.”
작전 중 사망한 것으로 처리된 대위의 뒤를 이어 임시 분대장이 된 박지찬은 분대원들에게 알맞은 역할을 분배해 주었다.
이렇게 해도 일전의 돌연변이 좀비에게 습격당했던 일 때문에 인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모든 분대원이 제몫 이상의 일을 해 줘도 구할 수 있는 물자는 한정적이라는 것이다.
몇 안 되는 인원으로 사지를 돌아다니며 힘들게 물자를 구해 가도 좋은 소리 듣는 건 잠깐뿐, 이렇게 밑빠진 독에 물 붓는 일을 반복해 봤자 상황이 나아질 리 없다는 건 박지찬도 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그들은 달리 갈 곳이 없다.
절대다수의 집단이 가진 힘에 대항하자니 자신들과 같은 각성자의 수가 너무 적고, 애초에 좀비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군인으로 생활했던 그들은 누군가에게 군말 없이 충성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었다.
아무리 좆같고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군인이니까, 상급자와 민간인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가스라이팅을 당해 왔던 나날들이 그들의 정신을 옭아매고 있다.
각성자들끼리 김해 공항을 박차고 나와도 좀비들로 가득한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다못해 안전한 김해 공항에 붙어 있기라도 해야 하는데, 자꾸만 자신들을 사지로 내보내니 죽을 맛이었다.
‘이대로 가면 결국 우리가 버티지 못할 거야.’
김해 공항에서 좀처럼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릴 생각을 하지 않는 게으르고 뻔뻔한 작자들에게 희생을 강요받는 건 질렸다.
“차라리 우리 애들 데리고 그 병원으로 가면 받아 주려나…….”
박지찬은 대위를 일격에 처리하고 넘치는 물자까지 나눠 줬던 그 각성자가 떠올랐다.
그런 능력자가 관리하는 거점이라면 기꺼이 희생을 강요받더라도 일할 자신이 있었다. 최소한 일하는 자에게 대우를 박하게 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박살 난 편의점을 뒤지고 있던 그때, 박지찬은 무전기로 자신을 호출하는 분대원의 부름에 다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도로 한복판에 옹기종기 모여선 분대원들은 멍하니 ‘교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4주 전쯤에 김해와 부산, 양산을 잇는 모든 교각을 끊었을 텐데, 마법처럼 새로운 교각이 떡하니 두 지역을 잇고 있었다.
교각 위에는 추가 선로도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선로가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부산역 방면이었다.
“미친…….”
부산역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들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