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00)화 (101/227)

100화 정착기 (50)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같은 식으로 분위기를 잡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인생을 살아오는 매 순간이 결전이나 다름없었는데 이제 와서 빼곡한 이력서에 경력 한 줄 더 추가한다고 해도 극적으로 바뀌는 건 없으니까.

우리는 조용히 칼을 갈고, 장비를 점검했으며, 자신의 컨디션을 점검했다.

“지금껏 지나쳐 왔던 그 어떤 도시보다 조용한 것 같습니다.”

속도를 최대한 늦춘 ATX가 느릿느릿 선로 위를 움직이면서, 마치 관람차처럼 차분하게 부산의 풍경을 보여 주자 김진경 경장이 내뱉은 첫마디였다.

그의 말대로 부산은 조용했다. 동시에 싸늘하고, 또한 무거웠다.

국내에서 처음 좀비 바이러스가 확산되기 시작한 건 서울이었지만, 서울은 최소한 시민들이 피난을 갈 여유는 있었다.

하지만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불시에 부산항을 들이박으며 수천 마리가 넘는 좀비들을 쏟아 낸 일본발 크루즈선 때문에 부산 시민들은 피난을 갈 틈도 없었다.

그나마 부산 외곽에 거주했던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까스로 몸을 내뺐을 뿐, 부산 시민들 대다수는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좀비 떼에 집어삼켜졌을 것이다.

그 군대도 부산에서 몇 시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빠르게 김해 공항으로 물러나면서 결국 교각까지 끊어 버리지 않았던가.

지금의 부산은 마치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는 좀비들의 배양 장소나 다름없었다.

‘경험과 시간은 인간을 강하게 만들지만, 그건 인간을 베이스로 탄생한 좀비에게도 유효한 사실이다.’

내가 가장 먼저 상대했던 사태 초기의 좀비들은 인간을 발견하면 무지성으로 달려들어서 씹뜯맛즐 하려는 게 전부였는데, 불과 몇 주 만에 놈들의 행동 양식이나 사고가 크게 달라졌다.

매복, 기습, 몰이사냥, 협동을 터득해서 생존자 집단을 역으로 압도했던 것이다.

활천초에서 했던 개고생이 그 증거였다.

“곧 부산역입니다. 다들 준비하세요.”

객실 안에서 마지막 점검을 끝마친 팀원들이 눈을 부릅떴다.

이만철 세력이 공장에서 직접 만든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서로 끊임없이 작전 회의를 하면서 각자에게 걸맞은 포지션과 신호를 정해 두었다.

물론 이 소수 인원으로 부산역의 모든 좀비들과 정면 대결할 생각은 아니다. 정정당당하게 싸우려면 우선 양측 모두 머릿수를 비슷하게 맞춰야 하지 않겠나.

“전방에 부산역이 보입니다!”

한 팀원의 보고에 우리는 서둘러 움직였다. 동시에 선로 주변을 따라 느릿느릿 움직이는 ATX를 향해 서서히 뭔가가 몰려들기 시작한다.

‘이번 거점 전쟁은 쉽지 않겠군.’

지금까지 거점 전쟁은 총 2번 있었는데, 홈마트와 경희대 중앙 병원을 차지할 때는 모두 내부에 있는 좀비들만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부산역은 주변이 온통 개방되어 있는 초대형 건물이었고, 당연히 내부에 있는 놈들이나 외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던 놈들이나 ATX의 어그로에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곡사포를 다른 곳에 쏴서 좀비들의 어그로를 분산시킬까 고민도 했지만, 어차피 포성 때문에 여기에도 어그로가 끌리는 건 똑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외부에서 더 많은 좀비들이 부산역으로 유입되기 전에 거점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늘러 붙은 핏자국, 뼈만 앙상하게 남은 인간의 흔적들,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던 탓에 성한 곳 하나 없는 부산역 플랫폼으로 마침내 ATX가 진입했다.

예상했던 대로 바깥에선 보이지 않았던 좀비 떼가 플랫폼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여길 순수하게 사람의 힘으로 뚫으려 했다면 적어도 1개 사단은 끌고 왔어야 했을 것이다.

ATX 차창 밖으로 핏물 섞인 침을 뚝뚝 흘리며 안광을 희번덕이고 있는 놈들이, 아직 포장이 뜯기지 않은 음식인 양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각자 위치에서 대기 중인 팀원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지경이다.

“거점 지정.”

나는 대한민국에서 규모와 순수 이용객으로만 따지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며, 또한 경부선과 경부 고속선의 시‧종착역인 부산 최대 규모의 역에 거점 지정 스킬을 시전했다.

찌릿!

-경고 : 현재 해당 거점을 120% 장악하고 있는 모든 적성체는 홈그라운드 보정 효과를 받습니다.

-경고 : 해당 거점은 단일 거점으로 지정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거대합니다. 거점 지정 스킬의 숙련 레벨이 ‘B-’ 이상이어야만 거점 관리가 가능합니다. (거점 지정은 가능)

-거점 전쟁을 속행하시겠습니까? (Y/N)

살짝 따끔한 두통과 함께 나타난 살벌한 경고문은 명백하게 이쪽의 전투 의지를 꺾으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내가 어째서 밀양의 그 꼬라지를 보고도 밀양역을 손에 넣었겠는가.

부산을 기준으로 울산, 포항, 김해, 창원, 밀양, 대구의 모든 커뮤니티를 복구하고 생존자들 간의 협력을 강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부 지방을 다시 인간의 영역으로 되돌리고 나면 좀비들에게 빼앗겨 더 이상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 중부 지역, 그리고 한반도 북부까지 치고 올라가야 한다.

다른 나라의 사정은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마지막까지 편히 쉴 수 있는 안락한 보금자리와 노후를 원하는 거지, 전 세계를 위기로부터 구한 영화 속 히어로의 귀찮은 권좌를 원하는 게 아니니까.

“거점 전쟁을 속행한다.”

-현재 거점을 점령 중인 적성체가 너무 많습니다!

-‘강제 거점 탈취’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였습니다!

-강제 거점 탈취 조건 : 거점 지정 스킬 숙련 레벨 B- 이상.

-강제 거점 탈취 실패 시 거점 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거점 전쟁 실패 시 해당 거점 영구 탈취 불가.

벌써 3번째 보는 익숙한 안내 문구는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거점 전쟁 참가자 : 적성체 10570체, 퇴역병 1명. 간호사 1명. 경찰관 1명, 거점 일원 18명

-거점 내 중립체 : 존재하지 않음

-해당 거점은 상대가 120% 장악하고 있습니다. 양측 모두에게 ‘공평한’ 전장으로 전환되지 않습니다.

-거점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부산역’이 퇴역병 이승권의 임시 거점으로 지정됩니다.

-거점 전쟁 승리 조건 : 적성체 전원 처치 or 12시간 동안 사망 및 전장 이탈 없이 거점 내구도 30% 이상 방어

-거점 전쟁 패배 조건 : 임시 거점 내구도 30% 미만으로 하락 or 퇴역병 사망 혹은 전장 이탈.

-부가 승리 조건 : 거점 내 비상 발전기 가동

-거점 전쟁 승리 보상 : 21140 DNA 샘플 및 그에 상응하는 경험치. (x2 보너스) (거점 전쟁에 참여한 퇴역병의 동료 및 거점 일원들은 50%의 경험치만 나눠 받습니다)

-추가 보상 : 거점 내 중립체 생존 비율만큼 확률적으로 특전 스킬 혹은 아이템 지급.

-거점 패배 페널티 : 해당 지점에 영구적으로 거점 지정 스킬 사용 불가능, 해당 거점의 적성체 장악력이 한계치를 돌파하여 반경 10km 내에 존재하는 모든 생존자에게 표식을 남기고 24시간 동안 추적, 공격합니다.

홈마트는 점령 중인 좀비들의 수가 비교적 적었고, 경희대 중앙 병원은 생존자가 남아 있었기에 좀비들이 거점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부산역은 생존자 따윈 존재하지 않는 마굴 그 자체. 시스템이 증명하듯 120%라는 경이로운 장악력을 자랑했다.

당장 터지기 일보 직전인 벌집을 상대로 거점 전쟁을 걸어서 패배하기라도 했다간, 그 피해가 고스란히 다른 생존자들에게도 갈 거라는 사실은 덤이었다.

경희대 중앙 병원에서 상대했던 좀비 떼의 약 2.5배에 달하는 숫자. 거기에 놈들은 홈그라운드 보정 효과까지 받을 테니 아마 더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군대도, 소설 속 먼치킨 회귀자도 할 수 없다면 하다못해 거점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내가 해야 해.’

일행까지 사지로 끌고 들어온 건 살짝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나 아니었으면 다들 길바닥에서 객사했을 운명이니 빚을 돌려받는 셈 치기로 했다.

마지막 안내문을 넘기자 거점 전쟁을 알리는 신호가 터져 나왔다.

그건 거점 전쟁에 참여하는 모든 인원이 들을 수 있는, 이를테면 육상 선수가 출발 직전에 듣는 총성과도 같았다.

“그아아아아아아아아!!”

거점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블랙 프라이데이의 손님들처럼 밀고 들어오는 좀비 떼는 여간 기합인 것이 아니었다.

만약 내가 어쭙잖게 깝치는 멍청한 인간이었다면 이 광경을 보자마자 바지를 촉촉하게 적시면서 역돌격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사람을 믿는 건 아니다.

우리의 앞날에 걸려 있는 커다란 이권과 인간들이 가진 강렬한 생존 본능, 그리고 나 자신이 가진 이 능력을 믿고 있다.

“당겨!!”

내가 무전기 너머로 목청이 터져라 외친 순간, 팀원들이 일제히 ATX 객실 내부에 연결된 화염방사기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객실 외부에 삐죽 튀어나와있는 화염 방사기의 노즐이 눈부신 화염을 퍼부었다.

ATX를 향해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뭉쳐서 일제히 돌진한 좀비 떼를 향해 고루고루 흩뿌려진 초고열 화염은 순식간에 눈앞의 모든 것을 살라 먹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엑!”

“카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그륵! 그르륵! 그웨에에에에……!”

두꺼운 추가 장갑판이 덧대어져 있는 ATX 동체 외부에 들러붙어 필사적으로 손톱으로 긁어 대거나 주먹으로 쾅쾅 쳐 댔지만, 이 ATX가 뚫리는 일은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지척에서 마주한 거북선이 아마 이런 느낌 아니었을까?

필사적으로 두들기고 긁어 봐도 흠집 하나 나지 않고, 오히려 압도적인 화력으로 자신들을 녹여 없애는 거대한 괴물 앞에선 좀비라고 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ATX 주위로 몰려든 놈들이 앙증맞은 찐빠 짓을 벌이다 화염 방사기 앞에서 ‘기열’당하는 모습은, K-신파극 3부작도 넘볼 수 없는 감동 실화 그 자체였다.

“1팀 화염 방사기 잔여 연료 26%!”

“2팀도 30% 아래까지 떨어졌습니다!!”

-3팀은 15% 남았습니다!

-4팀은 34%……이제 30%……!

가까운 객실에서부터 먼 객실에서 들려오는 보고까지 차례차례 받고 보니 화염 방사기도 여기까지구나 싶었다.

내 거점 방위 무기들은 정말 다 좋은데 딱 하나 단점이 있다면 너무 조루라는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화염 방사기의 연료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써먹게 한 나는 손이 빈 팀원들을 이끌고 ATX 지붕 위로 올라갔다.

합판이 쫙 깔려 있는 ATX 지붕 위에는 미리 내가 배치해 둔 거치형 기관총이 있었다. 거기에 아껴 두었던 자동 포탑까지 추가 배치되자마자 좀비 떼는 눈물을 머금고 또 한 번 밀려나야 했다.

드가가가가가가가!

자동 포탑이 묵직한 12.7mm 탄피를 열정적으로 토해 내는 사이 나는 팀원들을 다그쳤다. 조금만 실수해도, 화망이 무너지기만 해도 이 작전은 실패한다.

서로가 서로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만큼 모두의 합이 기가 막히게 잘 맞아야 한다는 뜻이다.

“뭣들 하고 있어! 사수들은 빨리 기관총부터 잡아!”

자동 포탑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

12.7mm는 분명 강력하지만 화염 방사기와 마찬가지로 화력 조루였으니까.

하지만 거치형 기관총은 커다란 500발짜리 탄약 박스가 연결된 물건이었다. 사수가 직접 다룬다면 적절하게 화망을 잡아 가면서 꽤 오랫동안 버틸 수 있으리라.

곧 자동 포탑이 하나둘씩 탄약이 떨어져 침묵하고, ATX 인근에서 엄청난 시체의 산을 쌓은 좀비들이 다시 한번 진군을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른 인간들의 피륙으로 잔치를 벌이겠다는 양 죽기 살기로 뛰어오는 놈들이 새삼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사수로 배정받은 사람들은 이미 거치형 기관총을 잡고 방아쇠를 당길 준비만 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고작 오병이어로 수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도 열두 광주리 잔반을 남기셨거늘, 나 김해의 적법한 군주이자 경상도를 계승할 남자 이승권이라면 능히 1만 마리가 넘는 좀비를 총알로 배불리 먹일 수 있음이라.

“자, 준비들 하시고!”

그아아, 그아아. 아주 그냥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소음 공해를 내뱉는 새끼들이 슬슬 거슬린다.

미안하지만 이제 방 좀 빼 줬으면 한다. 우리나라 임대차 보호법은 불법 점유자까지 보호해 주진 않거든.

“갈겨!!”

다다다다다다다다다!

화염 세례에 이은 기관총의 총탄 세례가 시체의 산 위에 시체 포인트를 차곡차곡 적립시켰다.

0